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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낀40대'는 40대가 된 X세대 시민기자 그룹입니다. 불혹의 나이에도 여전히 흔들리고 애쓰며 사는 지금 40대의 고민을 씁니다. 이번 회에는 '40대의 우정'에 대해 이야기 해 봅니다.[편집자말]
나는 학창시절 친했던 친구들 중 '절친'이라고 할 만한 친구가 없다. 가끔 자신의 절친이라며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있다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신기했다. 절친이 없는 내가 이상한 건가 싶기도 했다.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물론 나에게도 지금까지 연락하는 학창시절 친구는 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 내 속내를 훤하게 드러낸 적은 없다. 친구들은 사는 곳이 멀어지고, 결혼이나 출산 같은 생애주기가 달라지다 연락이 점점 뜸해졌다. 가끔 연락하는 친구들과는 가벼운 안부 인사만 주고받았다. 나의 가정환경에 대해서도, 실패에 대해서도, 우울한 감정에 대해서도 말하지 못했다. 대화하기도 어려웠지만, 동정 받기도 싫었다. 마음을 열기 어려웠다.

절친을 만들기 힘든 체질입니다만
 
어릴적 친구 중 지금까지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어릴적 친구 중 지금까지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 charleingracia,출처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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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썰렁한 관계의 원인은 내 성격에 있었다. 나는 안부전화를 힘들어 하는 성격이었다. 나에게 전화란 할 말이 있을 때만 활용하는 행위였다.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친구가 있다는 뒷담화를 들을 때면 그게 혹시 나는 아닐까 하며 스스로 뜨끔해 했다. 친구가 필요할 때마다 이용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전화 연락을 잘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주면 좋으련만, 왜 이렇게 전화를 안 하느냐는 핀잔을 듣다가 멀어지곤 했다.

내가 안부전화를 힘들어하는 또 다른 이유는 피드백이었다. 안부전화는 일상을 전하면서 피드백을 주고 받아야 한다. 위로든 공감이든. 그런데, 나는 순발력에 좀 약한 편이었다. 힘들어 하는 친구에게 어떻게 위로하고 공감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듣고 있니?"라는 말이 돌아왔다. 위로의 단어를 생각하다 시간도 흘리고 친구의 말도 흘려버리는 것이었다.

반대로 상대방이 위로해준다면서 애써 골라낸 단어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한동안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면서 왕복 출퇴근 4시간을 견디며 살던 때였다. 친구에게 힘들다고 토로했더니 돌아오는 말은 "너 정말 대단하다. 나라면 못 살 텐데"였다. 그 친구의 '대단하다'는 말과 '나라면 못 살 텐데'라는 말이 가슴에 콕 박혀서 떠나지 않았다. 친구는 정말 나를 위로하는 말이었을까? 나는 친구의 마음을 열심히 헤아리다가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다.

몇 번 인생의 고비를 넘기고 나서 내린 결론은 친구가 유지되려면 사는 것이 비슷하고, 라이프스타일도 비슷하며, 고민하는 것도 비슷해야 한다는 것이다. 30대, 40대 인생의 험난한 파도를 거치며 친구는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가끔 주변을 보면 아이들 친구 엄마가 동네 친한 친구로 발전하기도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동네 엄마들하고도 친해지기 힘들었다. 일을 하느라 바빴고, 나이가 많아서였다. 아이들이 또래면 대부분 엄마들의 나이대도 비슷했는데, 나는 늦게 결혼해서 늦게 아이를 낳다보니 어디를 가도 나이가 제일 많았다. 많게는 10살 차이가 나기도 했다.

성격이라도 친화적이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가끔 놀이터에 가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한구석을 지키며 아이들 노는 것을 지켜보다 들어오곤 했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친해지기 힘든 어떤 기류가 내 몸에 흐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서 만든 블로그
 
온라인에서 나는 닉네임으로 불리며,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있었다.
 온라인에서 나는 닉네임으로 불리며,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있었다.
ⓒ Deeezy,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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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한껏 토로하고 울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를 찾기 힘들어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힘들 때 쓰기 시작했으므로 기쁜 이야기보다는 힘든 이야기가 많았다. 온라인 속의 나는 익명이었다. 얼굴과 실명을 밝히지 않고 나의 이야기를 써나갔다.

