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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민은 4.3의 비극을 겪었다. 내가 집권하면 억울하게 공산당으로 몰린 사건에 대해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겠다." 1987년 11월 30일, 제13대 평화민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 <사진 = 전시 도록에서>
 "제주도민은 4.3의 비극을 겪었다. 내가 집권하면 억울하게 공산당으로 몰린 사건에 대해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겠다." 1987년 11월 30일, 제13대 평화민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 <사진 = 전시 도록에서>
ⓒ 강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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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민주당은 1987년 11월 12일 국민화해ㆍ정의경제ㆍ군부중립ㆍ자주외교ㆍ평화통일 추진을  기본공약으로 창당하여 김대중 총재가 13대 대선에 출마했으나 패배하고, 13대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부상하여 5공청산ㆍ광주학살 진상규명 등 시대적 사명에 앞장섰다.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 총선민의를 뒤엎으며 3당야합을 통해 거대여당이 되고,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김총재와 평민당을 모질게 탄압하였다. 와중에도 평민당은 정통야당의 맥을 이으면서 국정개혁을 선도하고 지방자치제를 부활시켰다. 하지만 고착화되다시피한 지역주의 철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새로운 활로를 찾은 것이 야권통합이었다. 
 
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 15분 별세했다. 향년 92세. 사진은 고 김 전 총리(맨 오른쪽)가 민자당 최고위원이였던 1991년 서울 가락동 정치연수원에서 열린 민자당 창당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모습. 왼쪽부터 박태준 최고위원,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최고위원.
 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 15분 별세했다. 향년 92세. 사진은 고 김 전 총리(맨 오른쪽)가 민자당 최고위원이였던 1991년 서울 가락동 정치연수원에서 열린 민자당 창당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모습. 왼쪽부터 박태준 최고위원,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최고위원.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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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평민당의 간판은 1991년 4월 15일 신민주연합당으로, 다시 1991년 9월 16일 민주당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평민당이 내걸었던 정강정책과 김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인맥은 대부분 그대로 이어졌다. 중앙당도 마포 용강동 당사 그대로였다. 13대 국회는 평민당이 제1야당으로 정국을 주도할 때 법안의 90% 이상이 여야 합의를 거쳐 통과되었다. 그런데 3당야합 후 오만해진 노태우 정권은 13대 국회의 마지막 날까지 날치기로 시종했다.

민자당은 출범 2년여 동안 13차례의 국회날치기를 자행하여 집권정당사상 초유의 날치기 기록을 세웠다. 추곡수매가, 제주개발법, 바르게살기운동조직육성법, 종합유선방송법을 상임위에서 날치기, 국민의 비등한 여론에 밀려 박준규 의장이 대국민사과를 하고 문책차원에서 원내총무를 교체한 노정권이 대통령의 회견으로 국민의 눈을 돌리는 양동작전 끝에 불과 10초 만에 문제 법안을 다시 날치기로 처리했다.
 
1989년 평민당의 김대중은 보라매공원에서 수십만이 참석하는 시국대강연회를 개최하여 노태우정권의 공안통치에 맞섰다.
▲ <공안통치 저지 및 민주정치 회복을 위한 시국대강연회> 소식을 알리는 한겨레신문 1989년 평민당의 김대중은 보라매공원에서 수십만이 참석하는 시국대강연회를 개최하여 노태우정권의 공안통치에 맞섰다.
ⓒ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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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국민도 의회주의 상식도 인간적인 양심마저도 내팽개친 채 뒷골목의 망나니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노정권은 집권 4년 동안 실정과 반국민적 작태를 거듭해왔다. 물가는 해마다 40~50%씩 올라 서민생계를 파탄시키고 5공말기 80억 달러 흑자규모이던 국제수지를 거꾸로 110억달러 이상의 적자상태로 전락시켰다. 농촌은 해마다 40만 이상이 이농하는 파탄상태를 만들고 단군 이래 최악의 치안부재 상태로 범죄 천국이 되어 국민은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다. 

반면 국가예산은 해마다 팽창하여 87년 15조 5천억 원이 92년에는 33조 2천억 원으로 113.5% 늘어나고 새해 국민의 조세부담액은 1인당 1백만 원 선을 넘고 있다. 늘어나는 것은 또 있다. 

현재 양심수는 5공 때보다 4배가 늘어난 1천4백여 명에 이르는 데도 정부는 정치범은 한명도 없다고 뻔뻔스럽게 우겨댄다. 
 
1987년 평민당 대선후보로 유세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1987년 평민당 대선후보로 유세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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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사건 등 권력형 비리가 5공 비리를 뺨치고 소수 특권층을 위한 골프장 건설이 5공 때 39개에서 1백78개로 256.4%가 늘었다.

정부의 주요 인사는 대부분이 TK중심으로 지역감정을 부채질하고 유일한 성과로 치부되는 북방외교는 해체되는 소련연방정부에 30억 달러(그나마 외국 차관으로)를 쏟아 붓는 구걸외교로 시종했으며 남북관계마저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들었다. (주석 1)

노태우 정권 4년 '업적'

정치 : 국회날치기 13회 / 헌정유린
물가 : 연 40~50% 폭등 / 생계위협
예산 : 113.5% 초팽창 / 부담가중
무역 : 1백10억달러 적자 / 경제파산
인사 : 요직 TK 집중기용 / 지역감정
외교 : 소련에 2조원차관 / 구걸외교
범죄 : 단군이래 최악상태 / 치안부재
농촌 : 매년 40만명 이농 / 농촌파탄
양심수 : 1천4백명 5공4배 / 인권탄압
골프장 : 39개가 1백78개로 / 자연훼손 (주석 2)

평민당의 후신으로 등장한 통합야당 민주당의 서울 마포구 용강동 중앙당사에는 문학평론가 김병걸이 작사한 '민주당가'가 힘차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민주당가

 얼마나 긴 세월을 헤쳐왔나
 비바람 불고 눈보라쳐도 
 함께 온 형제자매여
 어찌 잊으리
 끝내 보고야말 눈부신 햇살
 온누리에 펄럭일 우리의 깃발.

 아, 우리는 들었노라
 삼천리 칠천만이
 우릴 부르는 소리
 아, 우리는 가노라
 삼천리 칠천만이
 손짓하는 곳으로
 자유와 번영
 복지와 통일의 큰 길로
 역사를 이끄는 그 이름 민주당
 세계로 뻗어가는 그 이름 민주당. (주석 3)

그동안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말씀 드립니다.


주석
1> 『민주당보』, 1991년 12월 28일.
2> 앞과 같음.
3> 앞의 신문, 1991년 11월 5일.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평화민주당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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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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