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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은 소소한 탐식을 통해 일상의 고단함과 노곤함을 이겨냅니다. 고독한 방구석 연주자인 임승수 작가는 피아노 연주를 통해 얻는 소소한 깨달음과 지적 유희를 유쾌한 필치로 전달합니다.[편집자말]
내 기억이 맞는다면 1989년, 그러니까 한창 작곡가를 꿈꾸던 중학교 3학년 시절 일이다. 그날도 작곡을 배우러 선생님 댁을 방문했다. 프랑스에서 작곡을 공부한 분이었는데, 종종 프랑스의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에 대해 얘기해주며 그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표하곤 했다. 마침 뭔가 기분이 좋으셨는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해 올리비에 메시앙의 곡을 들려주셨다.

참고로 올리비에 메시앙은 1908년에 태어나 1992년에 사망한 20세기 인물이다. 이 시기 클래식 음악 작곡가의 곡이 대체로 그렇듯이 메시앙의 곡은 굉장히 복잡하고 난해해서, 종잡을 수 없는 리듬과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한 불협화음으로 점철되어 있다.

음악을 들으면 색깔이 보인다?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세계적인 작곡가라는데 당시의 나(그리고, 지금의 나)는 이 소음을 듣고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건지 진심으로 난감했다(하다). 다만 제자를 위해 정성스럽게 연주하는 작곡가 선생님께 실망을 드리고 싶지 않아, 있는 힘껏 건반을 응시하며 공감하는 듯 연기를 했다.

"승수야. 올리비에 메시앙의 곡은 어떠니?"
"뭔가 분위기가 독특한데, 제가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운 곡 같아요."

"그렇구나. 올리비에 메시앙은 매우 뛰어난 작곡가인데, 색청色聽이라는 능력이 있었단다."
"색청이요?"

"그래. 음악을 들으면 색깔이 보였다고 하더구나."
"정말요? 저는 그런 경험이 한 번도 없는데요?"

"워낙 뛰어난 작곡가라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게 어쩌면 당연하겠지."


음악을 들으면 색깔이 보인다고? 작곡가의 꿈을 키워나가던 사춘기의 중학교 3학년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작곡 레슨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내내 '색청'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음악을 들었을 때 색깔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올리비에 메시앙 같은 세계적인 작곡가가 되기는 글러 먹은 것인가? 내가 음악을 너무 건성으로 들어서 색이 안 보였나? 전심전력으로 들어볼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꺼내 들었다. 칼 뵘이 지휘하고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브람스 교향곡 3번. 카세트에 넣고 1악장 시작 부분으로 되감은 후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곧 음악이 시작되었고, 눈꺼풀 근육을 최대한 긴장시켜 있는 힘껏 눈을 감았다. 안구로 유입되는 빛을 차단해야 순수하게 음악으로 야기되는 색깔을 포착할 수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흘러나오는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모조리 악보에 옮겨적을 듯한 기세로 있는 힘껏 들었지만, 꽉 감은 눈에는 그저 암흑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아직도 고막에 진정성이 부족한 것인가? 좀 더 집중하자. 40만 원짜리 VIP 좌석을 구매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을 듣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기어를 더욱 올렸다. 그리고, 이내 잠이 들었다.

깨어나니 3악장인가 4악장인가, 아무튼 한참 뒷부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집중해도 색깔 쪼가리조차 발견하지 못한 나는 적지 않게 실망했지만, 곧 평상심을 회복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음악을 듣고 색이 보인다고 해도 그런 능력이 실제로 작곡하는 일과는 무관하지 않을까? 소리와 색은 별개의 감각인데 말이야. 딱히 부러워할 필요 없는 것 아닐까?

나의 그런 기대나 예상과 달리 메시앙은 색청을 작곡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메시앙의 인터뷰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아무도 내 얘기를 믿지 않아서 거의 말한 적이 없는데, 당신이 물어봐 주는군요. 저는 음악을 들으면 그에 상응하는 색이 보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여섯 번째 감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소수만이 그걸 발견하죠. 저는 스무 살 때 화가 친구의 집에서 이 병을 발견했어요. 저는 제 곡에 이 색들을 넣으려고 노력합니다. 저에게 보이는 것과 동일한 색을 보라고 연주자에게 요구하는 건 아니에요. 어쨌든 그건 불가능하거든요. 단지 각자의 방식대로 색깔을 봤으면 하는 거죠.
 
