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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시 민간인희생자 추모공원(여주시 하동 강변)
 여주시 민간인희생자 추모공원(여주시 하동 강변)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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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 복대리) 막동이~" "예, 어르신." "하나, 둘, 셋....서른 가마니요!"

김수영 집 머슴 천순이(가명)가 벼 가마를 세더니, 큰 목소리로 "30가마니"라고 외쳤다. 그러자 마름 김수영은 장부에 '김막동'이라 쓰고, 그 옆에 10마지기(2천 평), 도지 30가마니(도정되지 않은 벼 80kg들이)라고 적었다.

장부에는 경기도 여주군(현 여주시) 흥천면 복대리의 소작인들의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이름 옆에는 땅의 넓이(마지기)와 상태, 도지(소작료)로 낸 곡식의 양을 썼다. 소작료는 천수답(天水畓)이냐, 수리안전답(水理安全畓)이냐에 따라 달랐다. 이렇게 가을 수확기에 도지를 받아 기록하는 장부를 '추수기(秋收記)'라고 불렀다. 

"다음~"이라는 말에 김막동은 소고삐를 끌었다. 예년보다 풍작인데도 전체 60가마니 중에 절반인 30가마니를 지주에게 바치고 나니 가슴이 쓰라렸다. 소작료가 밀리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남은 30가마니로 1년을 살 생각에 막막했다. 마을로 돌아가는 김막동의 등 뒤로 달구지 20대가 늘어서 있었다. 소작료를 내려고 줄 선 소작인들이었다. 1948년 11월 어느 날의 풍경이었다.

여주군 흥천면과 금사면 땅의 상당수는 지주 최아무개 소유였다. 그런데 흥천면 복대리에서 지주 최씨를 대행하는 이가 '마름' 김수영이었다. 마름은 부재지주로부터 농사의 관리·감독권을 위임받아 수확기에 도지를 걷어 지주에게 전달했다. 당시 농촌에서 마름은 하나의 권력이었다. 대지주 대부분이 부재지주였기에 마름이 농민들과 일상적으로 대면해 농민에게 마름은 감독관이자 상전이었다. 또 마름은 지주로부터 받은 문전옥답(門前沃畓)을 자경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김수영 역시 복대리에서 정미소를 운영했고, 2층 집을 소유한 마을 유지였다.

소작권의 생사여탈권을 쥔 이는 지주가 아닌 마름이었다. 그렇기에 농민들은 마름 앞에서는 굽신굽신했지만, 속으로는 불만이 컸다. 일제강점기 소작쟁의 때마다 나온 농민들의 요구사항 중 하나가 '마름의 사취(詐取) 금지'였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한 고육지책이 부역죄?

"김수영이 나와!" "아버님은 집에 안 계신데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이 무서운 기세로 내려왔다. 여주군도 인민군 세상이 되었다. 흥천분주소(인민군 점령기의 경찰 지서)에는 '마름 김수영을 인민재판에 세우라'는 복대리 소작인들의 민원이 접수됐다. 미리 소문을 들은 김수영은 재빨리 도주했다. 그의 집에는 아들 김인식(1925년)이 내려와 있었다. 서울 양복점에서 일하던 인식은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피난을 온 참이었다.  

김인식이 "우리 아버지가 뭔 죄가 있다고 이러냐!"라고 항의하자 분주소원이 군홧발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는 분주소원들에게 연행돼 분주소 유치장에 갇혔다가 이틀 만에 석방됐다. 김인식이 풀려난 지 일주일 후 분주소원들이 다시 그를 찾아왔다. "분주소에 나와서 일을 하시오. 아니면 당신 아버지를 끝까지 찾아내 인민재판에 회부하겠소." 아버지를 들먹이자 김인식은 결국 협조하는 길을 택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야간에 보초 서는 게 전부였다. 그것도 불과 열흘도 채 안 됐다.

이후 인민군이 물러가고 후퇴했던 군·경이 여주에 수복하자 일이 터졌다. 군경은 인민군 시절 완장을 찼던 이들은 물론이고 잔심부름한 사람까지 모두 부역죄로 잡아들였다.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분주소에서 일한 김인식도 마찬가지였다. 

김인식은 경찰과 치안대의 빨갱이 사냥을 피해 여주군 금사면 가마실로 피신했지만 잠시 본가에 들렀다가 검거됐다. 흥천지서로 연행된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복대3리와 하다리 경계에 있는 쇠고개에서 학살당했다. 1950년 11월 23일의 일이었다.
 
