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대본영은 '8일 새벽을 기해 서태평양의 미군과 영국군을 상태로 전투상태에 돌입'하였음을 발표하였다.
▲ 1941년 12월 8일, 개전을 발표하는 대본영 관계자들 대본영은 "8일 새벽을 기해 서태평양의 미군과 영국군을 상태로 전투상태에 돌입"하였음을 발표하였다.
ⓒ 위키피디아퍼블릭도메인

관련사진보기

 
12월 8일이 되면 제국 일본이 미국과 영국 등의 연합국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한 지 80년을 맞게 된다. 1941년의 그날, 일본군은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말레이 반도를 침공하고 미 태평양 함대의 심장부인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했다. 이미 만주와 몽골, 중국 대륙에서 연출되고 있던 피투성이 비극은 이날의 개전을 기점으로 아시아와 태평양 전역으로 확대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이 전쟁으로 인해 파멸적 패망을 겪었다. 310만의 국민이 목숨을 잃었고, 역사상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외국 군대의 점령을 겪었다. 제국의 폐허 위에는 점령군의 의도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질서가 세워졌다.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모든 영역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이 전쟁의 결과로부터 전전(戦前), 전후(戦後)라는 역사 구분은 자연스럽게 보편화됐다.

이렇듯, 일본사 위에서 1941년 12월 8일의 개전이 갖는 함의가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전쟁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대동아 전쟁' 고집하는 사람들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는 그때의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피해국들을 향해 사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무라야마 담화). 이후의 내각들 역시 공식적으로는 무라야마 담화의 입장 계승을 표방해왔다.

그러나 주요 정치 지도자들의 역사 인식을 둘러싼 잡음은 끊이지 않고 있다. 2019년 9월 17일 아소 다로(麻生太郎) 부총리가 자위대 관계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대동아 전쟁'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구설수에 올랐던 것은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대동아 전쟁은 1941년 12월의 개전이 아시아의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내포된 호칭이다.

주요 정치 지도자가 '대동아 전쟁'을 입에 올릴 수 있었던 것. 해당 인물 개인의 말실수로 치부하기에는, 여전히 많은 대중이 '대동아 전쟁'이라는 표현에 공감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태평양 전쟁' 내지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라는 칭호가 일본 사회에 비교적 잘 정착돼 있는 건 사실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15년 전쟁'이라는 칭호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15년 전쟁'에는 만주사변부터 패전에 이르는 15년의 기간동안 제국 일본에 의한 일관된 침략전쟁이 이어졌던 사실을 분명히 하는 반성적 의미가 담겨있다.
  
'대동아 전쟁'은 미국과 영국 등을 상대로 한 1941년 12월의 개전이 아시아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표기이다.
▲ 해상자위대 구레사료관의 "대동아 전쟁" 표기  "대동아 전쟁"은 미국과 영국 등을 상대로 한 1941년 12월의 개전이 아시아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표기이다.
ⓒ 박광홍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대동아 전쟁의 그림자는 여전히 짙어 보인다. 대동아 전쟁 표기를 고집하는 출판물들은 계속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심지어는 자위대 시설에서마저 대동아 전쟁이라는 표기가 당당히 방문객을 맞이한다. 일본인이 강요당하고 있는 '자학사관' 극복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는 '일본회의'(日本会議)와 같은 조직에게 있어서도, 대동아 전쟁은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칭호다.

그렇다면, 이토록 견고한 대동아 전쟁의 신화는 어떻게 빚어지게 된 것일까. 그 시작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1941년 12월의 개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산되어야 할 신화

제국 일본이 1941년 12월에 전쟁을 시작한 배경에는, 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가 일본을 포위해 고사시키려 한다는 ABCD포위망(A: America/미국, B: Britain/영국, China/중국, Dutch/네덜란드) 위협론이 있었다. 즉, 동남아시아에 이권을 보유하고 있는 열강들이 중국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들을 점령함으로써 서구열강의 대중국원조 루트를 차단하고 나아가 동남아의 천연자원들을 확보하여 궁극적으로는 중일전쟁에서 승리하자는 발상이었다.

중일전쟁이 본격화하고 미국의 금수조치가 내려지면서 더 이상의 전쟁수행이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물자부족에 빠진 일본에게 남은 선택지는 중일전쟁의 포기 혹은 ABCD포위망 돌파 뿐이었다. 이미 중국전선의 감당조차 버거운 상황에서 서구열강에 대한 개전은 결코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그러나 육군은 군사정변까지 거론하며 완강하게 중국전선에서의 철군을 거부했다. 내각은 폭주하는 군부를 제어할 힘이 없었고, 해군은 바다를 주전장으로 하는 새로운 전쟁을 기회로 보았다. 말도 안되었던 전쟁은 그렇게 거짓말처럼 시작됐다(관련기사: 일본이 풀어야 할 괴로운 '근본 질문').

