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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쿠데타 당시 살해당한 고 정선엽 병장 형 정훈채씨가 8일 오전 서울 관악구 한 교회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고 전두환씨의 죽음에 대해 "유가족들에게 끝까지 사과하지 않고 죽은 것이 참 추하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12.12 쿠데타 당시 살해당한 고 정선엽 병장 형 정훈채씨가 8일 오전 서울 관악구 한 교회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고 전두환씨의 죽음에 대해 "유가족들에게 끝까지 사과하지 않고 죽은 것이 참 추하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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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 제23묘역 38315호는 고 정선엽 병장의 묘다. 정 병장은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국방부 지하 벙커 경계근무를 서다 반란군에게 살해당했다. 쿠데타 과정에서 모두 3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중 정 병장과 육군 특수전사령관 비서실장이었던 고 김오랑 소령(중령 추서)은 육군본부의 정식 지휘계통 아래 임무를 수행하다 유명을 달리했고, 반란군 측에 동원됐던 고 박윤관 상병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불법연행과정에서 발생한 총격전 와중에 숨졌다.

지난 1995년 12월 21일 검찰은 전두환씨에게 12.12와 관련해 '반란 수괴', '불법퇴진', '지휘관 계엄지역 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 미수', '초병살해' 등 6개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다. 이 중 초병살해 혐의는 국방부 헌병대 소속으로 청사 경계근무 중 반란군에게 살해당한 정 병장과 관련한 범죄 사실이다.

"'9시 땡'하면 전두환이 나오는데 그때는 정말 죽이고 싶었죠. 나중에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은 다 정리했어요. 그래도 전씨가 용서를 받고 떠났더라면 더 나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은 남아 있습니다. 우리 유족들은 이미 용서할 준비가 다되어 있었는데, '미안하다' '잘못했다'고 진심어린 사과 한 마디 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8일 오전 기자와 만난 고 정선엽 병장의 형 정훈채씨는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오는 13일은 동생의 마흔 두 번째 기일이지만, 올해 정씨가 느끼는 감정은 각별하다. 동생의 죽음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전두환씨가 사망한 뒤 처음으로 맞이하는 12.12이기 때문이다. 조선대학교 전기공학과 2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던 정 병장은 제대를 불과 3개월 남겨 놓고 있다가 변을 당했다. 23살 젊은이의 죽음이었다. 당시 국방부 청사 후문 경계 근무를 서고 있던 정 병장은 1979년 12월 13일 새벽 국방부 청사를 점령하려는 제1공수여단 병력들과 교전을 벌이다 총탄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끝까지 저항하다
 
▲ 12.12 쿠데타 당시 살해당한 고 정선엽 병장 유가족 "사과하지 않은 전두환 참 추하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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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이 서울역 앞 대우빌딩에 있었어요. 아침에 택시를 타고 출근하는데, 삼각지 로터리를 지날 때 택시 기사가 '어제 밤 여기서 총격전이 나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퍼뜩 국방부에 근무하던 동생 얼굴이 떠올랐어요. 국방부로 가서 면회신청을 했더니 면회가 안 된다는 거예요. 회사로 돌아와 일을 하고 있는데, 동생 부대 선임하사라는 분이 전화를 했어요. 선엽이가 죽어서 국군병원에 안치되어 있다고."

불과 1주일 전 통화를 하면서 "제대하면 유학을 가고 싶다"며 진로 상담을 했던 동생이었다. 한걸음에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달려간 정씨는 싸늘하게 식은 동생의 시신을 확인하고는 망연자실했다. 군에서는 동생이 왜 죽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정씨는 국방부 군무원으로 근무하던 같은 교회 교우로부터 정 병장 사망경위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원래 말년 병장은 근무열외를 해도 되는데, 비상령이 발령되어서였는지는 몰라도, 그날 밤 중요한 포스트인 청사 뒤편 지하 벙커 초소에 배치되었답니다. 당시 노재현 국방장관은 청사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태권도 유단자였던 동생은 강직하고 책임감이 강했어요. 공수부대원들이 무장을 해제시키려고 달려드니 동생이 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로 걷어차 버렸다고 해요. 그러자 동생을 향해 일제히 총을 쏘았던 거죠. 국방부라는 우리나라 핵심 심장부를 끝까지 사수한 사람은 제 동생 같아요."

검찰이 작성한 12.12 관련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명령을 받은 박희도 제1공수여단장은 휘하 대대를 동원해 육군본부와 국방부 청사 점령을 시도했다. 지금의 전쟁기념관 자리에 있던 육군본부(육본)를 경비하던 경계병들을 제압한 공수부대원들은 육본 청사와 헌병대 막사를 점령하고 잔류 병력들의 무장을 모두 해제시켰다. 국방부 청사 장악에 나섰던 부대는 1공수 5대대 15지역대 병력이었다.

