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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내 성희롱 피해자인 박씨가 1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중 대법원이 불법성이 없다고 판단한 민사 1, 2심의 결론을 뒤집고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적시한 부분을 가리키고 있다.
 직장내 성희롱 피해자인 박씨가 1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중 대법원이 불법성이 없다고 판단한 민사 1, 2심의 결론을 뒤집고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적시한 부분을 가리키고 있다.
ⓒ 조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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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해온 것보다 길고 어려운 싸움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끝까지 간다. 끝나야 끝이고 그 끝은 내가 정한다."

2017년 6월, 박수진(가명)씨는 자신의 SNS 계정에 끝을 보겠다는 기록을 남겼다. '#성추행당해서끝까지싸우는중'이라는 해시태그도 달았다. 자신의 피해 사실을 모두 허위로 인정한 형사 1심 판결 종료 후 항소를 결정하면서다. 그러나 이어진 형사 항소심과 손해배상을 청구한 민사 1심, 2심에서 내리 패소했다. 박씨는 지난 1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긴 시간을 버티게 해준 건 마음 속 꺼지지 않는 화였다"라고 회고했다. 

한 대학어린이병원 후원회에서 경력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한 박씨에게 가해자의 괴롭힘이 시작된 것은 2014년. 그는 후원회 이사이자, 외래 치과 교수로 모금 행사 때마다 박씨에게 업무를 지시한 인물이다. 2015년 10월 15일의 일은 박씨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는 그날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다. 

"빼빼말랐는데 요즘 살이 쪘다", "다리가 가늘고 새하얗다. 잔털은 쉐이빙하냐"라는 등의 성희롱 발언은 약과였다. 가해자는 사건 당일 서울 근교 한 골프장에서 열린 만찬 행사를 망쳤다고 질책하며 피해자에게 회초리를 맞아야 한다고 윽박질렀다.  

사건 발생 장소인 골프장 VIP룸엔 가해자와 피해자 둘뿐이었다. 매를 가져오지 않자 "왜 안 가져오냐" 채근했다. 결국 나뭇가지를 들고 온 피해자에게 가해자는 자세를 취하게 했다. 그리곤 "몇 대 맞겠냐"고 물었다. 그 사이 피해자의 바지 주머니가 울리자 "녹음하고 있느냐"고 의심했다. 여기까지는 가해자도 수사기관 진술을 통해 자인한 사실이다. 피해자가 이 사실을 상부에 알린 직후엔 직접 사과문도 보냈다.

그러나 형사 재판부는 수진씨가 "계약직 유지에 대한 걱정" 때문에 허위 진술했다고 보고 가해자에게 무죄 선고를 했다. 그 근거로 사건 발생 당시 피해자가 "녹음 하지 않았다"거나, "저항 없이 차에 동승했다"는 이유를 나열했다. 가해자의 행위는 성희롱이 아닌 '과한 질책' 정도로 축소됐다. 추행과 폭행 사실 또한 목격자가 없고, 피해자 진술만 있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민사 재판도 다르지 않았다. "불법행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한 줄뿐, 내리 기각이었다.

소송 과정에서 겪은 일이 더 모멸스러웠단 수진씨

분투의 끝은 2021년 11월 25일, 사건 발생 후 만 7년이 지나서야 길을 찾았다. 대법원(3부 주심 안철상 대법관)이 민사 재판부의 판단을 뒤집고 가해자의 행위를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성희롱에 해당하고 불법 행위 책임의 원인이 될 수 있다"며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것. 가해자의 당시 행위는 노동자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가한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도 명시했다.

대법원은 환송 법원에게 사건을 돌아보라는 숙제를 냈다. "형사 사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 진술의 합리성을 비교하라"는 것이었다. 피해자를 대리한 이은의 변호사는 "직장 내 괴롭힘 관련 법 시행 전 발생한 일이라도 그에 해당하는 행위라면 위법하다는 점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피해자는 물론 다른 노동자에게도 유의미하다"고 말했다.

