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노동'이 무시되는 현실에서 전태일이란?
 
"태일이"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태일이"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리틀빅픽처스

 
전태일 열사의 삶을 옮기는 작업은 장르와 시간대를 초월해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비롯된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임종을 지켰던 이소선 어머니는 자식을 먼저 보낸 후 41년간 '노동자의 어머니'로 거듭나 전태일 열사가 못 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 지난한 삶을 살아냈다. 지난 2011년 세상을 떠난 이소선 여사의 장구한 여정은 노동자뉴스제작단 출신 태준식 감독에 의해 다큐멘터리 <어머니>로 완성되었고, 아들 전태일과 연결되면서도 또 다른 결로 우리 곁에 남게 된다. 
 
생전의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처음 접했지만 한자와 전문용어 범벅인 법전을 이해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고 한다. 한쪽을 소화하는데 하루씩 걸렸기에 주변에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더라면 하고 아쉬워했던 고인의 소식을 뒤늦게 듣고 달려온 일군의 지식인과 대학생들이 있었다. 그들 중 훗날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남긴 조영래가 도피생활 중에 전태일의 전기를 집필하게 된다. 이후 전태일 열사를 기억하는 프로젝트는 거의 대부분 이소선 어머니와 '전태일 평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에 기원을 두게 된다.
 
전태일 평전이 1980년대에 해외에서부터 익명으로 출판되고 국내에서 여러 형태로 보급되면서 이 책은 하나의 '정전'이자 필독서가 된다. 평전의 내용을 기반으로 1995년, 박광수 감독, 홍경인과 문성근, 김선재 주연의 극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세상에 나왔다. 당시 서울 관객 24만 명을 기록하며 흥행하고 비평적인 찬사도 얻는 데 성공한다.
 
영화는 노동계와 시민사회운동의 대대적 응원 속에서 제작비를 모금하고 단체 관람을 조직한다. 그리고 바로 그해, 열사의 기일에 맞춰 민주노총이 출범했다. 1년 후 민주노총은 당시 정부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맞서 총파업 투쟁을 성사시킨다. 더디지만 전태일이 꿈꿨던 세상은 불완전하게나마 가능한 것처럼 꿈꿀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직후 IMF 구제금융 하에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제도가 승인된다. 좋았던 순간은 급속도로 차갑게 식기 시작한다.
 
이후 동일한 원작에 기반을 둔 최호철 작가의 만화 <태일이>가 잡지 "고래가 그랬어"에 연재된 후 전5권으로 2000년대 초에 완간된다. 애니메이션 <태일이>는 전태일 평전을 시조로, 만화 <태일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니 결국 앞에서 열거한 모든 작업은 하나의 '유니버스' 안에 속하는 셈이다.
 
2_1995년과 2021년의 간격: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태일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태일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리틀빅픽처스

 
출판만화 <태일이>로 처음 전태일 열사를 접한 이들이라면, 이 애니메이션은 만화를 일종의 무빙-이미지로 변환한 것처럼 다가올 것이다. 1995년판 영화로 먼저 만났던 이들이라면 극영화가 사실상 2개의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전개되면서 점점 교차하다 합해지는 형태로 진행되는 구조였음을 다시금 깨닫게 될 테다.
 
극영화는 전태일 열사의 삶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재현하는 서사와 함께, 그의 자취를 뒤따르며 전태일의 유산을 물려받은 이들의 이야기가 나란히 흐른다. 그리고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수배중인 상태로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던 조영래의 시점에서 약 10년의 시차를 두고 전태일의 행적을 평가하는 과정도 거친다. 종국에는 그 두개의 이야기가 결국 하나의 세계관으로 통합되는 구조를 취한다. 
 
