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09 19:36최종 업데이트 22.01.05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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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비평연재 <좋은데, 싫었습니다>(좋싫)는 주류의 담론에 대항하는 저항의 언어조차 어쩌면 '당위'라는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질문합니다. 그저 이것'만'이 옳고, 이것은 '반드시' 좋아해야 하고,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대해야 한다는 절대적이고 당위적인 언어들이 정말로 대안과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편집자말]
전두환이 죽었다. 최악의 독재자였다. 민주주의를 퇴행시킨 군사 쿠데타의 주범, 도시 하나를 가둬놓고 무차별한 학살을 자행한 자, 고문과 국가폭력으로 민중의 저항을 압제한 권력자, 수천억 원의 부정축재범, 그러면서 반성은커녕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았으면서'라고 중얼거리던 파렴치범. 그의 악행을 낱낱히 고발하고 비판하기 위한 표현력이 나에게 없음이 아쉬운 그런 '사람'이 죽었다.

전두환이 죽던 날, SNS에는 문어를 운운하는 이야기가 오갔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머리가 벗어진 전두환의 신체 특징을 이용한 조롱이었다. 전두환을 미워하는 마음이야 어디 가서도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조롱엔 마음이 불편했다. (나도 탈모에 고통받고 있기 때문일까.)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조롱은 숱하다. 박정희가 죽은 날을 '탕탕절'이라 부르며 탕수육에 시바스리갈을 마시자고 낄낄거리는 일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조롱하며 '운지하다'란 표현을 쓰는 것, 성재기 전 남성연대 대표의 죽음을 조롱하며 '재기하다'란 말을 쓰는 것까지, 실은 죽은 이의 행동과 잘못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 혹은 그의 존재 자체를 조롱하는 일이란 점에서 맥을 같이한다.

조롱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우리가 권력자 혹은 악인을 비판하는 것은 그 잘못된 행동 때문이다. 그가 어떤 일을 했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지 그가 그이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단순한 이유를 망각하게 되면 우리는 전두환을 비판할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간단한 논리 구조를 만들어 볼 수 있다.

- 누구에게나 인권이 있기 때문에 인권을 지키는 것은 인류 보편의 가치다.
- 전두환은 사람이다.
- 따라서 전두환의 인권은 존중받아야 한다.

여기에는 이런 반박이 가능하다. "사람을 죽인 사람, 학살자의 인권도 존중해야 마땅한가"라는. 하지만 이런 반박을 하는 순간 인권은 차등한 것이 된다. 학살자의 인권은 인권이 아닌 것이 되거나 혹은 인간이 천부의 권리를 회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니까.

그럼 인권을 유린했기 때문에 비판받는 전두환에겐 그 죄를 묻는데 모순이 발생한다. 회수할 수 있는 차등한 인권을 몰수한 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겠나. 그러니까, 전두환을 제대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전두환의 인권을 인정해야 하는 셈.

고작 문어 대가리라고 놀렸다고 인권을 운운하는 건 너무 배부른 소리 같을까. 그럴 수도 있다. 전두환이 죽이거나, 죽이고 싶어 했거나, 사실상 죽였거나,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한 사람이 얼마인데. 고작 편하게 살다가 죽는 날 문어 대가리라고 놀린 것으로 인권을 운운하나 싶은 생각도 들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논리적 모순이 발생한다. 어떤 고통이 더 크고 중한지 경중을 따질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빨갱이 때려잡아 국가 경제를 부흥시키는 것이 사회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라고 얘기하던 한국의 독재자들의 논리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의 독재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고작'이라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죽음을 조롱하는 일, 그러니까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모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전두환이든 노무현이든 성재기든 박원순이든 마찬가지다. 그들이 생전에 보여왔던 삶과 행동에 지지든 비판이든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더욱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존재 자체를 비판하는 일은 그의 삶이 그려온 궤적에 대한 모든 (긍정이든 부정이든) 평가를 삭제하는 일이다.       
  