아래의 메시앙 곡 악보를 보면 violet, rouge, orange 등 특정 색을 지칭하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메시앙은 자신이 악보에 써넣은 색깔을 보았던 듯하다.
 
violet, rouge, orange 등 특정 색을 지칭하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다.
▲ 올리비에 메시앙 <새의 카탈로그> 악보 violet, rouge, orange 등 특정 색을 지칭하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다.
ⓒ musicandprac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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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사춘기의 열정, 중학교 3학년의 서푼짜리 진정성은 그 유효기간이 짧다. 브람스 교향곡을 들으며 기어이 색깔을 보겠다고 개그콘서트에나 나올 짓을 하더니, 몇 달 지나지 않아 작곡가가 되겠다는 꿈은 포기하고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으니까.

다시 만난 색청의 기억

그렇게 올리비에 메시앙이니 색청이니 하는 것들은 내 삶과 무관해지는가 싶었는데,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약 20년 후 뇌과학 분야에 관심이 생겨 우연히 읽게 된 올리버 색스의 <뮤지코필리아>를 통해서다. 이 책에서 저자 올리버 색스는 다양한 임상 경험을 토대로 뇌와 음악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는데, 제14장 '청명한 녹색을 띤 조성: 공감각과 음악'에서는 올리비에 메시앙처럼 음악을 듣고 색깔을 보는 사례들이 나오는 것 아닌가!

예컨대 현대 음악 작곡가 마이클 토키는 어릴 때부터 조성에 따라 특정한 색이 보이는 조성 공감각을 경험했다. 그 색깔은 한결같았고 자발적이어서 억지로 다른 색을 떠올리려고 해도 바꿀 수 없었다. 게다가 매우 구체적이어서 가령 사단조는 그냥 '노란색'이 아니라 '등황색', 라단조는 '부싯돌 같은 흑연색', 바단조는 '흙이나 재 같은 색'이었다. 어린 시절 선생님에게 라장조는 파란색이라고 했다가 당황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는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공감각을 가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과연 소리를 듣고 어떤 방식으로 색이 보인다는 것일까? 마이클 토키에게는 색깔이 자기 앞에서 '스크린처럼' 투명하고 밝게 빛나는데, 눈을 통해 보이는 색들과는 섞이지 않는다고 한다. 노란색 벽을 쳐다보면서 파란색을 연상시키는 곡을 듣더라도 두 색이 섞여 녹색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가 공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색은 순전히 내적인 성격의 것이어서 외부의 색과 섞일 염려가 전혀 없지만, 주관적이긴 해도 너무 강렬해서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색청 증상이 있다고 해서 모두 동일한 색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작곡가 데이비드 콜드웰도 색청이지만 같은 음악을 듣더라도 앞서 언급한 토키의 사례와는 다른 색깔이 보인다. 심지어는 색깔만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감각을 동반하는 경우도 있다.

취리히 대학의 지안 벨리, 마히엘라 에슬렌, 루츠 얀케는 음악-색깔 공감각과 음악-맛 공감각을 동시에 소유한 어떤 음악가의 사례를 연구했는데, 그 음악가는 특정한 음정을 들을 때마다 해당 음정과 연관된 맛을 느낀다. 소리를 듣고 맛이 느껴지다니! 잘만 활용하면 칼로리 걱정 없이 식도락을 즐길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이 아닌가. 지금의 나에겐 색청보다 훨씬 탐나는 능력이다.

극히 소수이긴 하지만 이런 공감각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색청의 경우, 청각을 담당하는 대뇌피질과 시각을 담당하는 대뇌피질이 동시에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얘기인지 차근차근 살펴보자.

우리가 소리를 듣는다는 행위의 본질은 무엇일까? 일단 나를 둘러싼 공기의 압력 변화가 존재하고 그로 인해 귓속 고막이 진동하면, 청각 세포가 그 진동을 포착해 전기신호로 변환한다. 이 전기신호는 신경계통을 통해 청각을 담당하는 대뇌피질(측두엽)로 전해지며, 측두엽 뇌세포들의 활동을 통해 우리가 '소리'라고 느끼는 이미지로 재현된다.
 