결국 1995년의 영화는 전태일의 뒤를 따른 수많은 이들이 자신을 희생하며 싸워가면서도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현되는 전망을 믿는다. 당대에는 거대한 권력과 무소불위의 자본에 맞선다는 게 계란으로 바위치기거나 또는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것처럼 치부되지만 결국 바위는 쪼개지고 불탄 가지에 싹이 돋아나는 것 같은 체험의 시간이었다. 그런 체험이 있었기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제작부터 개봉에 이르기까지 진행될 수 있었다.
 
3_1995년과 2021년의 간격: <태일이>
 
2021년 우리에게 막 선보인 애니메이션은 보다 전태일의 삶 자체에 집중한다. 즉 1995년 버전에서 딱 절반에 집중한 셈이다. 그 덕분에 과거 영화에서 분량 배분의 문제로 축약하거나 지나쳤던 전태일 열사의 생전 모습이 보다 일상적으로 구현될 수 있었다. 평전과 지인들의 증언 등에서 확인되었지만 영화에선 빠졌던 세부적 묘사가 본 작품에선 상당부분 복원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생전의 전태일 가족이 대구를 떠나 각지를 전전하게 되는 과정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가족이 서울에서 다시 결합하는 여정이 상세하게 추가된다. 그리고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는 면모가 보다 풍부하게 조명된다. 그리고 당시 봉제공장의 작업과정이나 근로관계 역시 추가된다. 1995년 영화에선 진폐증이나 풀빵과 통금 에피소드 위주로 짧게 묘사되던 부분들이 좀 더 여유로운 분량으로 '디테일'을 얻는 셈이다.
 
분량 상 1995년 영화에선 언급되지 않았지만 전태일이 이상주의를 꿈꾸던 시절의 시도도 이번 작업에선 언급된다. 전태일 열사는 평화시장 내 열악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일종의 '사회적 기업' 형태로 운영되는 '모범 회사'를 기획하고 꽤 세부적인 구상을 기록해놓기도 했다(물론 작품 속 전태일의 꿈처럼 실제 시도는 투자자를 얻지 못해 무산된다).
 
<태일이>는 애니메이션이라 해서 수위를 낮추거나 민감한 부분을 생략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실사가 2D로 바뀌면서 전체관람가로 조정된 정도 수준으로 보면 적합할 테다. 극영화에서 전태일 열사의 분량이 확장버전 형태로 전개된다고 보면 딱 맞다. 그렇게 직선화된 이야기 구조에 디테일한 서술이 추가되는 식 전개다. 그 덕분에 이미 반세기 전의 위인으로 취급되며 '역사화'된 전태일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인지하던 이들에겐 안성맞춤의 복습자료가 된다.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하면서 실사화에 비해 다소 보기가 편해지긴 했지만 세부적인 당대 사회상에 대한 서술이나 묘사는 절대로 전체 관람기준을 방패삼아 안일하거나 느슨해지지 않는다. 인물 작화를 제외하면 오히려 극 사실주의에 가까울 만큼 당대 풍경을 충실하게 재현해낸다. 특히 암울하던 시대상의 반영인 봉제공장 장면은 1995년판 영화의 흑백 실사장면이 주던 감흥에 크게 떨어지지 않을 정도다. 본 작품을 작업한 이들이 열과 성을 다해 해당 시기를 제대로 구현하려 노력했음이 전해지는 작화다.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한 전태일 열사는 아주 모범적인 위인전기의 형태를 갖췄다. 전태일 평전과 전집만화, 그리고 본 작품을 소화한다면 1970년 11월 13일에 일어난 불꽃이 어떻게 시작되고 그런 귀결을 향했는지 크게 부족하지 않는 이해에 도달할 것이다.
 
4_외적 과제: 노동 존중과 전망의 공백
 
'"태일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태일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리틀빅픽처스

 
남은 과제는 1995년판 영화에서 2021년 애니메이션으로 옮겨지지 않은 나머지 절반의 몫이다. 극영화가 제작될 당시의 기운에 관련된 지점이다. 수많은 희생과 시련을 딛고 비록 여전히 한계와 고난을 겪어가면서도 거대한 변화의 꿈을 갖고 작동하던 사회적 전망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소실된 지 오래다. 그 시절의 열망은 상당부분 변질/퇴색/회한/냉소로 대체된 실정이다.

