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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학살당한 민간인 매장지에서 나온 구슬(사진 하단). 당시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었다. (사진: 오마이뉴스 심규상)
 한국전쟁기 학살당한 민간인 매장지에서 나온 구슬(사진 하단). 당시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었다. (사진: 오마이뉴스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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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역 플랫폼에는 찬바람이 휘돌자 승객들은 외투를 여미었다. 2월 찬공기에 모두 발을 동동거리며 기차를 기다리는데 한 청년이 군복만 입고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었다. 잠시 후 기차가 도착하자 승객들은 승차를 시작했고 청년은 맨 마지막에 올라탔다. 객차에 좌석이 많았지만 청년은 통로에 쪼그려 앉았다. 기차표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차장이 표 검사를 시작하자 청년 류재광(집나이 21세)은 옆 객차로 옮겨갔다. 그렇게 객차 옮기기를 반복하다 제일 끝 객차 앞에서 멈췄다. 그는 객차로 들어가지 않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를 알아챈 차장이 화장실 문을 계속 두드렸지만 류재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4시간 만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류재광은 흐리멍텅한 눈으로 부산역 주변을 배회했다. 주머니에는 땡전 한 푼 없었다. 식당 앞에 말없이 수십 분을 서있으면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가 돼지국밥을 줬다. 부산에서 떠돌던 그는 어느덧 통영까지 흘러갔다.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류재광을 불러 세운 이는 헌병이었다. 논산훈련소에서 무단탈영한 지 20일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정신질환이었다. 류재광은 부산에 있는 군병원으로 이송됐다. 군병원에 있던 7개월 동안 그는 진료보다 폭언과 구타를 당하는 일이 더 많았다. 정신질환에 차도가 없자 류재광은 의가사제대를 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3년째 되는 1956년의 일이었다. 청년 류재광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다섯살 아들까지... 온가족이 몰살당해
 
증언자 류재광
 증언자 류재광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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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경 충남 아산군 탕정면 매곡리 인민위원장이었던 류승열(류재광의 부친)은 잠적했다. 물러갔던 군·경이 되돌아온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러자 탕정지서와 치안대는 류승열 대신 부인 최규옥(1914년생)과 아들 류재선(1934년생), 류재용(1946년생)을 연행했다. 류재용은 집 나이 다섯 살에 불과했다.

최규옥 모자를 포함한 탕정면 매곡리 주민 27명은 탕정지서와 면사무소 창고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10월 24일 탕정면 용두리 비누고개에서 경찰과 치안대원 들에게 학살됐다.

소위 '대살(代殺, 대신 죽임)'이라고 불린 반인권적 전쟁범죄다. 부역자를 처형한다면서 당사자는 없고 남아있는 가족을 대신 죽인 경우였다. 졸지에 고아가 된 열다섯 살 류재광은 외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천안군(현재 천안시) 풍세면 미죽리로 피난을 갔다. 외할머니가 "재광아 잘못하면 너도 죽겠다"며 그를 데려가기도 했다.

류재광은 1956년에 21살의 나이로 입대했다. 논산훈련소 훈련병 시절 숙모가 면회를 왔다. "재광아. 잘 지냈냐?" "...." 류재광이 작은어머니를 보는 순간 6년 전의 상처가 덧났다. 어머니와 형, 동생의 죽음이 떠올랐다. 다음 날부터 정신이상 증세가 왔다. 무단으로 훈련소를 탈영한 류재광은 부산과 통영을 떠돌다가 헌병에게 붙잡혔다. 가족이 몰살당한 전쟁의 상처가 트라우마로 이어진 것이다. 

향나무 앞에서 죽어간 사람들

아산군(현 아산시) 염치면 강청리 주재돈(가명)의 마당에는 매년 가을이면 타작이 벌어졌다. 그 타작은 곡식 타작이 아니라 매타작이었다.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 갔다가 갚지 못한 소작인들이 가을이면 마당 한가운데 향나무에 묶여 매타작을 당했다.

