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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대립 뿐만이 아니라, 한국 내부의 보수와 진보진영 간의 대립을 염두에 두면서, 현재의 상태에서 1세기 정도 이전으로 시간차를 두고 뒤돌아볼 때 이것이 어떻게 일본 내 혐한인식과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지 12년 뒤인 1931년, 조선총독부 법무국은 <조선독립사상운동의 변천>이라는 책을 서울에서 출판하면서 조선의 독립사상에 대해 분석한다.

조선총독부 청사 전경. 1926년 경복궁 내에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모습이다. 

(본 저작물은 '서울역사박물관'이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것을 이용했으며, 해당 저작물은 museum.seoul.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조선총독부 청사 전경. 1926년 경복궁 내에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모습이다. (본 저작물은 "서울역사박물관"이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것을 이용했으며, 해당 저작물은 museum.seoul.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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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독립운동을 한국병합 전후로 일어난 국권회복운동, 3.1운동이후 나타나는 민족자결운동, 1920년대에 전개되는 공산주의운동 등 세가지 운동으로 분류하여, 당시 독립운동가에 대한 탄압과 판결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국권회복기에 나타나는 독립운동으로는, 한국병합 전의 사건으로 친일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과 이또우 히로부미의 암살, 이완용에 대한 암살미수사건을 다루고 있다. 병합 후에는 테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다루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제1차대전후 파리강화회담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미국의 월슨대통령이 제안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3.1운동이 일어난 것으로 파악하면서, 고종의 갑작스런 서거가 도화선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의 독립운동은 한국병합 뒤 민족자결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이라는 커다란 두가지 줄기로 나뉘는데, 오늘날 한반도 분단국가를 상징하는 듯한 모습이 1세기 전인 1920년대 독립운동가에 대한 판결을 통한 분석에서 나타나고 있다.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는 해방 뒤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 토대가 되었다. 1925년 설립된 조선공산당은 3년후 해체되고, 그 후 재건과 강제해산을 반복하면서,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해방이 되는 해 9월 조선공산당은 서울에서 재건되는데, 11월에는 평양에서 북조선분국이 들어선다.

조선공산당은 민족해방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상해임시정부의 공헌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해방운동의 주체는 노동대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후, 1949년 6월 남·북조선로동당이 조선로동당으로 합쳐졌으나, 실질적으로는 북이 주도하는 형세였다.

통일 구슬 꿰맞추기

남한이 해방을 맞이한 것은 미국 등 연합국의 역할도 있었지만, 국내외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독립에 대한 노력과 의지를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

오히려 해방 뒤 분단은 미국이 제안한 비극에서 출발한 것으로, 앞으로 복원할 통일을 위해서는 국제사회와도 협력해야 하겠지만, 미국에만 의존하려고 하는 관성적이거나 타성적인 자세도 지양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의 분단은 조선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보이기 시작하고, 이는 앞으로 봉합하는 통일과정에서도 꿰맞추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열린 '2018 남북정상회담'에서 '판문점 선언'에 서명한 뒤 교환하고 있다.
▲ 남-북 정상, "판문점 선언" 서명 교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열린 "2018 남북정상회담"에서 "판문점 선언"에 서명한 뒤 교환하고 있다.
ⓒ 한국공동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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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일본은 민본주의 등 오늘날 민주주의에 근접하는 사상이 지식인들 사이에 확산되기도 하지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극도로 경계하면서 사상통제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민본주의에 경도된 지식인들도 감시를 받게 된다.

이러한 사상통제는 일본에서 만들어졌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는 더욱 철저하게 적용되어 통제되었으며, 공산주의 운동을 통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이 일본에 역유입되는 것을 경계해 온 것이다. 이는 당시 재판을 통해 사상이 분석되고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대표적인 공산주의 사상탄압 재판에 주목해 보기로 한다.

1931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6년 징역형을 받는 인정식(1907~?)의 경우다. 판결이유는 이렇다. 평안남도 용강 출신인 피고(인정식)는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해 일본 호세이 대학에 유학을 한 후, 경제학 서적을 탐독하면서, 공산주의 운동에 경도되어, 청년운동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기소된 이유였다. 구체적으로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공산제도를 실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는 것이 구체적인 죄목이었다.

우리나라 유신체제에서 학생운동을 탄압할 때도 비슷한 정황이 나타나는데, 사상검사와 특고(특별고등경찰)가 중심이 되어 사상을 억압하는 경우, 식민지시대와 해방후를 연결시키고 있다. 이후, 인정식은 1938년 4월 야학활동으로 또 다시 검거된 후 사상전향을 하여, 해방직전까지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하게 된다. 해방 뒤 북한에서 농업상으로 일시적으로 활동하지만, 그 후 소식이 두절된다.

일본 사법부는 조선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판을 통해 조선독립운동이 민족자결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점을 찾아내고, 독립운동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는 1세기가 지난 현재 남북의 통일을 위해서는, 서로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분단이 주는 영향 

제2차대전에서 패전 뒤 점령기를 거쳐 일본은 민주화를 강조하는 가운데, 정치 자유화가 전개되지만, 실질적으로 반공주의 노선을 선택하게 된다. 공산당과 사회당의 정치활동은 허용되지만, 국제연대와는 느슨한 연결고리 밖에 없었고, 국민으로부터 지지도 높지 않았다.

일본이 실질적으로 반공주의를 선택한 배경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에 의한 점령기간도 있었지만, 대외침략전쟁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탄압을 통한 반복적인 세뇌와 대중 학습이 여기에 영향을 주었으며, 일본이 전후 부흥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통한 번영에 매진하기 위해서였다.

한반도에서의 분단과 대립, 한국의 반공주의는 일본,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동아시아에서 반공블럭의 최일선을 담당하는 국가로 직진하는 노선과 연계되었다.

역사적으로 임진왜란에서 일본은 명과의 협상에서 거론되는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에 대한 할양 요구, 러일전쟁 이전 러일협상에서 나타난 한반도에 대한 분단이 거론된 것은 타결여부와 상관없이 일본의 안보와 관련된 연장선에서 되풀이된 테마였고, 현재도 일본의 안전보장과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맞물려 한반도 정세를 바라보는 시점이 되고 있다.

오늘날 미중대결 속에서 일본이 최전선에서 중국에 맞붙기 보다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것은, 오히려 일본이 여유를 갖고 미국 편에 서기 쉬운 선택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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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외형적인 성장과 함께 그 내면에 자리잡은 성숙도를 여러가지 측면에서 고민하면서 관찰하고 있는 일본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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