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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의 비밀

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 수업은 중학교와 확실히 달랐다. 역사 수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선생님은 첫 시간에 대학원에서 북한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소개하셨다. 지난 6월 25일, 6·25전쟁을 말씀하실 때 전혀 모르던 내용이라 우리는 넋을 놓고 들었다. 시험과는 관계없지만, 글을 쓰기 위해 여러 명이 메모를 하였다.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로 가서 추가 질문도 하고, 이를 보면서 글을 쓰고 있다.

선생님은 북한과 중국이 혈맹관계라 하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셨다. 첫째, 해방 전에 만주의 조선족이 중국군에 속하여 일본에 대항하여 싸웠다. 이들을 연안파라 부른다. 둘째, 해방 후에는 역시 조선족 청년들이 공산군에 편입되어 국민당군을 몰아내는 데에 많은 공을 세웠다. 셋째, 6·25전쟁 때는 중국이 조선족 군인을 보내주었고, 인천상륙작전 후에는 중국군 240만 명을 파견하였다. 그 결과 1962년 국경을 나누면서 압록강에 있는 섬 다섯 개는 북한 영토로, 백두산의 3분의 2는 중국 영토로 하는 '중조변계협약'을 맺었다. 위화도회군으로 유명한 위화도는 그래서 북한 땅이 되었다. 북한도 중국도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6·25전쟁을 계획하던 김일성은 1949년 4월 민족보위성 부상 김일을 중국에 파견하였다. 중국인민해방군 각 사단에 소속된 조선족 군인의 북한 귀국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6·25전쟁에 반드시 조선족 군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중국인민해방군 164사단과 166사단은 모두 조선족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1949년 7월과 8월, 3차례에 걸쳐 북한으로 넘어왔다. 삼팔선에 가까운 원산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북한 인민군 5사단과 6사단이 되었다.

조선족 군은 6·25전쟁 때 북한군 9만 명 중 4만 명이니, 거의 반이나 되었다. 이들은 중국 내전에서 국민당군과 치열한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어 전투력이 막강하였다. 서울을 가장 먼저 점령하고 여수까지 밀고갈 수 있었다고 한다. 전쟁 후 중국에서는 참전한 모든 군인에게 훈장을 주었다. 그분 중 일부는 88올림픽 이후 국내에 정착하고 국적을 취득하기도 하였다.

선생님은 박명림 교수가 쓴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에 자세히 나와 있다고 책까지 소개하셨다. 아! 이 말씀을 들으니 얼마 전 일이 생각났다.

"정연아! 시를 쓰는 문학소녀니 너에게 보여줄 비밀이 있다." 지난 겨울방학 때, 원주 외가에 갔더니 큰외삼촌께서 낡고 빛바랜 노트를 꺼내주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께서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쓴 일기책이었다. 읽기 시작하면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평범한 농사꾼으로 고향에서 시를 쓰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어지러운 역사를 온몸에 담고 계신 분이었다. 과거를 모두 숨기고 살아온 분이었다.

원래 외할아버지의 고향은 강원도 원주다. 일제강점기에 너무 먹고 살기가 힘들어 지인의 소개로 부모님, 세 형제와 만주 연길이라는 곳으로 이주하셨다. 거기서 땅을 개간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때, 만주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활발하였고 대부분 조선족은 공산주의에 가담하였다. 땅을 공짜로 나눠준다는 공산주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면서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외할아버지는 젊기에 공산군으로 참전하여 국민당군과 싸우게 되었다. 국민당군은 무기는 우수했지만 사기가 부족했고 부패가 심하여 백성들의 민심을 얻지 못했다. 1949년 4월, 국민당군이 타이완으로 철수하면서 내전은 공산당의 승리로 끝났다.

외할아버지를 비롯한 조선족 군인들은 중국군의 일원으로 승리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고 두 동생은 그곳에서 죽어서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제대하지 않았다. 중국군으로 계속 근무하였다.

1949년 7월, 조선족 군인은 만주 단동에 모이라 명령이 내렸다. 조국으로 간다고 한다.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였다. 8월 강원도 원산에 도착하였다. 유명한 원산해수욕장 그곳이다. 훈련이 시작되었다. 알고 보니 김일성이 일으키는 6·25전쟁에 조선인민군으로 참전한다는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외할아버지가 소속한 부대는 제일 먼저 38선을 넘어 서울로 진격하였다. 넓은 중국에서 국민당군과의 전쟁 경험이 있어서 38선을 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한국군은 탱크가 없어서 속수무책이었다. 의정부를 거쳐서 서울로 들어왔다. 경복궁 자리에 조선총독부가 있었고 해방 뒤에는 중앙청이라고 불렸다. 그 앞에 태극기를 내리고 북한 인공기를 건 것이 할아버지 부대다. 사단장이 중국에서도 명성을 떨쳤던 방호산으로, 외할아버지가 속한 부대는 방호산부대로 불리는 인민군 6사단이었다.