수진씨는 당한 사건보다 소송 과정에서 겪은 일이 더 모멸스러웠다고 했다. 돈벌이를 지키려고 일을 벌였다면 2천만 원에 달하는 소송비용과 7년이란 시간을 써가며 "여기까지 오진 않았다"고 했다. 그는 형사 2심 패소 후 가해자로부터 날아든 무고 고소장에 수사기관을 오갔다. 오후 1시에 시작해 밤 11시에 끝나는 수사도 받았다. 당시 앉아 있었던 철제 의자의 감촉은 상담 진료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으로 남았다.

박씨는 "높은 지위에 계신 분들의 프레임에 오래 갇혀 있었다. '너는 계약직이고 어린 여자애니 이 일이 절실했을 것이다'라는. 사건 자체보다 나를 그렇게 본다는 시선이 더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그 사람이 의사가 아니라 저처럼 계약직이었다면 판결이 달랐을까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래는 그와의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나도, 가해자도 계약직이었다면 달라졌을까"
 
- 11월 25일, 대법원이 가해자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을 결정했다.

"실감이 안 났다. 현실이 아닌 것만 같고. 곱씹다보니 좋으면서도 허탈했다. 뛸 듯 기쁠 줄 알았는데 막상 그렇지 않았다."

- 대법원 판결문 중 어떤 대목에 가장 눈길이 갔나.
"이거 하나 받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구나 싶었다. 가해자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주장된 사실 관계 상당 부분을 적극적으로 인정했다'고 적은 대목이다. 형사, 민사 앞선 모든 재판에서 똑같은 증거와 내용으로 다퉜지만,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판단이다. 저한테는 꼭 인정받고 싶은 사실이었다."

- 사건 발생일로부터 약 7년 만의 결론이다.
"어린이병원 후원회 일을 시작한 게 2014년 3월부터고, 입사 후 얼마 안 돼 선임의 퇴사로 일을 맡으며 가해자와 맞닥뜨렸다. 당시엔 '미투'에 대한 인식이 많지 않은 상태라, (피해를 당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위에 보고해도 '피하는 수밖에 없다'는 식이었다. 내가 조심하는 수밖에 없구나, 싶었다.

어영부영 시간이 지나고, (피해) 강도가 점점 심해졌을 땐 '처음부터 대처를 적극적으로 했더라면' 하는 후회를 많이 했다. 지금 보면 그런 생각은 사실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재판을 이어가다 보니 퇴사할 수 없었다. 내가 떳떳하고 당당하다는 걸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사건 발생 후) 곧바로 징계 등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 그럼 내가 해보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나 하나 꼬리 자르는 식으로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다보니 7년이 갔다."
 
- 버티기 힘들지 않았나.

"회사선 제가 불편했을 거다. (사건 발생 후) 징계 없이 가해자는 사직서를 썼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후원회 관련 업무를 계속 지시했다. 그게 오히려 저한텐 자극이 됐다. 시간을 버티게 해준 건 꺼지지 않는 마음 속 화였다. '너 결국 재판도 다 못 이긴 거 아냐?' 하는 말들, 그런 게 불을 지폈다."
 
- 형사 1, 2심 판결문을 보면, 피해자가 계약직 신분을 유지하려고 허위 증언을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문제의 VIP룸 성희롱 사건 당시 '녹음기를 켜지 않았다' '차량에 저항 없이 동승했다' 등 피해자 책임을 언급하기도 한다.

"'네가 피할 수 있었는데 안 피했잖아'는 식이다. 들으면서 '할 말인가' 싶었다. 그 상황이 됐을 때 누구든 쉽게 녹음을 할 수 있나? 당시 판결문을 보면 인상 깊은 대목이 있다. 내가 행사를 망쳐 계약직에 잘릴 위기를 모면하려고 재판으로 시간을 끌려고 한다는 취지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 회사가 무슨 대기업처럼 대단한 회사가 아니다. 일을 꾸미면서까지 그렇게 다닐 곳이 아니다."

