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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유신 장군이 쇠공이로 칼을 갈아 바위를 잘랐다는 국립공원 경주시 단석산 서쪽 자락의 분지인 무산대수촌(서라벌 육촌 중 한 촌), 즉 오늘날 경주시 건천읍의 송선 1리 선동(仙洞)에서 태어났다. 선동은 내가 어릴 적만 하더라도 또래 동무가 스무남은 명이나 되는 백오십여 호의 꽤 큰 마을이었다.

지금 부모님 산소가 있는 궁벌(弓伐: 굼벙디기)은 어릴 적 어머니가 애써 가꾸시던 텃밭에서 투박한 도자기류나 다 삭은 듯한 기와 부스러기가 나왔던 것으로 보아 고대 신라 때 활을 제작했던 곳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마을 뒷산의 정상부는 수십만 평이나 되는 고원 지형으로 통일신라 시대 월명사의 제망매가 발원지인 부산성(釜山城)으로 신라 화랑들의 군사훈련장으로, 또 백제의 용장 계백과 어린 화랑들의 격투장이었다고도 전해져 온다.

우리 마을 선동은 영일정씨 만호공파의 집성촌으로 궁벌의 문중산 발치에 송천제가 있었고, 한 마을에 같은 항렬자로 도원이란 이름이 두 명이나 더 있었다. 나중 자라서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니, 우리 마을은 시골치고도 깡촌에 속했는데 근처 논밭에는 돌이 많아 다른 동네에 비해 소출이 적었고, 다른 지역은 논 한 마지기가 200평이었는데 우리 마을은 150평이었다.

이런 깡촌에서 아버지는 해방 후 농지개혁 때 뭘 하셨는지 내 기억으론 봄이 되면 줄창 어머니는 봄 양식 걱정으로 얼굴 펼 날이 없었다. 아버지는 처자식이 굶어죽어도 가정을 보살피기보다 문중일, 나랏일이 먼저인 분이셨다. 아버지는 시골 빈농 필부이셨으나 얼척없이 늘 우리집이 만호공파의 적통이며 영일정가는 조선시대 정승과 판서가 많이 나와 양반 중에서도 향반이 아니라 국반임을 강조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신의 삶에서 비롯된 박탈감이나 상실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어릴 적부터 손님이 오시면 나는 늘 불려가 큰 절을 올렸으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어른들 얘기를 한참 동안 무릎을 꿇어서 들었고, 누님들도 발뒤꿈치를 들고 마루를 걸어야 할 정도로 아버지는 우리 남매들에게 늘 엄부이셨다.

겨울 아침 식전이면 아버지는 자주 막내인 나를 무릎에 앉히시고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아침 세면 때마다 왜국 쪽으로 허리를 굽히기 싫어 꼿꼿이 서서 세수하시다가 옷을 다 버렸다는 얘기, 간신배들이 남이장군의 시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으로 조작하여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했다는 얘기를 해주셨고, 때론 이태백 두보 도연명 등 제씨의 시조를 정가(正歌)로 읊으시곤 하셨다. 시조를 읊으실 땐 가락에 맞춰 이리저리 몸을 흔드시곤 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예닐곱 살 적에 한지에 필묵으로 씌어져있는 천자문을 가르치셨는데,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루황 집우 집주 넓을홍 거칠황.... 제대로 뜻도 모른 채 무턱대고 아버지 앞에서 훈과 음을 외워 보였던 생각이 난다.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에 4.19혁명이, 이듬해엔 5.16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철모르는 나이에 동사무소 게시판에 나붙은 장도영 중장의 검은 선글라스 사진 아래 나붙은 혁명공약을 줄줄이 꿰었던 기억이 선하다. 중요한 것은, 어머니 손을 잡고 외할아버지가 동네 청년들에게 천자문, 동문선습을 가르쳤던 외가마을 어디에선가 면장선거 투표소를 따라나섰던 바로 그 이듬해 어느 봄날 동네 어귀마다 혁명공약이 나붙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어릴 적 온동네 사람들이 대개 박정희를 지지했으나, 투표일을 앞두고 넌지시 엄마더러 윤보선을 찍으라고 하셨다. 국회의원 선거였던가 도의원 선거 때 였던가, 누군가 건천 정미소에서 갓찧은 쌀을 소달구지 두 대에 실어 우리집에 보냈는데 아버지가 굳이 동네어귀에서 기어이 돌려보냈다는 사실을, 나이 60이 넘어서야 띠동갑인 서울 큰누님이 들려주셨다. 마흔여섯 늙으막에 막내로 나를 낳으신 아버지는 내게 대개 그런 분이셨던 것 같다.

