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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구미시 고아읍 원호초등학교 뒤 도로변에 세운 김유영 기념비와 조형물. 지역 주민들도 이 기념비의 존재를 잘 모르고, 찾는 이도 거의 없다.
 2009년 구미시 고아읍 원호초등학교 뒤 도로변에 세운 김유영 기념비와 조형물. 지역 주민들도 이 기념비의 존재를 잘 모르고, 찾는 이도 거의 없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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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원호초등학교 뒷담과 도로 사이의 공터에는 기념비 하나와 화강암 조형물이 몇 기 세워져 있다. 길에 바투 붙어 있어도 행인이든 지나는 차량에서든 눈에 띄는 자리가 아니어서 거기 그런 기념물이 있다는 사실은 지역 주민들도 잘 모른다. 당연히 찾는 이들도 거의 없다. 

카프 영화의 상징적 존재 김유영

기념비의 주인공은 원호리 출신의 영화인 김유영(金幽影, 본명 영득, 1908~1940)이다. 그는 "영화를 작가의 것이 아닌 민중의 것, 사회주의적 교화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시각"(김종원)으로 '무기로서의 예술론'을 견지한 카프(KAPF) 영화의 상징적 존재였다.

원호리에서 천석지기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구미 공립보통학교를 나와 대구 공립고등보통학교(경북중의 전신)로 진학했다. 1923년 봄에는 경성으로 가 보성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는데 여기서 사상적 동반자 임화(1908~1953)를 동급생으로 만나게 된다. 

1920년대는 세실 B 데밀의 <십계>(1923),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주연한 <바그다드의 도적>(1924) 등의 영화가 수입·상영되던 시기였다. 대구고보 시절부터 활동사진에 심취했던 김유영은 이 새로운 형식의 현대 예술, 영화에 매료됐다.
 
영화인 김유영(金幽影, 본명 영득, 1908~1940)
 영화인 김유영(金幽影, 본명 영득, 1908~1940)
ⓒ 장호철, 기념비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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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영의 첫 영화 <유랑> 기념 조형물. 왼쪽 기둥에 개봉관 단성사 이름이, 가운데에는 영화를 소개하는 스틸컷과 글이다.
 김유영의 첫 영화 <유랑> 기념 조형물. 왼쪽 기둥에 개봉관 단성사 이름이, 가운데에는 영화를 소개하는 스틸컷과 글이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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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3월 김유영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임화, 서광제(1901~?) 등과 함께 "구태의연한 신파극에서 탈피하고 참신한 신인을 양성한다"라는 목표로안종화(1902~1966) 등이 설립한 조선영화예술협회 연구부에 들어간다. 뒷날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1925~1935)에 가입하게 되는 임화와 서광제, 김유영 등 연구부원들은 조직을 장악해 사실상 협회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첫 영화 <유랑>부터 3편의 경향 영화 연출

이듬해인 1928년 갓 스무살 김유영이 자신의 첫 번째 연출작으로 임화가 주연한 경향 영화 <유랑(流浪)>을 내놓은 것은 조선영화예술협회 내부의 알력과 분쟁이 낳은 뜻밖의 결과였다. 김유영의 <유랑>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이 일군의 젊은이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완성된 첫 영화였다.

<유랑>은 일제 압제하에서 땅을 빼앗기고 유랑하는 처지에 놓인 농민들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었다. 그것은 적어도 1920년대에 상상될 법한 노동자의 계급의식 심화와 비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정치적으로 교화하는 서사로는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단성사에서 개봉한 <유랑>의 흥행은 실패했고, 평가도 기대 이하였다. '리얼'했으나, "서툴고 미숙함을 면치 못했다"는 안종화의 평가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이듬해(1929)에 두 번째 작품 <혼가(昏街)>(어둠의 거리)를 제작했다. 노동자 계급의 비극적 운명과 해방투쟁을 그린 <혼가>는 <유랑>보다 강도 높게 현실을 비판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카프 동지들로부터도 냉정한 평가를 받는 등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1929년 9월 카프에 가입한 김유영은 같은 해 12월, 임화, 서광제 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영화 운동단체인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창립했다. 이어 일본 도쿄와 교토의 촬영소를 둘러보고 온 김유영은 1930년에 그간 교제해 온 소설가 최정희와 결혼했다. 1930년 4월 산하에 영화부를 신설한 카프에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해체를 권고하자 김유영은 이에 불응해 카프를 탈퇴했다. 
 