- 계약직이라는 시선이 판단에 작용했다고 보나.
"의사, 판사 등 높은 지위에 계신 분들의 프레임이 씌워졌다고 본다. '너는 계약직이고 어린 여자애니까 이 일이 절실할 거야'... 도대체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본 걸까? 고작 그런 걸로 거짓말할 사람으로 봤을까? 사건 자체보다 나를 그렇게 본다는 시선이 힘들었다. 안 다니면 그만인 회사였다. 하지만 (사건 해결에) 인생을 걸었을 뿐이다. 모멸감을 느꼈다. 그런 생각도 했다. 둘 다 계약직이었다면. 그럼 달라졌을까."

- 가해자가 자인한 사안에 대해서도 형사 재판부는 질책일 뿐, 추행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취지로 판단했다.
"오히려 가해자를 대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들을 선임한 가해자가 자신은 봉사활동도 열심히 한다고 울며 말할 때, 어쩐지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기울어진 상태에서 시작했다. 경찰이든, 법원이든."

- 형사 재판은 결국 검찰이 상고를 하지 않았다. 피해자가 상고를 간청했다고 알고 있는데.
"검찰에 연락을 시도해 검사실 직원과 연락을 했다. 전화 한 번 하고 '어떻게 하겠다'는 연락은 받지 못했다. 검찰도 (내리 패소하니) 의지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까지 과정에서 한 가지 흠이라면 당시 내가 절망감에 빠져 정신을 붙잡지 못한 거다. 찾아가서라도 '해주세요' 해볼 걸. 난리를 쳐볼 걸."

- 민사 상고의 경우, 직접 변호인에게 요청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계속 마음에 남았다.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이대로 내가 한 60년은 더 살 것 같은데, 이걸 안고선 제대로 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을 먹었다. (가해자 측에서) 민사가 시작되기 전 저와 제 주변인들을 무고로 고소한 것도 불을 지른 계기가 됐다."

"첫 경찰 조사 땐 소장도 제대로 안 보고 물어봐"
 
형사 재판 패소 후 가해자가 피해자를 상대로 무고 고소를 제기한 뒤, 약 2년 만에 검찰에서 피해자에게 전달된 불기소 통지서.
 형사 재판 패소 후 가해자가 피해자를 상대로 무고 고소를 제기한 뒤, 약 2년 만에 검찰에서 피해자에게 전달된 불기소 통지서.
ⓒ 인터뷰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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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사와 민사 1,2심 모두 성희롱이 '아니'라고 했고 대법원은 성희롱이 '맞다'고 명시했다. 왜 이런 판단의 차이가 나왔을까.
"처음 형사 재판을 할 땐, 주변이든 회사든 '왜 저렇게까지 하지' 하는 시선이 있었다. 미투가 이슈가 되고 나선 시선이 바뀌더라. '너 대단하다, 멋있다...' 회사도 저를 어려워하고. 옛날 같은 분위기였다면 절대 대법원 판결문 같은 내용을 받지 못했을 거다. 민사 1, 2심까지 모두 기각됐을 땐 '내가 판사 운이 없나?' 싶기도 했다. 다른 비슷한 사안에선 피해자 진술이 일관되면 범죄가 인정되어 벌도 받고 하던데. '왜 나만?'이라는 생각이었다."

- 가해자 측 '무고 고소'로 피의자 신분이 되어 수사기관 조사를 5회 가량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불기소 처분 됐다.
"경찰 조사 당시 점심 먹고 조사를 시작해 오후 1시부터 밤 11시까지 조사를 받았다. 경찰서만 5번을 갔고, 검찰은 마지막에 1번. 조사받으러 갔을 때 느낌은 이미 무고녀였다. 처음 경찰 조사 땐 심지어 소장도 제대로 보지 않으시고 물어보셔서 항의 끝에 수사관을 바꿨다. '피해자니까 무조건 믿어줘야 한다'는 게 아니다. 기본을 갖춰달라는 요구였다."

- 수사 당시를 떠올려보면.
"늘 철제 갈색 접의식 의자에 앉았는데, 그게 유독 강하게 남아 있다. 스펀지도 터져나와 있고, 어딜 가도 널려 있는 의자. 그게 꼭 나 같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방치 되어 있는... 트라우마 치료를 받을 때, 그 의자에 앉았던 감촉이 제 몸에 오래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똑바로 앉기 힘들어 굴욕적인 자세가 된다. 비참한 느낌이었다."