그때 해마다 춘궁기면 양식 걱정하시던 어머니는 얼마나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을까. 그 사실은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의 흉만 들으며 자라온 내게 처음으로 아버지가 주신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처자식이 굶어죽어도 여염술집에서 골패와 짓고땡, 고담준론이나 읊으시는 한량이셨다. 그 탓에 한평생 질박한 성품에 신산스런 삶을 살아오신 어머니의 온전한 자식사랑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요컨대 아버지는 내게 정신을, 어머니는 육신을 물려주신 셈이다. 내가 고1이 끝나갈 무렵 아버지는 예순셋 연세에 술병으로 악화된 천식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 홀로 자식들을 갈무리하시며 여생을 외롭게 사셨다. 어머니는 늘 대처에 나가 대학공부까지 하여 선생이 된 막내아들인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일흔셋이 되시던 해 뇌졸중과 치매를 앓으시다 내가 전교조로 해직된 후 석달 정도 되던 그해 초겨울 끝내 돌아가셨으니, 나는 어머니께 씻을 수 없는 불효를 한 셈이다.

좌경의식화 교사 1호?  
 
1989년 5월 28일 2천여 명의 교사들이 건국대에서 '전교조탄압규탄대회'를 열었다.
 1989년 5월 28일 2천여 명의 교사들이 건국대에서 "전교조탄압규탄대회"를 열었다.
ⓒ 전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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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6월항쟁이 끝나고 울산의 현대 노동자들의 거리시위가 오랫동안 위력적으로 지속되었던 그해 1987년 9월 15일, 허버트 신부님이 시무하셨던 대명신학원에서 '대구 교사대토론회'가 열렸다. 이제 6월항쟁이 시민항쟁에서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지고, 다시 나같은 잠자던 교사들의 각성의 계기로 진화한 것이었다.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이승규, 유윤중 선생에게 제안해서 함께 갔던 터였다. 그날 발제자였던 이석구 선생은 학교에서 교장-교감-주임-평교사로 이어지는 상명하복의 수직적 관계, 지식 일변도의 주입식 암기위주의 입시경쟁교육의 현실에 대해 발표하였는데 구구절절 옳은 얘기여서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간 교사로서 안이하게 살아온 내 자신의 삶이 너무 하찮아서 부끄러웠다. 무엇보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그동안 아무 생각없이 촌지를 받기도 했고 아이들의 지각과 성적을 구실로 이따금 체벌도 해온 내 과거를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달 정도 꾸물대며 망서리고 있던 차에 동국고(지금은 대원고) 정수철 선생으로부터 모임에 한번 참석해 달라는 요청의 전화가 왔다. 솔직히 좀 망설여지기도 했으나 한편 호기심과 설레임도 좀 있긴 했다. 모임 장소는 대구초등학교 위 설록양복점 건물의 2층 복도 어귀에 달랑 책상 하나가 놓여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배창훈, 이경희, 정만준 선생 등 내 교사로서의 삶의 방향과 진로를 바꾼 '아름다운 교육동지'들을 처음 만났다.

나보다 먼저 깨닫고 실천해온 그들에게 미안했고 은근히 존경스럽기도 했다. 이건 일종의 경외심이기도 했고 연민이기도 했고 내 자신에 대한 깊은 자책감이기도 했다. 그때 내 나이 서른다섯이었고 이제 칠십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감히 내 인생의 절반을 오롯이 전교조와 함께해왔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기껏해야 십여 명의 동지들이었지만, 십시일반 돈을 내고 시간을 내어 <대구교사신문>을 만들고 사무실을 마련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민주교육추진 대구경북교사협의회를 만들고 전국교사협의회를 결성하고, 교육법 개정운동과 보충수업·자율학습 폐지운동, 교련탈퇴운동, 촌지거부운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전교협에서 전교조로 조직을 전환하려던 1989년 4월 20일 경이었다. 출퇴근 때마다 흰 세단이 내 뒤를 따라다니는 듯했고 집전화로 통화를 하면 윙윙 소음이 들리기도했다. 불법사찰이었다. 어느 날 밤 12시 경 책장의 문제될 만한 책들을 골라내어 박스에 한가득 넣고 네 살, 일곱 살 두 딸아이를 안고 손잡고 인근에 사시는 장모님 댁으로 갔다. 피난가는 심정이었고 장모님과 아내는 물론 두 딸아이에게 애비로서 한없이 미안했다. 허나 훗날 아버지가 훌륭한 교사였던 것으로 그들에게 기억되고 싶었다.

