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30 11:55최종 업데이트 21.11.30 11:55
  • 본문듣기
지금 문화재청에서는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을 교체하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영정을 그린 화가가 친일파 장우성(1912~2005)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언론 기사를 보면, 장우성이 억울한 친일 몰이를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인터넷에 27일 실린 <조선일보> 기사인 '[단독] 결론도 안 났는데··· 표준영정 1호 이순신 영정, 교체 작업 착수'는 월전 장우성을 친일파로 규정할 근거가 빈약하다고 주장한다.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선전·鮮展) 수상 경력이 그 근거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인터넷에 11월 27일자로 실린 <조선일보> '[단독] 결론도 안 났는데··· 표준영정 1호 이순신 영정, 교체 작업 착수'. ⓒ 조선일보

 
억울한 친일 몰이? 

이 기사는 "일제강점기 관제 성격의 조선미술전람회와 반도총후미술전에 출품했다는 이유로 민족문제연구소 등 특정 단체로부터 지속적인 공박을 받아왔고, 지난 2019년 더불어민주당 김영주 의원에 의해 문제가 다시 점화됐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월전 유족 측은 '선전은 조선의 모든 미술학도는 물론 일본인에게도 화가 입문의 유일한 통로였다'며 적극 반박에 나섰다"고 한 뒤 "월전 유족 측은 '친일의 근거가 빈약하니 대신 복식 고증을 트집 잡아 교체할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고 말한다.

29일자 <한국경제> 사설 '충무공 영정에까지 반일몰이, 이성적 사회인가'도 비슷한 논지를 담고 있다. 이 사설은 "월전은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 등에 작품을 출품해 상을 받았다는 이유로 친일 공격에 시달렸다"며 장우성이 친일파가 아닌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강점기를 살았다는 것 자체가 비난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일제의 불량한 조선인 낙인과 핍박을 피하기 위해 당시 조선인 80%가 성을 바꿨고 10%는 개명했다. 이런 사람들을 모두 친일로 몰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장우성이 친일파로 규정된 것은 단순히 일제강점기의 수상 경력 때문이 아니다. 일제강점기를 살았거나 창씨개명을 했기 때문은 더욱 더 아니다. <조선일보>와 <한국경제> 기사를 보면, 그가 대수롭지 않은 이유 때문에 친일파로 몰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일제 침략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발행된 1944년 6월 19일자 <매일신보> 기사 '선전(鮮展) 새 추천(推薦), 장우성 씨로 결정'은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이번 부내(府內, '시내'의 의미) 종로구 성북정 203번지의 장우성 씨를 영예의 추천자로 결정·발표하였다"고 보도했다.

그런 뒤 "장씨는 이번에도 기원(祈願)이라는 작품을 내여 제1부 동양화에서 특선이 되었는데, 이로서 연속하야 4회나 특선의 영예를 차지하엿슴으로 전람회 추천내규 제2조 제1항 즉 '연속 4회 특선된 때는 추천으로 한다'는 규정에 따라 이번 영예의 추천을 바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장우성이 친일파로 불리는 것은 '영예의 4연속 특선'으로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 아니다. 친일파로 불릴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작품 활동 혹은 공개 활동을 통해 제국주의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상당히 적극적으로 찬양했기 때문이다.

일제 적극 찬양의 흔적

3연속 수상을 할 때인 1943년이었다. 그해 6월 15일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제22회 선전 수상식 때, 만 31세의 장우성은 식민지 한국인으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행보를 남겼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은 "심사위원장인 정무총감을 대리해 학무국장 오노가 주도한 시상식장에는 조선미전의 참여작가와 추천작가를 비롯하여 30여 명의 수상자가 참석했다"고 한 뒤 "상장과 상금 시상이 끝난 뒤 장우성이 답사를 했다"면서 "조선인 수상자로는 최초의 답사였다"고 말한다.

위 사전에 따르면, 그해 6월 16일자 <매일신보>는 "결전하(決戰下) 예술가의 두 어깨에 지워진 임무가 중대함을 강조하는 열렬한 인사를 하자, 일동을 대표하여 동양화의 장우성 화백은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총후(銃後) 국민예술 건설에 심혼을 경주하여 매진할 것을 굳게 맹세하는 답사를 한 후 1시 40분경에 이 수상식은 끝났다"고 보도했다.