- 무혐의 결정은 언제 나왔나?
"피소 되고 2년 뒤에 나왔다. 사건진행경과를 보는데, 무고 맞고소로 제가 고소한 사건에 대해선 (가해자를) 한 번도 안 불렀더라. 사건도 힘들었지만, 이런 과정이 더 힘들었다."

"30대를 갈아 넣었지만, 이제 힘들지 않다"

- 올해 직장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 관련 피해로 산재를 신청할 계획이 있는지.
"5월말까지 일했다. 산재 신청은 해볼만 하다고 본다. 피해 당시 경험으로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 진단을 받기도 했고. 계속 재판을 하면서 가해자와 그 사건을 이야기하니 공황이 왔다. 쓰러져 법원 복도에 누워 있기도 했고... 기념일 반응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10월 15일, 사건 당시 계절만 되면 그때로 돌아가 곤두선다."

- 퇴사 결심은.
"지난해부터 몸이 더 아파지면서 이젠 버티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대법원까지 가면서, 이 안에서 내가 보여주고 싶은 건 다 했다고 생각했다. 아마 4심, 5심이 있었다면 회사를 계속 다녔을 수도 있다."

- 회사에선 어떤 직원이었나.
"회사에선 (업무적으로) 제가 고참이었다. 성인 후원회에 있다가 어린이후원회로 온 거라, 일을 굴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저 하나 빠져도 돌아가긴 하겠지만 갑자기 빠지기엔 (회사에서도) 부담이 있었을 거다. (상고 판결 후에) 회사에서 친했던 언니들이나 동생들은 연락이 왔다. 병원 교수들에겐 판결문을 메일로 전달했다. '당시 제대로 처리했다면 멀리 돌아오진 않았을 것'이라는 취지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 피해 발생 전과 후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나.
"방어적으로 사람을 대하게 됐다. '나를 때릴 것 같으니 내가 먼저 방어해야지' 하고, 냉소적인 사람이 됐다. 지하철에서도 누군가 다른 이를 불편하게 만들면 밀쳐서라도 분리시킨다. 그런 일에 항상 날이 서 있다. 재판하며 겪은 일을 SNS에 기록했다. 그런데 회사에서 비슷한 일을 겪고도 참았던 친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제가 하는 걸 보고 대리만족 된다고 한 이도 있었고. 나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기도 하고. 어쨌든 날 통해서 용기를 가진다고 하니, 더 적극적으로 해내고 싶었다."

- 직장 내 성희롱을 처벌할 수 있는 법은 이미 마련됐지만, 여전히 두려움에 피해를 고발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감히 '다 지나간다'는 이런 말도 할 수 없고, '요즘은 많이 바뀌었으니 용기 내'라고 하지도 못하겠다. 제가 너무 힘들어봐서다. 다만 옆에서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쟤 웃고 다니네?' 같은 말에 상처받지 말고, 그 틀에 갇혀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한다. 응원해주고 싶다."

- 긴 시간이었다.
"29살에 겪어 7년이 흘렀으니 내 좋은 시절과 에너지, 30대를 여기다가 다 갈아 넣었다. 송달비만 빼도 비용만 2천은 훨씬 넘게 들었다. 직장 계속 다니자고 이 재판을 했다면 지금까지 올 수도 없었다. 파기환송 됐다고 끝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원하는 내용을 한 번은 받아봤고 더 힘들 것도 없다."

- 앞으로의 계획은.
"20대 때부터 시민운동 하는 곳 등에서 일했었다. 거리모금 활동도 했고, 강제징용 피해자분들이 사는 일본 마을의 토지매입 일에도 참여했다. 있는 사람들의 돈을 모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그런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병원 후원회도 그렇게 시작했다. 건강해지면 다시 일을 시작할 테지만, 병원 일은 하고 싶지가 않다.

단순히 돈만 버는 게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 보람을 찾아야 행복할 것 같다. 여성민우회나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병원과 달리 규모는 작지만, 저 같은 일로 도움이 필요할 때 힘을 구할 수 있는 단체에 (후원 일로) 보탬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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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팀 기자입니다. 서류보다 현장을 좋아합니다. 제보는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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