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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잃으면 마음을 잃고 나라를 잃는다."

전쟁은 인명뿐 아니라 그 지역의 유적을 모조리 불태우고 만다. 3년 남짓한 기간 동안 계속된 한국전쟁은 많은 사찰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아무리 깊은 산중이라도 전쟁은 피해갈 수 없었고, 오히려 깊은 산중이었기에 그 피해가 더 컸다.

때로는 적군에 의해 때로는 아군에 의해 오랜 세월 전해져 온 소중한 불교 문화유산들이 훼손되거나 소실됐다. 하지만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자신의 목숨보다 문화재를 더 소중히 여기며 천년 고찰을 지켜낸 사람이 있으니, 바로 차일혁(1920~1958) 총경이다.  
 
차일혁 총경의 모습
 차일혁 총경의 모습
ⓒ 경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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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 8사단 대대장 방득윤 중령은 상부로부터 녹음기 때 빨치산들의 근거지가 될 만한 사찰 및 암자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방득윤 대대장과 같이 지리산 화엄사 일대를 방어하던 차일혁 18전투대대장은 화엄사를 불태우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차일혁은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문화를 잃으면 우리 마음을 잃고 우리 마음을 잃으면 우리나라를 잃는다"고 항명했다.

지리산 남쪽 기슭, 그윽한 노송 숲에 둘러싸인 화엄사. 지리산 산세에 견줘도 위축되지 않는 모습의 천년 고찰이다.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때인 544년 인도의 승려 연기가 처음 지었으며, 그 후 신라 문무왕 때인 670년 의상대사가 중수했으나, 임진왜란에 소실되고 이후 숙종 때인 1702년 중건됐다.

화엄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총본산이자 화엄사상의 상징적인 사찰로 문화재적, 불교사적으로 귀중한 자료다. 화엄사 일원은 문화재(명승 및 사적 제7호)로 지정돼 있는데, 특히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은 우리나라 불교건축물 중 규모가 가장 크다. 각황전에서 떨어진 돌조각인 구례화엄사 화엄석경(보물 제1040호)은 부서진 것일망정 보물로 지정될 만큼 그 문화재적·사료적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이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차일혁의 노력으로 살아남은 화엄사 국보 제67호 각황전 모습
 전쟁의 포화 속에서 차일혁의 노력으로 살아남은 화엄사 국보 제67호 각황전 모습
ⓒ 우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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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를 지키기 위해 작전 명령을 불이행했던 차일혁은 감봉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각황전을 비롯해 화엄사 전각들은 소각을 피할 수 있었다. 전라도는 빨치산의 주요 근거지였고 산악에 자리 잡은 많은 사찰과 그 속의 문화재가 빨치산과의 전투 중에 소실될 가능성이 높았다.

화엄사 외에도 깊은 산중에 자리 잡은 사찰은 토벌 작전에 방해가 되기 일쑤였지만, 차일혁은 부하와 동료들을 설득해 가며 사찰들을 지켜냈다. 화엄사뿐 아니라 지리산의 천은사, 쌍계사와 모악산의 금산사, 장성 백암산의 백양사, 고창의 선운사, 덕유산의 크고 작은 사찰 등 전라도의 많은 고찰들을 전쟁의 피해로부터 구해냈다.

빨치산 대장 이현상 시신에 정중하게 예 갖춰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차일혁은 중국으로 건너가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한 뒤 중국에서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항일 유격전에 참가했다. 한국전쟁 때는 북한이 파죽지세로 남하해 오자 유격대를 결성해 북한의 인민군과 싸우던 중 경찰에 특채돼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용맹을 떨쳤다.

그는 지리산에서 6년 동안 벌어진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51년 1월 빨치산 2500여 명은 칠보발전소를 포위하고 총공격을 감행했다. 칠보발전소는 당시 남한 유일의 전기를 공급하는 수력발전소였다. 차일혁은 75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50여 일간 생사를 초월한 전투로 빨치산을 격퇴하고 발전소를 사수했다.