즉, 1941년 12월에 제국 일본이 서구 열강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한 것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를 빼앗아 그 자원을 바탕으로 중국 침략을 성공시키고자 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제국 일본은 '서구 열강을 축출하고 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성전'이라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워 침략의 야욕을 숨기고 개전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1941년 12월 10일, 제국 일본의 전쟁지도부에서는 이 전쟁의 칭호를 '대동아 전쟁'으로 공식 결정했다. 이 날은 일본 해군이 말레이 해전에서 영국 해군을 격파한 날이기도 했다. 최신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필두로 구성된 영국해군 Z기동함대는 일본해군의 공습을 얻어맞고 무력하게 말레이 바다에 수장됐다.

일본군은 <영국동양함대 궤멸>이라는 군가까지 급조해 배포하며 말레이 해전의 승전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제국주의 침략을 거듭하며 아시아 각국을 수탈했던 영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은, 일본이 주장하는 아시아 해방의 대의를 뽐내기에 좋은 소재였다. 이틀 뒤인 12일, 제국 일본은 '대동아 신질서 건설'을 전쟁의 목적으로 공식 표방했다.
 
서구 열강이 일본군에 의해 축출되는 모습은 아시아 각국의 민중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개전 초기, 일본군은 이들로부터 해방군으로 환영받았다.
▲ 싱가포르 함락 후 일본군의 포로가 되는 영국군 수비대 서구 열강이 일본군에 의해 축출되는 모습은 아시아 각국의 민중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개전 초기, 일본군은 이들로부터 해방군으로 환영받았다.

관련사진보기

 
서구 열강의 통치를 받아왔던 아시아 각국의 민중들은, 그동안 자신들을 수탈해왔던 백인 지배자들이 일본군에 의해 무력하게 축출되는 광경을 보고 환호했다. 연합군의 뒤를 쫓아 진격하던 일본군 장병들은 지역 주민들로부터 과일이나 토산품 등을 선물로 받으며 해방군 대접을 받았다. 네덜란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던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던 인도의 찬드라 보세 등 피식민통치국의 지도자들은 제국 일본이 내세운 대동아 신질서 건설을 지지하며 일본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그러나, 구호에 불과했던 아시아 해방의 대의는 금세 모순을 드러냈다. 대본영의 참모들은 '실적을 보고 완화정책을 검토할 수 있겠지만, 처음에는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군의 위엄을 인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점령지에서의 강압 정책을 주장했다. 이에 따라 싱가포르에서는 '게릴라 소탕'이라는 명목으로 수천 명의 화교가 학살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바에서 선정을 펼치며 인도네시아인들의 호감을 얻던 제16군 사령관 이마무라 히토시(今村均) 중장은 군 중앙부와 동료들로부터 강도 높은 질타를 받았다. 이마무라 히토시 사령관의 평전을 쓴 츠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작가는 당시 이마무라 사령관에게 쏟아진 비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이마무라 군정 치하의 인도네시아에서는) 일본과 일본군에 대한 위엄이 조금도 서지 않는다. 백인들은 자신들이 패배했다는 자각조차 없이 행동하고 있다. 역시, 싱가포르 군정과 같이 일본군의 위엄을 인식시키는 것이야 말로 유색인종들로 하여금 우리를 신뢰하게 하는 방도이다." - 츠노다 후사코, 1987, <책임, 라바울의 장군 이마무라 히토시>, 신조문고, 281p
 
이마무라 사령관을 향한 비난 속에는, 일본군이 자신들의 통치 아래 놓인 아시아 각 지역의 민중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일본군은 해방군이라는 간판을 걸고서 아시아 각 지역으로 진주했지만, 그들이 현지 주민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기존의 서구 제국주의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던 것이다. 인종차별적 우월감과 수탈 야욕으로 가득 차 있던 그들에게 있어 '대동아 신질서 건설' 따위는 그저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의 약탈에 분노한 필리핀인들은 일본군에 대한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항일 게릴라의 출현에 무자비한 소탕전으로 보복했다.
▲ 미군에 의해 조직된 필리핀의 항일 게릴라 일본군의 약탈에 분노한 필리핀인들은 일본군에 대한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항일 게릴라의 출현에 무자비한 소탕전으로 보복했다.
ⓒ 위키피디아퍼블릭도메인

관련사진보기

 
아시아 민중에 대한 폭력은 전황의 악화와 함께 더욱 노골화됐다. 본국으로부터 보급이 끊긴 각 지역의 일본군 부대들은 식량 확보를 위해 지역 주민들을 약탈했다. 일본군의 약탈에 시달리게 된 지역 주민들 사이에는 항일 게릴라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가혹한 게릴라 소탕전은 더욱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도쿄대학 츠루미 슌스케(鶴見俊輔) 교수는 폭력과 저항으로 점철된 일본군과 지역 주민들의 관계 문제를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일본인은 패전 후, 63만 명의 일본군 병사가 필리핀으로 보내져 48만명 이 그곳에서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이 그렇게 회상하는 때, 그 전쟁에서 거의 100만 명의 필리핀인이 사망한 것은 무시되고 있다." - 츠루미 슌스케, 1982, <전시기 일본의 정신사>, 이와나미 서점, 73p
 
'대동아 전쟁'의 신화가 청산돼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침략적 의도로 강행된 아시아 태평양 전쟁은 아시아 각국 민중들에게, 그리고 일본 국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때의 전쟁이 진정으로 아시아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역사를 비틀어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이들 사이로 대동아 전쟁은 여전히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