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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월드고속훼리 소속 퀸메리호는 12월 5일 오전 9시 정시에 목포항을 빠져나왔다.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는 아침햇살을 받아 물고기처럼 반짝인다. 이날부터 22년 1월 4일까지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하기로 했다.

이번 여행을 위해 2개월 전에 숙소를 예약해놓고, 며칠 전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먹을거리며 옷가지 등과 최소한의 살림살이를 준비했다. 그 수고로움이 물결에 스며 심해 깊숙이 사라진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나의 로망, 버킷리스트 하나를 실천하는 것이다.

1998년에 진수된 1만3665톤급의 거대한 여객선은 시속 44㎞의 느린 속도로 목포 앞바다를 벗어나 해남과 신안, 그리고 진도의 크고 작은 섬 사이를 유영하듯 항해한다. 선내는 여객이 적어 한산하다. 비어홀에 앉아 생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스크린처럼 흘러가는 바다 풍경에 심취했다. 다도해를 벗어난 배는 망망대해를 거침없이 달린다. 푸른 바다가 마음 가득 평화를 채워준다.

이번 여행은 32년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며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은 귀한 시간이다. 그래서 더 각별하다. '진정한 여행의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여행을 통해 그동안 직장생활로 정형화되고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 새롭고 유연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며, 자유로운 제2의 인생을 꾸려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겨울이라지만 따뜻한 날씨여서 승객들은 갑판에서 사진을 찍거나 해바라기를 한다. 1월에 태어난 나는 겨울이 좋다. 그래서 이번 여행도 겨울을 택했다. 그리고 제주도 여행은 어쩐지 겨울이 제격일 것 같다. 무엇보다도 맛있는 감귤이 지천으로 널려있지 않은가.

추자도를 지나자 승객들이 벌써 술렁대기 시작한다. 하얗게 눈이 덮인 한라산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근 3년 만에 찾는 제주도다. 여객선은 4시간여를 항해하여 오후 1시가 조금 넘어 제주항에 도착했다. 발열 체크와 차량 소독을 거친 후 곧바로 예약된 숙소가 있는 애월읍으로 이동했다.

숙소는 사진 속 풍경과는 다르게 주변이 정리되지 않은 채 어수선하고 지저분했다. 짐을 옮겨 정리하고 아내는 방 안 청소부터 시작해 현관까지 거미줄을 걷어내고 빗자루를 구해 쓸어냈다. 청소를 끝내고 보니 둘이 한 달 동안 지내기에 나쁘진 않았다. 제주살이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억새가 아름다운 섬, 차귀도 
 
차귀도 가는 유람선 선착장에 오징어가 빨래처럼 널려 여행객들의 시선을 끈다.
▲ 고산 선착장에 빨래처럼 널려 있는 물오징어 차귀도 가는 유람선 선착장에 오징어가 빨래처럼 널려 여행객들의 시선을 끈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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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은 전날보다 더 맑고 포근한 날씨다. 좋은 날씨가 아까워 차귀도 배편을 알아보고 예약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해 가능하면 사람이 붐비는 관광지는 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차귀도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라 마음에 두었던 여행지였다. 2000년도에 천연기념물 제422호로 지정된 차귀도는 제주시 한경면 고산 해안으로부터 1㎞ 떨어져 있는 무인도다. 제주도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하는 섬이기도 하다.

50인승인 차귀도 유람선은 오징어가 빨래처럼 널려 있는 고산 선착장에서 20여 명의 승객을 태우고 출항해 10여 분만에 차귀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전체 길이 920m, 폭 430m에 동서 방향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차귀도의 면적은 15만5861㎡이다. 정상은 표고 61m이다.

반대편 서쪽 봉우리에는 하얀색의 아담한 등대가 홀로 섬을 지키고 있다. 섬을 천천히 한 바퀴 도는 데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바람과 파도에 시달려 관목들만 조금 있을 뿐 대부분 억새와 띠가 섬 전체를 덮고 있다.

섬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이 사뭇 신령스럽다. 왼쪽으로는 멀리 해상풍력단지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오른쪽에는 수월봉이 뱀처럼 길게 누워 있다. 차귀도 주변에는 지실이섬, 누운섬, 독수리 바위 등 무인도가 차귀도를 외롭지 않게 한다.

무인도에는 낚시꾼들이 삼삼오오 바위낚시를 즐긴다. 섬의 자갈밭에는 폐어구와 플라스틱류의 쓰레기가 볼썽사납게 널려있다. 낚시꾼들도 바다를 오염시키는 데 만만치 않은 역할을 할 것이다.

큰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바람보다 먼저 눕는 마른풀들을 뒤로하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유람선은 그 새 또 한 무더기의 관광객을 싣고 와 선착장에 부려놓고 우리를 태웠다.

선장이 인심 쓰듯이 섬 주변을 천천히 돌며 유람시켜줘 섬의 속내뿐 아니라 뒷모습, 옆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우리 팀 뒤로 차귀도에 도착한 이들이 바쁘게 섬을 돌아다니는 걸 보며 우리도 빠르게 고산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차귀도 주변의 바위섬들, 멀리 수월봉이 길게 누워 있다.
▲ 차귀도 주변 바위섬과 수월봉 차귀도 주변의 바위섬들, 멀리 수월봉이 길게 누워 있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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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인근 수월봉으로 이동했다. 수월봉은 작은 언덕 모양의 오름이지만, 해안절벽을 따라 층층이 쌓인 화산재 지층 속에 남겨진 다양한 화산 퇴적구조로 인해 화산학 연구의 교과서 역할을 하고 있단다.

지질학적으로 중요하고 경관이 아름다워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지질공원이다. 수려한 절벽을 따라 난 트레일 코스를 따라 걷노라면 1만4000여 년 전 펄펄 끓는 마그마 열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수월봉 꼭대기 전망대에 오르니 차귀도, 송악산, 단산, 죽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수평선 너머로 잔잔하게 펼쳐지는 붉은 일몰이 여행자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싼다. 겨울 해는 짧아 오후 5시가 넘으면 금방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내린다. 멀리 바다에는 오징어잡이 배들의 집어등 불빛이 희망처럼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보내준다.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그 일의 역동성을 그 열의에서부터 역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 준다'. 여행은 어떤 틀이나 방식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내 취향과 체력에 맞춰 행복을 찾아가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태그:#제주도, #퀸메리호, #차귀도, #수월봉, #제주도 한 달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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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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