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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심해지기 시작한 작년 이맘때, 아이들은 등교보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체육관은 잠시 문을 닫았고, 친구들과 놀던 피시방도 일시적으로 출입이 통제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억지로 다니던 논술학원과 수학학원은 언제부터 갈 수 있냐고 물어볼 정도로 코로나19로 갇힌 일상을 지루하게 보냈습니다. 

온종일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을 위해서 뭔가를 함께하는 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다닐 수 없고, 만날 수 없어서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을 검색했습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명화 그리기'라는 활동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나 풍경화를 스케치된 캔버스 위에 정해진 색을 칠하는 작업입니다. 작은 그림은 하루 만에 끝낼 수 있지만, 제법 큰 그림은 열흘 혹은 보름까지 색칠해야 완성할 수 있습니다.

하기 싫다는 아이들을 설득해서 각자 한 개씩의 그림을 선택해서 주문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적극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그림이 완성되면, 완성도에 따라서 값을 매겨 그림을 사겠다고 제안까지 했습니다. 아이들은 그제야 더는 하기 싫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밀레의 '만종'을 택했습니다
 
밀레의 '만종'을 따라 그렸다.
 밀레의 "만종"을 따라 그렸다.
ⓒ 정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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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택한 그림은 밀레의 '만종'입니다. 유명한 그림 중에서 '만종'이 가장 편안하고 따뜻하게 다가왔습니다. 부부가 밭에서 일을 마치 때,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오늘 하루의 삶을 감사하는 모습이 평온하게 느껴졌습니다. 백화점이나 멋진 가게에서 자주 보는 그림이기도 했습니다. 완성 후 벽에 걸어놓은 걸 상상해 보니, 보는 사람마다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도 생겼습니다. 

주문한 '만종'이 도착했습니다. 하얀 캔버스 위에는 촘촘하게 번호가 새겨진 공간들뿐입니다. 돋보기가 필요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아주 작은 공간과 숫자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상자 속에는 숫자가 표시된 물감들과 크기가 다른 붓이 들어있습니다. 

설명서는 따로 없습니다. 하고 싶을 때, 원하는 곳을 색칠하면 됩니다. 주의할 점은 딱 한 가지입니다. 오른손으로 작업을 하게 된다면, 색칠한 물감이 번지거나 손에 묻지 않도록 왼쪽부터 시작해서 오른쪽으로 끝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감과 붓의 상태를 확인하고 곧바로 색칠을 시작했습니다.

물감으로 색칠을 해 본 기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 어느 미술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물감에서 페인트 냄새와 비슷한 기름 냄새가 풍깁니다. 손에 쥔 붓에서는 잊고 있던 연필 냄새도 납니다. 반갑고 익숙한 향기는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을 만들었습니다. 

저녁에 아이들이 각자의 책상에서 인터넷 강의로 공부를 시작하면, 거실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작업은 밑그림의 작은 공간마다 다른 색을 칠하는 것입니다. 얇고 작은 붓끝이 경계선을 넘지 않도록 손에 힘을 주고, 허리는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색을 칠하는 곳마다 물감의 농도를 비교적 같게 칠해야 합니다.

한석봉을 위해서 떡을 썰던 어머니의 심정으로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너희가 공부하는 동안, 아버지는 그림을 그릴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자세와 쓰지 않던 근육을 움직여야만 합니다. 시작하고 30분이 지날 때부터 손목과 허리가 아파져 옵니다. 곧 나아질 것이라고 여기며 저녁마다 계속 그렸습니다.

손목의 아픔과 허리의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하루 1시간밖에 못하던 작업시간은 3시간을 30분처럼 몰두합니다. 처음, 색을 칠할 때의 마음은 내가 완성한 '만종'을 보면서, 아무도 '만종'인지를 모를 정도로 다른 그림이 되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불안함입니다. 작품을 사진으로 찍는 게 아니라면 색칠만으로 명작의 이미지를 낼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의심을 품고 매일 그렸습니다.

그림에 색이 입혀질 때마다, 명화 속 장면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캔버스 위에 쓰인 숫자를 따라서 물감을 칠했을 뿐인데, 그림은 하나씩 하나씩 '만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때부터 작업의 속도가 빨라집니다. 정해진 시간 이외의 자투리 시간에도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립니다. 

늦은 밤까지 그리기도 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작업하기도 합니다. 색칠하기가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내 손으로 명화를 그려서 완성했다는 성취감이 원인입니다. 여기에 가끔 튀어나오는 주체할 수 없는 급한 성질이 완성품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을 재촉합니다.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었습니다
 
밀레의 '만종'을 따라 그렸다.
 밀레의 "만종"을 따라 그렸다.
ⓒ 정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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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그리기 때문에 집중력이 살아났습니다. 매일 2~3시간씩 공간과 틈새에 색을 칠하고, 경계와 선을 넘지 않게 칠하는 작업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던 집중력을 발휘하게 했습니다. 몰입의 즐거움도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무언가에 몰입하거나 집중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짧은 희열과 기쁨을 그리기를 통해서 경험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었습니다. 한두 번 정도는 이걸 왜 하고 있냐는 푸념을 자신에게 하기도 했지만, 아빠의 모습을 보고 있는 아이들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완성되어가는 그림을 보면서 아이들에게 성실한 아빠, 모범적인 아빠의 모습을 보일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아이들이 아빠의 끈기와 성실함을 보면서, 자신들의 생활을 점검해 보기를 바랐습니다. 불을 끄고 떡을 썰던 한석봉의 어머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시작한 그림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완성입니다. 제가 그린 그림은 우리 집 거실 한쪽에 걸려있습니다. 놀러 오는 사람들은 아무도 나에게 이 그림에 관해서 묻지 않습니다. 인사동 어느 가게에서 사 온 짝퉁 명화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림을 볼 때마다 내가 직접 그렸다는 감격과 성취감에 혼자서 웃습니다. '만종'처럼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태그:#그림 그리기, #자녀교육, #코로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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