29일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고 전두환씨의 삼우제가 열리고 있다. 2021.11.29 ⓒ 연합뉴스

 
분노의 방향은 '행위'여야지 '존재'일 수는 없다. 그것은 분노의 이유마저 망각케 한다. 무엇에 분노하는 이유는 '변화의 요구'다. 지금의 상황이 잘못이라는 인식, 이 잘못된 상황을 만든 것은 무엇 혹은 누구인지에 대한 인지, 그리하여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요구. 그것이 분노의 이유다.

그런데 조롱은, 그러니까 행위나 가치에 대한 비판과 분노가 아닌 존재 자체에 대한 비난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전두환을 대머리라고 놀리거나 박정희가 총 맞아 죽었다고 놀리는 것이 무슨 힘이 있겠나.

오히려 조롱의 카타르시스가 달래준 분노는 변화의 동력을 상실하게 한다. "시원하게 욕 잘했으니 됐다"라고 여기는 마음 같은 거. 조금 더 나가면 그 카타르시스를 알리바이 삼게 될 수도 있겠다. "난 악에 분노하고 항거하는 올바르고 깨어있는 시민이지" 같은.  

가치를 대신하는 인격

착각은 지향하는 가치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인간의 모습을 욱여넣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는 민주주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는 악의 화신입니다" 같은 비유와 상징. 비유와 상징을 그저 비유와 상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민주주의의 상징과 같은 누구누구'에서 민주주의 대신 누구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그때부턴 그 '누구'가 민주주의를 대신한다. 그가 하는 일이 곧 민주주의가 되는 것. 이는 반대의 경우에도 성립한다. 악의 화신 같은 누구라는 인식이 생기면 그 누가 하는 모든 일은 악이 된다. 가치가 있어야 할 자리에 사람이 있다 보니 고작 전직 독재자를 반인반신이라고 추앙하는 일도 발생하고, 고작 '전 대통령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것을 정치목적으로 삼는 일도 발생한다.

이런 주객전도는 사실 매우 쉽고 행복한 일이다. 매번 고민하고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너무 피곤하다. 매번 사리에 맞게 판단하고 공부해야 하고,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를 때론 비판해야 하거나 혹은 내가 싫어하는 누군가의 말이 어느 때는 옳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본래 시비를 따지는 것보단 호오를 결정하는 일이 행복한 법이다. 그래서 가치의 자리에 사람을 집어넣고 판단의 자리에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을 집어넣는다.

그런데 그러면 우리는 그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일 말고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나.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하는 것도 없으니 언어는 메마른다. 마른 언어로는 격한 감정밖에 표현할 수 없다. 격한 표현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조롱하거나 숭배하거나 혐오하는 것뿐이다. 사실 숭배와 조롱과 혐오는 비슷한 일이다. 판단과 구별의 영역에 믿음과 배제를 배치하는 일.

길은 사람이 아니라 마을로 난다

우리의 지지와 분노는 더 정확해야 하고 우리의 언어는 더 정교해야 한다. 무엇을 찾거나 이루기 위해서 또는 바꾸거나 만들기 위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은 '악인'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를 악인이라고 부르게 된 까닭 그리고 우리가 중시하는 '가치'다.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거나 조롱하는 일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면 존재 그 자체가 소중하여서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도 성립하지 못한다. 분노가 만들어낸 것이 변화와 발전이 아니라 답보 혹은 퇴보의 결과를 만드는 셈이다. (과장이 아니다. 지난 수십 년 간 고작 사람에게 가치를 투영했던 결과를 지금 우리는 보고 있지 않나. 지금 한국은 각자의 '관'을 짊어진 사람들의 싸움판이다. 자기의 언어는 상실한 채 이미 죽어버린 그들의 상주임만을 내세우는 이들의 싸움.)

지표로 삼아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다. 길은 사람이 아니라 마을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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