사흘 뒤 외할아버지 부대는 한강을 넘어 남쪽으로 밀고 내려갔다. 전라남도 여수까지 갈 수 있었다. 9월에 들어서자 미군이 상륙작전을 전개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외할아버지는 심한 고민에 빠졌다. 아수라장을 보고 치가 떨렸다. 무엇보다 같은 민족한테 이렇게 해야 하는 심한 갈등이 생겼다. 연길에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갈 필요성도 전혀 없었다. 고향이 원주라는 점과 친척이 남아있어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철수할 때는 어수선하여 경계가 심하지 않았다. 대전을 지날 무렵, 야밤을 틈타 산을 넘어 도주하는 데 성공하였다. 낮에 숨었다가 한밤중에 몰래 민가에 들어갔다. 인민군복을 벗어 바위 밑에 감추고 남자옷을 훔쳐서 입었다. 머리가 길어 거지처럼, 정신병자처럼 행세하면서 원주로 숨어 들어갔다.

고향 원주에는 집안 대부분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계셨다. 다행히 집안 어르신 중 한 분이 정보기관에서 일하고 계셨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호적을 바꾸는 데에 성공하였다. 공산주의에 협력한 사람들을 색출하여 감옥에 보내고 최고 사형까지 내렸다. 외할아버지는 무사할 수 있었다. 과거를 숨기고 안전하게 고향 처녀와 결혼하고 살았다. 지금도 살아계신 외할머니다. 외삼촌도 이 비밀을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 알았다고 한다. 왜 숨겨야 했을까. 아니, 숨길 수밖에 없었다. 숨겼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소년 시절엔 일제식민지 아래 조선에서, 청년 시절에는 만주에서 조선족으로, 이후에는 중국군으로 호적이 계속 바뀌어 살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으로서, 나라가 없는 한과 설움 속에 어렵게 살았다. 연길에서 부모님과 두 동생도 죽었다. 외할아버지와 같은 한많은 인생이 다시 발생하지 않으려면 부강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잘 사는 나라가 되는 방법, 한 마디로 경제력이다. 경제력이 높아야 군사력이 강하고, 또 경제력이 높아야 문화 수준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주변에는 강대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있다. 역사 속에서 특히 우리는 중국과 일본에 끊임없이 침략을 당했는데, 그 이유는 우리나라가 약하고 못 사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경제력은 교육에서 나온다. 미국이 세계 최강인 것은 교육의 발달 때문이다. 한국에 모든 대학이 400개 정도다. 이에 비해 중국은 2,600개인데 미국은 4,800개의 특성화 된 대학이 있어 학문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인구는 4분의 1도 되지 않는데 대학은 두 배 가까이 되니, 여기에서 미국의 힘이 나오는 것이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면 대부분 통일이 안 되기를 바란다. 북한이 워낙 못 살기 때문에 통일은 우리에게 손해라고 말한다. 역사 선생님은 우리에게는 역사 속에서 외침을 극복한 분명한 DNA가 있고, 현재 경제력이 북한을 껴안을 능력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중학교 2학년 때 정년퇴임을 하신 역사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 말씀이 머리에 남아있다. 우리가 통일을 이루고 경제력을 더욱 높여야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사과를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통일이 이루어져야 중국도 우리나라를 더는 무시하지 않게 된다. 제발 북한에 대한 나쁜 생각, 빨갱이라는 말도 없어지고 동포애로 포용해야 한다. 북한의 자원과 노동력, 남한의 기술과 자본을 합치면 일본보다 잘 사는 나라를 만들 수 있기에,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힘차게 말씀하시고 마지막 수업을 끝내셨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나, 시인으로 통일의 기쁨을 장편서사시로 쓰고 싶다.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과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답사하고 역사시도 쓸 것이다. 금강산과 묘향산, 백두산을 돌아보고 그 아름다움을 서정시로 쓰고자 한다. 통일이 이루어지면 시인으로 할 일이 많다.

이제야 외할아버지의 비밀을 글로써 밝힌다. 다시는 우리 외할아버지와 같은 분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소감>
소설을 가르치는 선생님께서 문학 특히 소설은 시대상황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어 암울한 시대일수록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하셨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역사의 비극이 외할아버지의 삶을 기구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로 인해서 글을 쓰고 상을 받으니 문학은 체험의 결과라는 말이 실감난다. 특히 외할아버지의 비밀 노트를 저에게 주신 외삼촌에게 감사를 드린다.

대학에 가면 시간을 내서 외할아버지의 삶을 장편서사시로 쓰고 싶다. 파란만장한 여정은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아! 통일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기구한 사연들이 문학으로 선보이게 될까?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기대된다.

신정연(안양예술고등학교 2학년)

태그:#통일염원 글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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