그 무렵 고3 어느 교실에서 수업 중 한 학생이 "선생님은 문익환 목사 방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했다. 지금은 아마도 50대에 접어들었을 그 학생의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평소 나를 따르기도 한 눈매가 초롱한 학생이었다. 교사는 수업 중 학생의 어떠한 질문에도 성실히 답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설사 수업과 무관한 내용이더라도 말이다.

"실정법을 위반했다면 의법처리할 수 있겠지만 신을 믿는 목사님이 공산주의자일리야 있겠느냐. 학교 앞 현수막에 '위선자 문익환에게 하느님의 천벌을!' 이라는 표현은 비교육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 답변의 전부였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아마도 내 답변을 들은 어느 학생이 집에 가서 얘기했을 수 있고 경찰 정보과에 포착되었을 수 있으리라.

석자 폭의 좁은 교탁이지만 교사는 교육목적 상 행한 발언에 대해 어떠한 문책도 체포도 있어선 안된다. 소위 수업시간에 가르치는 내용에 관하여 국가는 교사에 대해 어떠한 법적·형사적 책임을 묻거나 간섭해선 안된다. 요컨대 면책 특권과 불체포 특권을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래야만 진정한 교육권이 성립된다, 고 생각한다. 루소도 에밀이란 저서를 통해 이와 비슷한 얘기를 했고, 그는 나아가 교육은 국가가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교육을 더하여 4권분립을 주장했다고 교직과목 시간에 배워서 알고있다. 하물며 우리교육은 식민과 분단, 군부독재의 하수인 노릇을 해왔으니 더 말하면 무엇하랴.

당시는 노태우 군부정권이 여소야대 국회에서 통과된 교원노조법을 비토하고 정권차원에서 공안몰이를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나중 알게된 사실이지만, 전교협에서 앞장서 노조를 건설하려는 선진교사(안기부의 표현)들에 대해 선별적으로 좌경용공의 굴레를 씌우기 위한 이데올로기 공세의 서막이었다. 그 정치적 의도는 후보 때 공약한 중간평가를 뭉개기 위해 공안정국 조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최근에야 알게됐지만 전교조 대량해직으로 중간평가를 피해나갔다. 요컨대 우리는 노태우 정권의 최초의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1989년 4월 30일자 한겨레 신문에 보도되었듯, "치안본부, 대구 ㅅ여고 ㅈ교사 등 전국 31명의 의식화 교사 사법처리 방침"이었다. 왜 하필 내가 치안본부(본부장 강민창)가 밝힌 전국 31명의 '좌경의식화 교사' 중 1호로 지목되었단 말인가. 내가 이 나라 빨갱이 교사 1호란 말인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 이건 전교조 건설을 막기 위한 의도적 공안몰이다. 나의 직관적 판단이었고, 이후 안기부 문건으로도 확인되었다.

난 단 한 권의 공산주의 관련 서적을 단 한 권도 읽은 적이 없었고, 대학원 공부하면서 되레 공산주의 비판은 서너 권이나 읽었다. 단지 이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 인간의 벽, 창작과 비평, 인간의 역사, 철학에세이, 해방전후사의 인식 몇 권을 대충 읽어본 게 전부였다. 하기야 이런 정도의 책도 당시는 운동권 서적, 이를테면 아무런 세상 경험도 없는 검사가 얼마든지 안기부의 잣대로 좌경용공 불온서적으로 못박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 새까만 어둠의 시대였다.

[다음 기사] 산업화 시대의 사회적 가치 전환을 요구한 전교조 http://omn.kr/1wbvo 

태그:#전교조 해직교사 , #참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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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해직교사 詩人·한국작가회의회원 전교조 대구교육연구소장 교육민주화동지회 부회장 저서 : 『교단으로 돌아가면』 『우리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겨울나무는 외롭다』 『더 나은 교육은 가능하다』 『교육보다 교사가 먼저다』 『삼백예순날 하냥 외롭고 순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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