1953년 9월 치열한 교전을 끝에 빨치산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하고 그 휘하 부대 모두 섬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를 계기로 빨치산들의 기세는 크게 꺾이게 됐으며 토벌 작전도 마무리될 수 있었다.

남부군 사령관이자 '공화국의 영웅' 이현상의 시신은 1953년 10월 8일 화개장터 근처 섬진강 백사장에서 경찰 토벌대장 차일혁에 의해 화장되어 섬진강에 뿌려졌다. 스님을 불러 독경을 하게 한 뒤 그 재를 정중하게 섬진강에 뿌리고 하늘을 향해 세 발의 권총을 쏘는 예의를 갖췄다. 적장이지만 시신에 대한 예를 갖췄던 것이다.

이에 대해 다른 지휘관들이 뭐라고 하자 그는 "죽은 뒤에도 빨치산이고 좌익이란 말입니까? 공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지막 가는 길에 정중한 예의를 갖추어 주자"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국립대전현충원 경찰1묘역에 안장된 차일혁 총경. 사후 경무관으로 추서됐다.
 국립대전현충원 경찰1묘역에 안장된 차일혁 총경. 사후 경무관으로 추서됐다.
ⓒ 우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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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동족 간에 총부리를 맞대야 하는 비극적인 혈투 속에서도 민족애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 가급적 귀순을 유도해 많은 빨치산의 목숨을 살렸다. 그는 빨치산 토벌이 끝나면 "깊은 산속의 절로 들어가 이념의 대결 속에 짓밟힌 무주고혼의 명복을 빌고 내 몸에 스며든 피비린내를 씻고 싶다"고 했다.

차일혁 총경은 후에 자신의 자서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새벽부터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물어봐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과연 몇 사람이 이를 알겠는가? 지리산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군경과 빨치산들에게 물어보라. 너희들은 왜 죽었느냐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혹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죽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자 몇 명이나 있겠는가?"

지리산에서 총성이 잦아들 무렵 전투경찰에서 물러난 차일혁은 1954년 충주서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충주경찰서에 근무하던 당시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학업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충주직업소년학원을 설립, 후학의 길을 열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전쟁이 끝나고 세상은 그의 공적을 인정했다. 조계종 초대 종정이었던 효봉 스님은 1958년 그에게 감사장을 수여해 고마움을 표시했고 1998년 6월 화엄사 경내에 그의 공적비를 건립했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문화와 역사를 저버리지 않은 높은 뜻과 공적을 기리도록 한 것이다.

국가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한국전쟁 당시 화엄사를 소실 위기에서 구하는 등 문화유산 보호에 노력한 공로로 2008년 경찰공무원으로는 처음으로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경찰청도 그의 업적을 조명하며 2011년 8월 총경에서 경무관으로 승진 추서했다.

2012년에는 국가보훈처가 한국전쟁 영웅으로 선정했으며 전쟁기념사업회 호국의 인물로 이름을 올렸다. '차일혁 총경 공적비'에는 그의 공로를 이렇게 기록한다.

"이제 해원의 때가 무르익었으니 천하의 영봉 지리산을 생사의 터로 삼아 동족상잔의 피어린 원한을 풀어 그 본연으로 돌아감이 옳거니. 여기 근본 법륜 화엄사 청정도량에 한 사람의 자취를 돌에 새겨 기리도록 함이라."

차일혁은 1958년 금강의 곰나루에서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하다가 38세의 나이에 타계했다. 2013년 10월 16일 전북 김제시 모악산 자락에 묻혀있던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경찰1묘역 502판-943호로 이장되었다.
 
2013년 11월 16일 차일혁 경무관의 안장식이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거행되고 있다.
 2013년 11월 16일 차일혁 경무관의 안장식이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거행되고 있다.
ⓒ 경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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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 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도 실렸습니다.


대전에서 활동하는 시민미디어마당 협동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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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째 신문사에서 근무하고 있음. 기자-차장-부장-편집부국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활동했음. 현재 인터넷신문 '미디어붓'에서 편집국장으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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