12월답지 않았던 그간의 날씨를 비웃기라도 하듯 연극이 시작한 일요일 오후는 제법 쌀쌀했다. 공연을 보려는 연인들로 대학로는 붐볐고, 극장엔 방역패스를 확인하는 줄이 짧지 않게 늘어섰다. 입장하기 전부터 이미 '매진'을 알리는 문구가 티켓박스에 내걸려 현장구매를 원하는 상당수는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하지만 이번 공연의 특이한 점은 로비에 모인 사람들만 봐도 된다. 일흔은 넘어 보이는 백발의 어르신이 학교 문턱도 넘지 못한 손자와 손을 잡고 온 것. 대부분의 아동극이 어린이를 동반한 젊은 부모가 2차 고객인데, 이번 작품은 세대의 격차를 더욱 넓혔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무엇보다 특정 계층을 집중 공략하지 않아도 기대감을 들뜨게 만든 비결이 궁금하다.
 
연극 <서찰을 전하는 아이>(12월 12~19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는 무려 15만 독자의 선택을 받은 베스트셀러에서 출발했다. 연출을 맡은 한윤섭(에이치프로젝트 대표)씨는 동명의 동화를 쓴 작가이자 작품을 지휘한 제작자다. 이는 작품의 성장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당사자라는 의미이기도. 여기에 책장에서 무대로 나오기까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인연이 있었음을 부인할 순 없다.

희곡 <아이, 동학을 만나다>는 2019년 '문학주간 작가스테이지'를 통해 20분가량의 쇼케이스로 '예술가의집'(종로구 동숭동)에서 공개된 바 있다. 이때 희곡의 가능성을 엿봤고, 그해 '창작산실 대본 공모'에서 선정돼 90분의 희곡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듬해 11월 4일, 낭독극을 마친 후 처음으로 완성작을 대중에 공개했다. 내년 1월 27일에는 공연실황을 온라인에서 상영하는 '아르코 온라인 극장(tv.naver.com/arko/live)'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아이는 아버지 대신 길을 나섰다
 
 오랫동안 아파 누워 있다가 아이의 노래 소리를 들은 김진사는 "네 소리엔 약이 들어 있구나"라고 말하고 있다.

오랫동안 아파 누워 있다가 아이의 노래 소리를 들은 김진사는 "네 소리엔 약이 들어 있구나"라고 말하고 있다. ⓒ Aejin Kwoun

 
연극은 제목에서 보듯 '한 통의 편지를 전하는 소년의 긴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여느 편지가 아니라 '한 사람과 세상을 구할 아주 중요한 소식'이라며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1894년(고종 31년), 구한말 보부상의 자식인 소년(양소영)은 아버지(장기용)를 따라 장터를 떠돌아다닌다. 서찰을 전하는 임무를 맡은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소년은 한양에서 전라도까지 대신 전하기 위해 여정을 떠나며 당시의 시대상을 그렸다.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조선시대를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것은 동학농민운동이 배경인 연극 초반에 등장한 아버지의 대사로부터 살짝 엿볼 수 있다.
 
"동학을 하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단지 서로 믿는 것이 다를 뿐. 그걸 죄라고 여기는 사람이 잘못이지. 동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믿는다."
 
500석이 넘는 대극장에서 진행되는 <서찰을 전하는 아이>는 정통 드라마를 지향한다. 뮤지컬이나 오페라도 아니고 오리지널 극이 이렇게 광활한 무대를 어떻게 채울지 궁금했다. 하지만 막이 오르면서 공개된 무대연출의 스케일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다음으로 놀라운 건 수백 명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장면전환에서 고해상도 영상의 도움을 받은 사실이다.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 아이가 풀어야 할 10자의 한문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자막으로 처리한 것이. 아마도 소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을 영화기법으로 메운 것이라 추측한다. 그리고 미취학 아동을 배려하듯 종종 따듯한 교훈을 던지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김학철, 장기용, 강선숙 등 연기력이 검증된 탄탄한 중견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 서사극으로서 중심을 놓지 않으려 했다.
 
<서찰을 전하는 아이>는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며 전개된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전초가 된 동학농민운동을 비롯해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 구한말 보부상, 수만 명이 몰살당한 우금치전투 등 당대에 있었던 시대적 배경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여기서 인물들 간 주고받는 대사는 효과를 높이기 위해 약간의 각색을 거쳤지만 사실감을 흔들진 않았다.