김유영의 세 번째 영화 <화륜(火輪)>(1931)은 기미년 만세 사건으로 복역한 주인공의 곡절 많은 삶과 불확실한 미래를 그린 작품으로 조선극장에서 개봉했다.
 김유영의 세 번째 영화 <화륜(火輪)>(1931)은 기미년 만세 사건으로 복역한 주인공의 곡절 많은 삶과 불확실한 미래를 그린 작품으로 조선극장에서 개봉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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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1931) 그는 세 번째 영화 <화륜(火輪)>을 공개했다. 기미년 만세 사건으로 복역한 주인공의 파란 많은 삶과 불확실한 미래를 그린 이 작품도 흥행은 물론 카프 내부의 혹평을 받아야 했다. 특히 오랜 동지였던 임화는 "유치한 신파적 작극술의 기계적 이식"에 지나지 않은 "반 카프적 반동 영화"라고 직격했다. 또 카프가 신흥영화동맹의 해체 권고를 따르지 않은 그를 "조직을 배반한 탈주자"라고 매도하기도 했다. 

'신건설사' 사건에서 이동식소형극장 혐의로 복역

카프를 떠났지만, 김유영은 계속 카프를 지지했고 카프의 슬로건을 따르는 영화를 만들 궁리에 골몰했다. 임화의 공격에 대해서도 그는 "어디까지나 프롤레타리아 영화 운동의 전선에서 약하고도 굳센 생명을 아끼지 않겠다. 이 생각과 행동은 영구불멸일 것이다"라고 쓰면서 카프에 대한 충성과 애정을 확인할 정도였다.

1933년 그는 김기림·이효석·유치진·이태준·정지용 등과 함께 순수문학을 표방하는 구인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는 계급적 이데올로기를 지닌 전문적인 시나리오 작가와 연대를 꾀하고 농촌과 농민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시나리오를 얻고자 하는 동기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이는 이듬해 카프 계열의 조선영화제작연구소의 창립에 동참하면서 구인회를 탈퇴한 데서 분명해진다. 

그의 내면에 불타고 있었던 사상과 이념은 1929년 <조선지광>에 발표한 글에서 드러난다. 그는 "수천 수만의 노동자의 행렬, 땀과 먼지에 싸인 비참한 얼굴, 절규하는 무수한 입, 이 무성의 필름이-대지를 요동시키는 가성(歌聲)과 울리는 발자취와 수천의 탱크 소리를 들을 때에 그 효과는 말할 수 없을 것"이라며 발성영화가 무성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대중 선동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썼다. 요컨대 그는 '무기로서의 영화'를 상정하고 있었다. 

문예 단체 '신건설사(新建設社)'를 지하조직으로 두고 활동하던 좌익극단 '신건설'이 1934년 전국 순회공연을 하던 중 주요 인물들이 모두 체포되는 이른바 '신건설사 사건'(제2차 카프 검거 사건)이 터졌다. 일제의 좌익 탄압이 시작된 것이었는데 신건설사의 연출부를 맡았던 김유영도 "카프 가입과 이동식소형극장 조직"이라는 혐의로 체포됐다.

일제는 카프와 이동식소형극장이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로 규정하고 이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김유영은 1년 6개월 동안 전주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이 사건으로 사실상 와해에 이른 카프는 1935년 5월 자진 해산하지 않으면 안 됐다.
 