측두엽 뇌세포들의 활동을 통해 우리가 ‘소리’라고 느끼는 이미지가 생성된다.
▲ 청각 이미지 생성과정 측두엽 뇌세포들의 활동을 통해 우리가 ‘소리’라고 느끼는 이미지가 생성된다.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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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일반적인 경우인데, 색청 증상을 지닌 공감각자는 청각을 담당하는 대뇌피질(측두엽)과 시각을 담당하는 대뇌피질(후두엽) 뇌세포 사이의 연결이 강해 측두엽으로 흘러온 전기신호가 후두엽까지 전해진다. 원래 후두엽에는 안구에서 포착된 빛이 시각세포에 의해 전기신호로 변환되어 흘러들어오는데, 후두엽 뇌세포들은 해당 전기신호를 토대로 '색깔' 이미지를 생성한다.

그런데 색청 증상을 지닌 사람의 경우 측두엽의 전기가 후두엽까지 전해지니, 마치 안구에 빛이 감지된 것처럼 후두엽이 해당 전기신호에 반응해 색깔을 생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소리를 듣고 맛이 느껴지는 공감각의 경우는 어떤 상황일까? 측두엽의 전기신호가 맛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으로까지 새어나간 것이다.

대단한 능력인 줄 알았는데... 허망하다
 
색청 증상을 지닌 공감각자는 측두엽과 후두엽 뇌세포 사이의 연결이 강해 측두엽으로 흘러온 전기신호가 후두엽까지 전해진다.
▲ 측두엽과 후두엽 색청 증상을 지닌 공감각자는 측두엽과 후두엽 뇌세포 사이의 연결이 강해 측두엽으로 흘러온 전기신호가 후두엽까지 전해진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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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각 현상이 뇌 속 누전 현상 때문임을 깨닫자마자, 1989년의 그 개그콘서트 같았던 경험과 올리비에 메시앙이 떠올랐다. 뭔가 대단한 능력이라고 여겼던 색청이, 고작 옆통수(측두엽)에서 뒤통수(후두엽)로 전기가 새어 나가 발생하는 현상이라니! 이렇게 허망한 이유였단 말인가.

똑같은 음악을 듣더라도 색청 증상자마다 다른 색깔이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사람마다 뇌 속 누전 경로가 제각각이라 후두엽에서 활성화되는 영역이 다르고, 그 결과 보이는 색깔도 다른 것 아니겠는가.

자기공명영상(fMRI) 장치로 공감각자의 뇌를 관찰하면, 그들이 말소리나 음악을 듣고 색깔이 떠오를 때 실제로 시각을 담당하는 대뇌피질(특히 색을 처리하는 부위)이 활성화됨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현상의 원인은 서로 다른 기능을 담당하는 뇌 부위들 사이에 뇌세포의 연결이 과도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연결 경로를 통해 전기신호가 새는 것이다.

이런 '과도한 연결성'은 영장류나 몇몇 포유류의 태아와 영아 때 나타나지만, 생후 몇 주 혹은 몇 달이 지나면 대뇌피질이 성숙하면서 감각의 명확한 구별과 분화로 이어지는 게 일반적인 발달 과정이다. 하지만 몇몇은 타고난 유전적 특이성으로 인해 발달 초기의 과도한 연결성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아 계속 공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공감각 증상을 병이나 장애로 여길 필요는 없다. 일상생활에 불편을 느끼지 않으며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도 별다른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으니 지금까지 해당 유전자가 멀쩡히 살아남은 것 아니겠는가. 키가 큰 사람이 있다면 작은 사람도 있듯이, 공기의 울림이라는 자연 현상을 포착했을 때 그게 청각뿐만 아니라 시각적 형태로도 번역되는 사람이 존재할 뿐이다.

다만 내가 색청의 이러한 뇌과학적 근원을 이해했다고 해서 갑자기 올리비에 메시앙의 음악이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 복잡한 리듬과 난해한 불협화음을 감지했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 그리고 감동과 쾌감을 생성하는 뇌 영역의 연결성이 현재로서는 매우 낮으니 말이다.

수백 번 반복 청취하며 메시앙 끝내준다고 되뇌면, 그 결과 새로운 뇌세포 연결이 생성되어 생리학적 차원에서 감동과 쾌감을 느끼게 될까? 그런 식으로 기괴한 현대 음악이 좋아진다 한들, 반복된 고통에 익숙해져 쾌감을 느끼는 상황과 무엇이 다를까 싶기도 하다.

태그:#임승수, #올리비에 메시앙, #색청, #공감각자, #현대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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