쿠데타가 성공한 직후 신군부 측이 작성한 상황일지에 따르면 12월 13일 새벽 2시 10분경 1공수여단 5대대장은 부대대장에게 지하 벙커 점령을 명령했고, 이에 따라 15지역대 병력이 벙커를 향해 돌격을 개시했다. 이때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헌병 근무자 2명 중 1명을 체포했지만, 나머지 1명은 "반항 사격과 함께 벙커로 도주 중 사살됨"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반란군에게 대항하다 목숨을 잃은 초병이 바로 정 병장이다. 이날 국방부에서는 쌍방 간 몇 차례 교전이 발생했지만, 목숨을 잃은 이는 정 병장이 유일했다. 전남 영암에서 급보를 듣고 상경한 어머니가 자식의 주검 앞에서 피울음을 토해내고 있을 때, 반란의 주역들은 보안사에 모여 쿠데타 성공을 자축했다. 신군부는 자신들의 권력욕으로 빚어진 쿠데타 과정에서 희생된 군인들의 죽음도 차별했다.

"선엽이 옆에도 병사 시신 한 구가 나란히 누워 있었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반란에 동원됐던 박 상병이더군요. 두 사람 모두 같은 병사였는데, 영안실 분위기가 너무 판이했어요. 그쪽 빈소에는 정복을 입고 링을 찬 헌병들이 잔뜩 배치되고 조화가 죽 늘어섰는데, 선엽이 빈소에는 공수부대원들에게 얻어터져 얼굴이 잔뜩 부어 있는 선임하사 한 분이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것도 처음에는 어떻게 될지 몰랐는데, 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그냥 병사일 뿐인데 안장해도 뭐 큰 문제가 생기겠느냐'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전두환 일당이 군권을 장악한 후인 1980년 2월 26일 김오랑 소령과 박윤관 상병이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 병장은 이들보다 한 달 가량 늦은 3월 26일에야 안장될 수 있었다. 정씨는 어머니를 모시고 매년 동생의 묘를 찾았지만, 군부 정권 아래서는 마음 놓고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총을 순순히 반란군에게 건네줬으면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사셨던 노모는 지난 2008년 그리워하던 아들 곁으로 떠났다.

"더 늦기 전에 명예회복을..."
 
12.12 쿠데타 당시 살해당한 고 정선엽 병장 형 정훈채씨는 "동생의 묘비에는 '순직'으로 되어 있다"며 "국방부 장관의 청사 사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다 숨졌으니 '전사'로 바로잡아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12.12 쿠데타 당시 살해당한 고 정선엽 병장 형 정훈채씨는 "동생의 묘비에는 "순직"으로 되어 있다"며 "국방부 장관의 청사 사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다 숨졌으니 "전사"로 바로잡아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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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간 은행원으로 일하다 지난 1999년 정년퇴직한 정씨는 뒤늦게 신학공부를 시작했고, 2003년 미얀마에 파송되어 현재까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가난한 가정 어린이들을 데려다 보호하면서 교육을 시키는 일에 매진했는데, 2005년부터 현재까지 47명을 어엿한 성인으로 길러냈다. 지난 2월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후 정씨와 인연을 맺었던 4명의 청년이 군부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 정씨 부부는 지난 7월 현지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되어 파송 교회가 급파한 에어엠뷸런스 편으로 귀국한 후 지금까지 국내에 체류하고 있다.

"공부를 썩 잘했던 한 친구는 유학까지 다녀와서 지난 3월 양곤 법대에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군부에 절대 협력할 수 없다면서 미얀마 상황을 외부에 알리는 일을 하다가 체포되었어요. 얼마 전 현지 방송이 저항활동을 하던 5명이 검거된 사실을 보도했는데, 모두 제가 마련한 시설에서 저한테 생활비를 지원받으며 살던 친구들이에요. 애들 방에서 '마약이 나왔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자신들이 짜놓은 각본대로 거짓으로 선전하고 있는데, 아이들의 안전이 정말 염려됩니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데 입국 허가가 안 나오고 있어서 언제쯤이나 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지난 2017년 4월 정 병장의 모교인 광주 동신고등학교 총동문회는 모교 운동장에 정 병장을 추모하는 나무를 심었다. 조선대학교에서도 고인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다만 국가 차원에서의 명예회복 조치는 아직 요원하다. 쿠데타 당시 반란군에 맞서 상관을 보호하려다 목숨을 잃은 고 김오랑 소령의 경우 중령 추서와 함께 보국훈장 삼일장이 수여된 바 있다. 정씨는 더 늦기 전에 동생에 대한 명예회복도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다.

"동생의 묘비에는 '순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족이 적극적으로 요구를 하지 않아서 그런건지는 몰라도 동생은 초병으로서 국방부 장관의 청사 사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다 숨졌으니 '전사'가 아닌가요. 이제는 이것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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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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