김유영의 네 번째 영화 <애련송>은 동아일보 공모 영화소설 당선작 최금동의 <환무곡(幻舞曲)>(1937)을 이효석이 각색한 작품으로 발성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젊은 남녀의 사랑을 그린 통속극으로 명치좌에서 개봉되었다.
 김유영의 네 번째 영화 <애련송>은 동아일보 공모 영화소설 당선작 최금동의 <환무곡(幻舞曲)>(1937)을 이효석이 각색한 작품으로 발성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젊은 남녀의 사랑을 그린 통속극으로 명치좌에서 개봉되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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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전향을 서약함으로써 석방된 김유영은 1935년 극예술연구회가 신설한 영화부에 가입하고, 그 첫 영화 <애련송(愛戀頌)>의 연출을 맡았다. <애련송>은 동아일보 공모 영화소설 당선작 최금동의 <환무곡(幻舞曲)>(1937)을 이효석이 각색한 작품으로 1939년 발성영화로 제작됐다. 

<애련송>은 김유영이 지금껏 천착해온 프롤레타리아 영화와는 달리 젊은 남녀의 사랑을 탐미주의적 시각으로 그려낸 통속극이었다. 이미 카프가 해산되는 등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 진영은 와해했고,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1936)의 구속을 피할 수 없는 처지에서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찍이 자신을 '영화 기술자'로 자처한 바 있는데, 이 시기 그는 계급주의 기술자에서 '가치중립적 영화 기술자'로 옮겨간 것처럼 보였다. 

<애련송>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지만, 김유영은 처음 만든 '토키 작품'으로 "조선 영화의 현재 수준에서 한 걸음 나아간 것을 자부한다"라고 하여 만족감을 표시했다. 이어 1939년 11월부터 새 영화 <수선화>의 촬영에 들어갔다. <수선화>는 김유영이 쓴 시나리오 '처녀호(處女湖)'를 문예봉을 주연으로 기용해 만든 전형적인 통속극이었다.
 
마지막 영화 <수선화>는 김유영이 쓴 시나리오 ‘처녀호(處女湖)’를 문예봉을 주연으로 기용해 만든 전형적인 통속극으로 경성보총극장에서 개봉되었다.
 마지막 영화 <수선화>는 김유영이 쓴 시나리오 ‘처녀호(處女湖)’를 문예봉을 주연으로 기용해 만든 전형적인 통속극으로 경성보총극장에서 개봉되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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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그의 신장염은 최악의 상태여서 지팡이를 짚고 나와 촬영을 강행하기도 했으나 결국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는 1940년 1월 4일 오전 8시에 짧고 뜨거웠던 생애를 마감했다. 향년 서른넷. 장례는 영화장으로 치러졌고, 유작은 조감독이 완성해 1940년 8월 14일 경성보총극장(국도극장 전신)에서 개봉했다.

진보적 영화운동 주도, 그러나 잊혀서 외롭게 빛나는 별

스무살에 신경향파계열 최초의 영화, 무산계급 농민의 저항을 그린 <유랑(流浪)>을 연출하고, 이후 13년 동안 모두 다섯 편의 영화를 만들었으나 김유영은 대중이나 평단의 호응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유한 영화관으로 진보적 영화 운동의 씨를 뿌렸고,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영상으로 재현했다. 

나운규(1902~1937)가 <아리랑>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민족영화의 선각자로 기려지는 등 한국 영화에서 절대적 위상을 차지하는 데 비기면 김유영이 선 자리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한참 비켜 서 있다. 진보 영화 운동을 주도하면서 카프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추구했지만, 그는 '잊힌 존재'에 가깝다. 

해방과 분단 이후 카프가 금기시된 탓도 있지만, 우리 영화사는 그를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북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를 "노골적으로 좌익으로 기울지는 않고 민족 항일기에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렸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1993년 김유영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009년에는 김유영기념사업회와 구미시에서 김유영 기념비와 함께 그가 연출한 영화 <유랑> <화륜> <애련송> <수선화> 등 4편의 스틸컷 조형물을 세웠다. 

그러나 그가 고향에서도 기억되지 못하는 것은 배우 아닌 감독이었고, 현재 그의 영화가 한편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념사업회의 활동이 힘을 받지 못하는 이유도 그런 상황 탓이 크다. 김유영은 일찍이 우리 영화사의 별이 됐지만, 그 별은 멀고 아득해서 눈에 잘 띄지 않은 채 지금도 외롭게 빛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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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기사 포함, 모두 1천여 편의 글을 썼다. 2019년 5월,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에 연재한 '친일문학 이야기'를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으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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