결전의 의지를 다지는 전시 하의 조선총독부가 고도의 영예를 부여하고 식민지 한국 사회가 주목하는 시상식에서 '후방 국민예술 건설을 위해 마음과 영혼을 경주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비상시국에 그런 자리에서 그런 발언을 하면 사회적 파급력이 클 것이라는 점을 31세의 3연속 수상자가 몰랐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는 1944년 3월에는 결전(決戰)미술전에 작품을 제출했다. '결전'이란 단어는 이 행사의 취지를 농후하게 드러낸다. 결전미술전은 이토 히로부미가 만든 통감부 기관지를 모체로 하는 경성일보사가 주최했다. 또 조선군(주조선 일본군)과 총독부는 물론이고 전시 총동원 기구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이 후원을 했다. 예술의 외피를 쓴 군국주의 정치 행사였던 것이다.

장우성은 이 같은 결전미술전에 '항마'를 출품해 입선했다. 작품 제목에 쓰인 '마귀'는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미국·영국 같은 연합국 진영을 가리켰다. 위 사전은 "결전미술전에 입선한 '항마'는 '악마를 굴복시키는 날카로운 검'이란 뜻의 국민가요 '항마의 이검(降魔の利劍)과 주제가 일치하며, 악마는 귀축미영(鬼畜米英) 즉 연합군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일제 찬양 작품을 제출하려다가 포기한 적도 있었다. 위 사전은 "1942년 11월 반도총후미술전람회에 불화(佛畵) '부동명왕(不動明王)'을 응모하려 했으나 운반 도중 비에 젖어 포기했다고 밝힌 바 있다"며 "부동명왕이 1930년대에 광범위하게 숭배되었던 일본 군국주의의 호국불이라는 점에서 전시회의 성격과 부합한다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장우성은 친일파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행적을 스스로 남겼다. 대중적 파급력이 있는 공식 석상에서 침략전쟁을 미화했을 뿐 아니라 일제를 찬양하는 그림을 출품해 상을 받았다. 또 그런 그림을 내려다가 악천후 때문에 실패한 적도 있었다.

해방 후엔 이순신·유관순·윤봉길 그려

그런 친일파가 해방 뒤에는 정반대의 그림을 그렸다. 인물화에 뛰어난 능력을 보인 그는 하필이면 반일이나 항일과 관련된 영정들을 많이 그렸다. 이순신을 비롯해 임진왜란 의병장인 사명대사, 임진왜란 행주대첩의 권율, 임진왜란 진주대첩의 김시민, 3·1운동의 유관순,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의 윤봉길 등이 그의 붓 끝을 통해 화폭에 담겨졌다.

"총후 국민예술 건설에 심혼을 경주"한 그였다. 일왕(천황)에게 바쳤던 그 마음과 그 영혼으로 반일 혹은 항일 인물들의 영정을 대거 남겼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순신을 그리고, 권율을 그리고, 유관순을 그리고, 윤봉길을 그렸을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들이 위인전 등을 통해 어릴 적부터 많이 접한 항일 영웅들의 그림에 장우성의 손과 장우성의 혼이 담겼으리라는 생각을 하면 섬뜩해질 수도 있다. 그의 때가 묻은 이순신 영정을 이제라도 하루빨리 교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조선일보> 등이 장우성 옹호론을 펴는 것은 친일청산을 거역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의 친일 영혼이 인물화에만 스며든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국회에도 영향을 줬다. 1982년 1월 22일자 <경향신문> '유쾌한 인생과 멋을 화폭에··· 월전 장우성 화백'은 "그는 지금까지 모두 1만여 점의 작품을 내놓았다"며 "이 많은 작품 중에서도 그가 각별히 애착을 갖는 몇 점의 작품이 있다"고 소개한다.

그중 하나가 이순신 영정이고 또 하나가 백두산 천지 그림이다. 기사는 "그가 75년도에 선보인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백두산천지도'는 우리나라 회화사에 길이 남을 기념물임에 틀림없다"며 "이곳을 찾는 모든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그리고 무엇인가를 생각게 한다"고 말한다. 친일 화가의 숨결이 우리 사회 곳곳에 얼마나 깊이 배어 있었는지를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장우성은 일제강점기의 행적에 대한 추호의 반성도 없이 1982년 현재 1만여 점의 작품을 생산해내면서 한국 예술에 영향을 끼쳤다. 또 사회적 활동도 왕성했다. 1946년에 서울대 예술학부 교수가 됐고, 1970년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고, 1971년에 홍익대 미술학부 교수가 됐다.

일제강점기 때뿐 아니라 대한민국에서도 상훈을 많이 받았다. 1960년에 대한민국 홍조소성훈장, 1971년에 예술원상, 1974년에 홍조근정훈장, 1976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장, 1984년에 5·16 민족상, 2001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 금관장을 받았다. 장우성의 흔적을 소각하는 일이 매우 시급하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