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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은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2006년~2010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팀장을 역임했다. 이후 2013년~2021년 현재 그는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자와 필자는 의문사위와 진실위 '직장동료'였다. 그동안 저자는 <전쟁의 그늘>, <한국전쟁, 전장의 기억과 목소리>,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 등 10여권의 책을 썼다.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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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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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1950년 6.25 전쟁 시기를 전후해 경기도 고양지역의 주민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생존자들을 일일이 만나 상세히 재구성했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넘었음에도 그 기억 속의 전쟁 상황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비인간적이고 끔찍하다"며 필자에게 담담히 술회했다. 다음은 지난 1일부터 10일까지 저자와 이 책과 관련해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책에서 국가가 국민의 전향을 빌미로 돈을 갈취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결국 이승만 정권에게 이념(반공)보다는 돈이 더 중요했던 것인가?
"국민보도연맹에서 탈퇴하는 조건으로 이승만 정권에서는 당시 돈 3천 원을 받았다. 당시 농민들의 가장 큰 재산인 황소 한 마리가 10만 원 하던 때였으니 큰돈이었다. 당시 전향한 사람들의 이름이 주기적으로 언론에 공개되었는데, 내가 본 자료의 명단만 대략 1천 명은 넘어 보였다. 모두 돈을 냈을 것이다. 반공이나 반북이라는 이념 뒤에는 언제나 재산 갈취와 어두운 부의 축적이 함께 있었다."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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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중 상당수의 전선은 후퇴하는 국군보다 인민군이 먼저 내려간 경우도 많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나?
"낙동강전선 형성이후 반격한다는 계획은 전쟁초기부터 군 간부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1950년 7월 4일경 있었던 열차를 이용한 국군 8사단의 대구 후퇴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전략적 후퇴이다 보니 죽자고 싸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인민군은 선발부대를 통해 국군의 방어선이 없는 곳을 돌아 포위공격한 뒤 나머지 전투는 후발부대에게 넘기고 계속 남하하는 전략을 택했다. 국군이 대승하여 1개 연대 전원을 특진시킨 음성이나 상주의 전투는 모두 후발보급부대를 습격한 전투로 전과가 과장되었다. 국군이 '여길 방어해야 하나?' 하는 의문을 품었던 그 시간에 인민군은 이미 뒤를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 한강이북에 해당하는 경기도 고양지역에서는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와 원인은?
"전국에서 벌어진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종합하여 판단해 보면, 연맹원에 대한 소집, 감금, 선별, 학살의 과정이 후퇴하는 국군의 일정, 즉 국방부가 말하는 지연전투작전과 연동되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강이북지역에서는 비록 이승만정권이 전쟁발발일인 1950년 6월 25일부터 형무소재소자와 요시찰 대상자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를 집행할 시간여유가 없었고 또한 군이나 경찰 등 학살에 동원할 물리력이 없었던 것이다."

- 이승만 정권은 당시 의용군을 인민군과 동일하게 취급했는데 그 이유는?
"인민군의 의용군은 국군이나 미군의 노무부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군사훈련이라고 해야 일주일 남짓한 제식훈련정도였고 무기도 지급받지 못했다. 주로 한 일은 짐을 나르는 것이었다. 간혹 인민군이 전사하면 무기를 넘겨받기도 했다고 하는데 총을 다뤄 본 적이 없는 상태여서 제대로 전투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잡히면 전쟁포로로 취급되었다. 이들은 이승만 정권에게 모두 '적'이었던 것이다."

- 당시 군, 경찰, 검찰 등은 수복 후 부역의심을 받아 체포된 주민대부분을 노동당가입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일반주민들이 불과 3개월 남짓했던 인민군 점령기 동안 노동당에 가입한 사례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도 왜 군경 등은 이런 사실을 조작했던 것일까?
"누군가를 반국가범죄로 판결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그를 반국가조직의 성원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조직의 비밀스러운 성격 때문에 명단이 드러나기 쉽지 않으니 이 입증은 본인의 자백 외에는 불가능했다. 그러니 당연히 고문이 따랐다. 노동당은 당시 이승만 정권 입장에서 가장 대표적인 반국가단체였다. 여기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어야 하니 이는 마치 중세서구의 마녀사냥과 같은 피해로서 국가보안법이 갖고 있는 위헌성, 위법성과 직결된다. 지금도 간첩조작사건이 자행되는 것은 국가보안법의 태생적 문제 때문이다."

- 당시 고양경찰서 신도지서의 치안활동에 동원되었던 타공결사대는 왜, 어떻게 해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좌익조직으로 처단되었는가?
"전쟁초기 이남지역을 점령한 인민군 측은 형식적이나마 민주적선거와 토지개혁을 실시했고 이는 점령지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많은 우익단체 출신의 청년들도 민간치안조직인 자위대나, 대중적 사회단체인 민주청년동맹 등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런데 불과 2개월 뒤 인민군 점령체제는 해체되고, 국군이나 경찰서가 복귀함에 따라 다시 치안대원이 되어 이승만정권의 부역자학살에 동원되었다.

그런데 1950년 10월 말에 이르면서 이승만정권의 입장이 돌변한다.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 김창룡은 애국자라며 부추기며 학살에 동원했던 사람들을 진짜부역자라며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240명의 타공결사대 청년들이 끌려가 극심한 고문을 당하고 30여 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이 사건은 당시 언론에 '북악산 빨치산'을 소탕했다며 대서특필되었고 김창룡 본부장은 이승만으로부터 상과 함께 금일봉까지 받게 된다. 나는 당시 이승만정권이 죽일 만큼 죽였다고 판단한 뒤 학살책임을 민간인들 사이 감정싸움으로 떠넘기면서 국가책임을 벗어나기 위한 술책이었다고 본다."

- 당시 학살희생자 유족들 중엔 "그때는 부역한 게 부역한 게 아니야"라고 하소연 하는 분들도 있는데?
"전쟁발발한 당일 이승만은 반역에 협력하면 처단한다며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발표한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청와대에서 도망하면서 한강인도교를 폭파했고 패배한 국군들은 한강나루터를 독점하면서 민간인들의 피란길을 봉쇄한다. 결국 부역의 환경을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이승만이었던 것이다. 부역의 내용도 어이없다. 부역이라고 해야 대부분 김치나 된장을 걷었다는 등 사소한 일상생활에 그친 경우였지만 실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부역을 했다고 의심받는 사람들의 가족들이었다. 친인척 중에 한 사람의 부역의심자만 있어도 모두 부역자가 되었다. 이미 무엇을 했는지 따지지도 않았고 그냥 죄 없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했으니 나오는 말이다."

- 200여 명이 학살당한 고양 금정굴 사건은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에 의해 조사된 뒤 학살에 가담한 경찰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왜 학살가해자는 한 명도 처벌받지 않은 것인가?
"금정굴 사건으로 경찰이 처벌을 받는다면 이는 곧 국가의 지휘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수사과정에서 경찰은 피의자가 아니라 참고인 자격에 그쳤다. 처음부터 처벌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는 곧 민간인학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려던 목적이었다."

- 이 책이 비매품인 이유는? 독자가 이 책을 구입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양시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작업이어서 비매품이 되었다. 내부용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공개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으로 정리해서 발표해보자는 취지가 컸다. 이 책을 보시려면 금정굴인권평화재단(070-8223-2700)으로 연락주시면 된다."

태그:#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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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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