매를 맞은 사람들은 대나무살로 만든 돗자리(대자리)에 맨몸으로 굴러야 했다. 가다듬지 않은 대나무살은 소작인들의 온몸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강청리 소작인, 머슴, 행랑채 사람들의 비명은 곡식이 익어가는 가을 내내 이어졌다. 매를 든 이들은 주로 전주이씨였다.

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이 마을을 점령하자 상황은 역전됐다. 전쟁 전 지주로부터 핍박 받은 소작인, 머슴, 행랑채 사람들은 궐기대회(인민재판의 일종)를 열어 지주들을 폭행했다. 이날 일로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소작인에 대한 지주의 악감정이 만들어졌다. 

악감정은 쫓겨갔던 군경이 되돌아온 후 폭발했다. 전주이씨 청년들 대부분이 치안대에 가입했고 치안대는 부역혐의자들을 붙잡아 들였다. 주재돈의 마당에 끌려온 주민 30명이 매에 맞아 죽었다. 강청리 서기장이었던 김해식(60대)은 향나무 앞에서 타살됐고, 그의 막냇동생 김동철도 인공 시절 염치면 치안대장이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아산시, 『아산 민간인학살 전수조사 보고서』, 2020)

향나무 앞에서 죽임을 당한 이 중에는 김해식의 처와 어머니, 그리고 15세, 12세 된 어린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당의 향나무는 마을 주민들이 재판도 없이 매질로 무참히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외에도 50명의 강청리 주민들이 면소재지 뒷산 방공호에서 죽임을 당했고, 10명의 주민들이 면사무소로 이송되어 처형되었다. 김인환과 70대의 조부, 김인환의 아버지와 어머니, 4, 5살 된 김인환의 아들, 김인환의 동생 3명이 처형됐다. 김인환 일가가 몰살된 것이다.

강청리 학살에서 두드러진 현상은 '어린이 학살'이다. 엄마의 등에 업혀 가는 아기부터 10대 어린이까지 남자는 싹쓸이를 당했다. 이것은 부역혐의자의 가족을 대신 죽인 '대살'일까? 아산군 피해자 실태조사를 벌인 최태육 한반도 통일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염치면 강청리 학살은 대살이 아니라 '표적 학살'입니다. 주민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려고 의도적으로 조직적인 학살을 벌인 거죠"라고 말한다. 경찰과 치안대가 부역혐의자 가족의 씨를 말린 것은 공포감을 조성해 삶의 의지를 꺾어버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시신 수습해준 머슴에게 땅을
 
증언자 하정용
 증언자 하정용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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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가명)야. 내 자식이랑 손주 시신 수습 좀 해다오. 수습만 되면 논 열 닷 마지기(3천 평)를 주마." 하중현은 집안 머슴 신민수에게 사정을 했다. 가족이 몰살당해 시신을 수습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산군 영인면 신운리 하순창(다른이름 하관홍, 1896년생)은 인공 시절 영인면 인민위원장을 맡았다가 온양경찰서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하순창의 아들 하상린은 군·경 수복 후에 부역자 가족이라며 영인지서에 연행됐다. 사고로 다리를 다친 하상린이 걱정이 된 부인 김정순이 그를 부축했다. 김정순의 등에는 젖먹이 하경용(1949년생)이 업혀있었다. 그렇게 하순창 가족 4명은 배방면 공수리에서 학살당했다.

하순창의 아버지 하중현은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 원래 하중현 집안은 영인면과 아산군에서 알아주는 천석지기 갑부였다. 또 자식과 손주인 하순창과 하상린이 서울에서 한약방을 열어 남부러울 게 없었다. 해방 후 하순창과 하상린은 고향으로 내려왔다.

하상린의 차남 하정용(1946년생) 증언에 의하면, 해방 후 하순창은 아산군청에서, 하상린은 영인면사무소에 근무했다. 6.25 전쟁이 터지자 하순창 부자는 부역혐의자로 분류돼 죽임을 당했다. 

하상린·김정순 부부와 하경용의 시신을 수습한 머슴 신민수에게는 약속대로 논 15마지기가 지급됐다. 하지만 살아남은 하준용(1937년생)·하정용 형제는 평생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하정용은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 '빨갱이 자식'이라며 따돌릴 때가 가장 힘들었죠"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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