이런 과정은 배우의 대사에 그대로 드러난다. 한 예로, 왜놈과 청나라가 싸우는 현장이 왜 조선이냐는 소년의 물음에 "임자 없는 떡"이기 때문이라고 묘사한 부분은 일제 강점기 직전의 암울한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했다. 또한 극의 뼈대를 이루는 동학농민운동의 배경도 등장인문의 대사를 통해 오롯이 전달됐다.
 
"처음에는 전라도 고부 땅에서 일어났다고 하더라. 조병갑이라는 고부 군수 놈이 어찌나 백성들 것을 빼앗고 못살게 굴던지 도저히 살 수가 없었지. 그래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거야. 거기에 동학도들이 주축이 돼서."

100년이 흘러도 의미있는 '행복한 세상'
 
 녹두장군을 만나러 가는 아이와 함께 경천이 배에 오르고 있다.

녹두장군을 만나러 가는 아이와 함께 경천이 배에 오르고 있다. ⓒ Aejin Kwoun


 
아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사찰을 전하기 위해(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수원에서 전라도까지 홀로 여정을 떠난다. 90분간의 연극은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연극은 사실에 입각한 서사의 탈을 쓰고 있지만, 우리 노래인 소리(민요)가 막을 구분 짓는 주요 요소일 정도로 이 연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원래 '민요'라는 것이 정해진 가사가 없고, 입을 통해서 전해 내려오기 때문에 당시 민중의 마음을 고스란히 전하는 수단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연극은 당시 백성의 아픈 마음을 치유하는 수단으로 민요를 차용한 연출자의 시도가 눈에 띄었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 맞게 적재적소로 불려진 노래(민요)는 이 연극이 서사극이지만 뮤지컬로 보는 시선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들 정도다. 덧붙여 민요가 던지는 부가적인 순기능을 알아채는 것도 극의 보는 재미를 더한다. 아이가 부르는 노래를 들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아이야, 네 소리엔 약이 들어 있구나"를 반복하면서 말이다.
 
앞서 원작이 어린이를 위한 동화에서 출발한 배경을 설명한 이유가 정통파 배우가 전하는 진지함 속에서도 어린이 관객을 위한 배려를 소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판 어린왕자'로 불리는 원작은 2012년 광양시, 2014년 평택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에 선정될뿐 아니라 지금까지 1000곳이 넘는 학교와 도서관, 교육청에서 지정도서로 뽑힐 만큼 어린이가 꼭 읽어야할 대표 책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런 이유는 장사꾼의 자식으로 셈이 밝은 13살 소년이 한문 10자를 해독하며 여정을 풀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의 해법을 찾는 기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소년이 풀어야 할 한문의 대가로 '2자에 2냥'에서 시작해 '3자에 2냥', '3자에 1냥', 나중에는 2자에 무일푼(노래 1곡)으로 수완을 발휘하는 협상의 기술을 보여준다. 또한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선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No Pain No Gain)"는 메시지는 연극을 마치고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배움의 철학'을 가르쳐주는 교훈으로 들리게 했다.
 
"너무 서운해 할 것 없다. 그 두 자를 안 것이 이 두 냥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래야 네가 안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서찰을 전하는 아이>는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13살의 눈으로 바라본 조선의 어두운 역사를 보여주지만, 주제는 정확하게 하나로 모아진다. 천주학의 가르침이 "그분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 그분 아래 있는 사람은 모두가 평등하다"라고 전하면서, 연극은 "양반과 천민의 구분 없이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바라는" 내용이다.

동학농민운동이 구한말 의병으로 이어졌고, 이후 해방과 함께 민주화운동으로 확산된 것처럼 우리가 차별 없는 세상에서 민주주의를 꿈꾸는 지금의 바람과 뭐가 다른 지 되묻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아픔을 담았지만, 100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차별 속에서 고통 받는 이 사회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곱씹어보자는 의미로 소년의 마지막 대사가 귓가를 맴돈다.
 
"좋은 세상 만들겠다고 사셨잖아요. 양반 상놈 없는 평등하고 살기 좋은 세상, 행복한 세상을 만드셔야죠."
서찰을 전하는 아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온라인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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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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