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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형사제1단독(판사 노유경) 재판부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고 임도수, 고 양재천씨 자녀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15일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형사제1단독(판사 노유경) 재판부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고 임도수, 고 양재천씨 자녀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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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전 북한에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귀환 어부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으로 처벌받았다가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되었다.

15일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201호 법정에서 열린 납북귀환어부 고 임도수, 고 양재천의 재심 선고에서 재판부(재판장 노유경)는 "군산경찰서의 체포가 위법했고, 폭행·가혹행위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취득한 증거나 자백은 임의성이 없으며, 이러한 임의성 없는 상태는 검찰 조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하고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는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반세기만의 진실규명이었다.
     
이날 선고공판을 함께 했던 유족은 부친에게 덧씌워졌던 '빨갱이 전과'가 벗겨졌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생전에 재심 신청을 했으나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고 임도수씨의 자녀는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무죄'를 받았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조금 아쉽고 늦었지만 이제라도 무죄가 되었으니 하늘나라에서라도 얼마 기뻐하시겠어요"라며 환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고 임도수씨와 고 양재천씨는 전북 옥구군(1995년 군산시와 통합)에 거주하며 생계를 위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뱃일을 하던 선원이었다. 그러던 중 1957년 북에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같은 선원 고○○씨와 어업을 하게 되었다.

조업 중 임씨와 양씨는 고씨로부터 '이북에 갔을 때 목욕과 이발을 시켜주더라', '쌀밥에 고기반찬을 주며 극진히 대우해주더라', '차를 타고 공장과 농촌을 구경했다', '농사도 기계로 편하게 하더라', '올 때는 굉장한 환영을 해주더라', '철물공장에서는 기계를 많이 만들더라', '영화를 보여주는데 김일성이가 비료공장을 시찰하는 것도 보았다', '큰 여관에서 사과와 밥을 여자들이 갔다주더라'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수사기관은 이러한 말을 전한 고씨를 처벌함은 물론, 임씨와 양씨 역시 '북한을 찬양 고무하는 말'을 듣고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불고지'(구 반공법 8조)죄를 물었다. 북한에서 보고 들었던 것만으로도 처벌을 받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것을 정보기관에 신고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던 시대였다. 

1990년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국가보안법의 폐해를 막기 위해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죄'와 그로 인한 '불고지 죄' 적용에 기준을 정했는데, 그에 따르면 '국가의 존립, 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이 있는 경우'라고 적용했다.

수사과정에 모진 고문과 가혹행위

이 사건의 피해자들은 당시 수사과정에서 모진 고문과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임도수씨가 사망하기 전 진술했던 내용을 보면 그는 연행되어 조사받던 때를 생생히 기억해냈다.
 
1968년 7월경에 누가 이야기했는지는 모르지만 군산경찰서에서 오라더라는 소리를 듣고 선유도 집에 있다가 군산경찰서로 갔어요. 그래서 군산경찰서로 찾아가니 거기서 정보3계로 보내더라고요. 저를 담당했던 형사가 '남궁'이라는 형사였어요. 경찰들끼리 '남궁 형사', '남궁 형사'하더라고요. 그 형사가 저를 담당하고 조사했어요.

군산경찰서 2층인가 정보3계가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기에 어부들 십 수명이 있었던 것 같아요. 거기 정보3계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는데 한 40일 갇혀서 조사받았어요. 내가 군산경찰서 찾아갈 때가 한참 육젓에 쓸 새우를 잡을 때라 7월로 기억해요.(2019년 12월 24일 진술)

당시 군산경찰서는 영장도 없이 피해자들을 연행하고 구속된 9월 6일까지 불법적으로 구금하며 조사를 하였다. 그리고 그 조사 과정에서 무자비한 고문이 있었다.
 
남궁 형사가 옳은 대로 말하라고 손과 발로 때리는 것은 기본이고 몽둥이를 가지고 때렸어요. 나중에(출소하고 나서) 남궁 형사가 선유도 파출소 지서장으로 왔었어요. 내가 지서로 찾아가 남궁 형사한테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나를 잡아다가 때렸냐'고 싸운 적이 있었어요.(2019년 12월 24일 임도수 진술)

검사의 '무죄 구형'과 판사의 '무죄 선고'

이 사건을 주로 조사했던 수사관으로 등장하는 '남궁' 형사는 전북 군산 지역에서 유명한 공안 수사관이다. 각종 납북사건을 비롯해 군산 제일고등학교 교사를 이적단체로 조작했던 '오송회' 사건에도 관여되어 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전북지역에서 발생한 납북귀환어부 인권침해 사건에서 군산경찰서 '남궁' 형사의 이름이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군산지역에서는 '남궁' 형사가 군산의 이근안이었다.

이번 재심의 신청인 중 한 명이었던 고 양재천씨의 아들 양○○씨는 무죄 선고 후 '남궁' 형사와 질긴 악연을 이야기했다.

"어려서 부친이 경찰에 잡혀갔다 온 기억이 있어요. 아버지는 감옥에 다녀온 뒤로 매일 술로 신세한탄을 했어요. 그리고 가끔씩 '억울하다, 억울하다' 한탄을 하시는 거예요. 특히나 '남궁' 형사라는 이름을 말하면서 자주 욕을 하셨어요. 그 형사가 그렇게 모질게 조사를 하면서 허위 날조했다는 거예요."

고 양재천씨의 아들 양씨는 성인이 되어 경찰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부친의 과거 사건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제가 아버지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확신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것이 '남궁' 형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제가 '남궁' 형사를 찾아갔죠. 같은 경찰로서 물어보고 싶었어요. 진실이 무엇이냐고. 그런데 '남궁' 형사는 그냥 시대를 잘못 만났다고 하면서 미안하다고만 하더라고요. 정말 화가 얼마나 났는지 몰라요."

사건의 진실은 밝혀졌고, 가해자 '남궁' 형사도, 피해자 '임도수', '양재천'도 모두 사라졌다.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으나 들을 이들은 없다. 그리고 사과할 사람도 사죄받아야 할 사람도 없다. 재심을 담당했던 검사의 '무죄 구형'과 판사의 '무죄 선고'가 남은 피해자 유족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바라본다.

태그:#평화박물관, #수상한흥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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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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