김인식이 부역혐의로 학살된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쇠고개에 선 증언자 김병옥(희생자 김인식 아들)
 김인식이 부역혐의로 학살된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쇠고개에 선 증언자 김병옥(희생자 김인식 아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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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양평은 여운형의 활동무대

한국전쟁 때 여주의 민간인 학살 피해는 컸다. 전쟁 발발 직후 여주 지역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여주경찰서 임시유치장으로 쓰인 얼음창고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7월 1일경 여주시 교동 건지미골짜기에서 경찰 또는 국군 6사단 헌병대에 의해 총살당했다.

또 북한군이 후퇴하기 직전 북한군과 지방좌익들이 우익인사 및 그 가족들을 얼음창고 등지에서 학살했다. 수복 후 경찰과 치안대에 의한 부역혐의자 학살사건은 셀 수 없이 많다. 가남읍 태평리 공동묘지, 금사면 옹기정 뒷산, 흥천면 계신리 강변, 북내면 신남리 버시고개 골짜기 등이다.(여주시유족회, 『한국전쟁 전후 여주시 민간인희생 미신고자 발굴 및 증언 채록사업 2차 보고서』, 2020)

여주유족회 이인수 사무국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주에서 총 19곳의 희생지가 파악되어 있는데요. 유족과 사건 발생지 인근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 본 결과, 2천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사무국장이 말한 희생자 2천여 명 중에는 보도연맹사건,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의 희생자도 있지만, 절대 다수가 '부역혐의' 사건의 피해자다.

여주군에서 왜 이렇게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을까? 이는 저명한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유력한 정치지도자인 여운형과 연관돼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문에도 나와 있다.
 
'여주·양평지역은 일제강점기부터 몽양 여운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농민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이다. 1944년 10월 8일 양평 용문산에서 몽양 여운형, 여주의 신흥진, 양평의 최용근 등 13명이 참가하여 농민동맹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조선해방을 목적으로 한 투쟁을 광범위하게 전개시킬 것을 합의했다'고 한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몽양 여운형의 정치적 영향을 받아 여주군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독립운동과 농민운동이 활발했다. 해방 후에는 활동가들이 대거 근로인민당에 참여했고, 농민운동·사회운동에도 동참했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부역혐의 사건으로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됐다. 물론 여주의 대다수 희생자는 좌익활동이나 부역혐의와는 관계없이 군·경과 치안대에 의해 불법적인 죽임을 당한 경우다. 흥천면 복대리 김인식이 그런 사례다.

지게를 진 머슴 최귀남과 복대리 김씨들은 이슥한 밤에 도둑고양이처럼 쇠고개로 접근했다. 그들은 혹시 주변에 경찰은 없는지 연신 두리번거렸다. "읔." 앞선 최귀남이 코를 쥐었다.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사방에 시신들이 즐비했다. 그나마 한여름이 아닌 11월 말이라 시신은 크게 부패하지 않았다. 덕분에 김인식의 시신은 어렵지 않게 수습할 수 있었다. 최귀남 일행이 시신을 지고 김수영 집으로 오자 사랑채 마루에 서성이던 김수영은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마룻바닥을 적셨다.

김인식의 시신은 그날 밤 복대리 양촌에 가매장되었다. 장례를 치르는 것은 당시로서는 언감생심이었다. 서울의 양복점에서 일하던 김인식은 집에 축음기, 아코디언도 있던 멋쟁이였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길은 한없이 초라했다. 김수영은 아들 인식이 잡혀간 날부터 말을 잃었고 시신이 가매장된 후로는 우울증이 생겼다. '나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그 자책감은 김수영이 죽을 때까지 가슴에 똬리를 틀었다.

어르신 일자리를 위한 봉사

6.25 때 아버지 김인식을 잃은 김병옥(1945년생, 여주시 흥천면)은 문장초등학교와 경기도 광주 중·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학교 법대를 졸업했다. 1969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9년 6개월간의 공직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정치권의 요청으로 국회의원 보좌관을 하다, 미래가 불투명해 상일가구에 몸담았다. 나이 들어 귀향한 그는 10년간 마을 이장을 보며 지역을 위해 봉사하다가, 현재는 흥천면노인회 분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 11월 (사)대한노인회 경기도연합회 여주시지회 흥천면분회 사무실에서 김병옥을 만났다. 사무실은 무척 분주했는데 김병옥은 기자와 인터뷰를 하랴 찾아오는 회원들 상대하랴 정신이 없었다.

회원 대부분은 '어르신 일자리' 신청 때문에 찾아온다. 구비서류 준비와 제출은 어르신이 혼자 하기에는 버거운 일이다. 이동이 불편한 이들도 있어 승용차로 태워주거나, 파출소에 지원을 부탁해야 한다. 2021년 현재 여주시 흥천면 인구는 5060명인데,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1600명으로 31%를 차지한다. 급식 도우미, 마을안길 청소 등 약 200개의 일자리를 그가 속한 노인회에서 주관한다. 또 흥천면에 있는 28개 경로당을 관리하고 지원하는 일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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