2021년 판 <태일이>는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전태일 평전의 현재적 이미지 구축이라는 숙제에 직면해버린다. 영화는 이 난제를 거대한 변혁적 전망의 재구성 대신 전태일이라는 한국사회의 상징이자 거울을 최대한 정교하게 형상화하는 데 집중하는 승부수를 던진다.
 
영화를 본 입장에서 그 도전은 크게 어긋나 보이진 않는다. 전태일 사후 50년, 고인의 유지를 이어받은 중간단계의 총집결판 격인 민주노총 출범과 극영화 탄생에서 25년이 훌쩍 지났다. 현재 시점에서 적절한 결산과 재정립은 필수적 과제인 셈이다. 
 
문제는 작품 외적인 지점에서 주로 발생한다. 한국현대사에서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이 그저 과거의 것으로 억지 치부되거나 현실에 발 딛지 못한 채 역사 유물처럼 박제화 되어가는 반동의 시대를 염려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노동의 가치와 의미가 20세기의 유물로 이제 낡은 것처럼 매도당하는 상황을 어떻게 뒤집을 것인가의 기획은 아직 공백인 상태다.
 
5_한국사회 미래를 건 투쟁의 상징: 전태일의 존재감
 
<태일이> 제작과정처럼 전태일을 기념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어떻게 작금의 시대에 개입할 수 있는가? 만만치 않은 숙제가 본 작품, 그리고 영화의 의미를 긍정하는 이들 앞에 거대한 산처럼 놓여 있다. 1970년 이후부터 2021년 현재까지 '전태일'이라는 이름은 현대 한국사회의 거대하게 돌출한 봉우리 또는 도도한 대하와도 같다.
 
그 이름은 결코 편의적으로 양립될 수 없는 몇 개의 다른 상징들과 끊임없이 충돌하거나 대치하는 중이다. 이 대립구도는 우리 사회의 향후 방향과 경로를 놓고 지속적인 토론과 입장을 요구한다.
 
한국사회의 해결 요원한 근본 모순들이 해소되는 순간, 일종의 '역사의 종말'에 이르기 전까지는 전태일이라는 이름은 계속 호명되어야 한다. 그 이름은 누군가에겐 변화의 영감이나 사회적 연대의식의 표상으로 여전히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반대편에 선 이들에겐 그 존재 자체를 지우거나 치워버리고 싶은 두려움의 표적으로 존재감을 잃지 않을 것이다.
 
먼 훗날 후속세대가 온당한 역사적 평가를 내릴 때까지, '모든 갈등을 끝내기 위한 근본적인 갈등'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전태일이라는 존재는 영원하게 느껴지는 투쟁에서 한쪽 가치의 상징으로 길잡이 역할을 계속 수행해야 한다. 2021년에 등장한 <태일이>는 그 등대의 임무를 당분간 맡게 될 것이다.
 
<작품정보>
 
태일이 Chun Tae-il
2020|한국|애니메이션
2021.12.01. 개봉|99분|전체관람가
감독 홍준표
주연 장동윤(전태일), 염혜란(이소선)
출연 진선규(전상수), 권해효(한미사 사장), 박철민(재단사 신씨), 태인호(오형사),
이영미(정예진), 수환(신정윤), 효숙(김희정), 영배(안동구), 종우(강태우),
금화(이나영), 근로감독 (이원준), 평화시장 대표(김정팔), 김 목사(최병윤)
제작 명필름, 스튜디오 루머
배급 리틀빅픽처스
공동제작 영화 <태일이> 1970인 제작위원, 질라라비, 전태일 재단
홍보마케팅 아워스OURS
원작 조영래(전태일 평전), 최호철, 박태옥(태일이)
태일이 전태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명필름 전태일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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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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