시시콜콜한 일상에서부터 친구에게 꺼내지 못한 우울한 이야기까지 온라인 공간에 쏟아냈다. 회사 일도 육아도 잘 못하고, 지질하게 사는 일상, 먹고 사는 게 무서워서 왕복 출퇴근 4시간 거리도 마다하지 않던 일상, 더 나아가 어릴 때의 가난한 환경과 젊은 시절의 우울한 기억들이 쏟아졌다. 수려한 글은 아니었다. 문장력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비문이 가득했고, 문법에 맞지 않은 글도 많았다. 그런 나의 글에 사람들이 반응해주었다.

댓글에서 '저도 그래요.', '저만 그런 줄 알았어요'라는 글을 만날 때마다 이 세상에 혼자 뚝 떨어지게 사는 것이 나 혼자만이 아니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이 생계형으로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육아 때문에 힘들어하고, 도와주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힘들어했다. 오프라인 친구와 공유할 수 없는 연대감을 온라인 공간에서 찾은 것이었다.

온라인에서는 닉네임으로 불리며 누구의 엄마가 아닌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었다.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면서도 피드백을 실시간으로 할 필요가 없었다. 나처럼 순발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온라인 공간의 소통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기에 좋았다. 나의 인간관계는 어느새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의 관계가 더 많아졌다.

익명으로 글을 썼지만, 데이터가 쌓이자 나를 알아채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내가 다니는 회사를 알아채기도 했고, 회사 동료 혹은 지인도 있었다. 포털 메인에 올라온 글을 보고 온 동네 엄마도 있었다. 책 <엄마에겐 오프 스위치가 필요해> 출간을 기점으로 익명은 실명이 되었다. 그러면서 온라인으로만 소통하던 사람들을 종종 오프라인으로 만났다.

나는 온라인 글벗을 만나느라 부산을 다녀오기도 했고, 제주도 여행을 갔다가 블로그 이웃을 만나고 오기도 했다. 신기한 건 낯을 가리는 내가 온라인 친구를 만나면 수다를 떨다가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알던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었다.

학창 시절의 친구들은 물리적 공간과 나이라는 통일성을 가지고 맺어진 인연이라면, 온라인 공간에서의 친구들은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책과 글쓰기에 관심이 많거나 육아관이 비슷하거나 재테크에 관심 있거나.

온라인 인연은 대부분 글로 소통하는 사람들이라 내가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았는지, 언제 퇴사를 했는지, 아이를 몇 명 키우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글로 만나는 친구 관계에 익숙해졌다.

글로 만난 이들과 지란지교를 꿈꾸며
 
관심사가 같은 이들끼리 모여 긴 시간동안 인연을 이어가며 친구가 되었다.
 관심사가 같은 이들끼리 모여 긴 시간동안 인연을 이어가며 친구가 되었다.
ⓒ alexisrbrown,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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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장 자주 연락하는 온라인 친구들은 '낀40대' 그룹 시민기자들과 글쓰기 모임, 독서모임 친구들이다. 처음엔 가벼운 모임으로 시작했다가 시간이 쌓이자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글벗이라 칭한다. 대화는 주로 카톡으로 한다. 카톡 대화는 시간 날때, 나중에 읽어도 된다.

가끔 줌으로 온라인 친구를 만나는데, 시간은 보통 주말 새벽이다. 퉁퉁 부은 눈으로 일어나 잠옷을 입고 앉아도 부끄럽지 않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마주하고 앉아 자신의 근황 이야기도 술술 한다. 우리는 글로 일상을 공유하고, 관심사를 공유하며, 고민을 나눈다. 줌으로 만나는 친구들을 보면서, 가끔 학창 시절에 읽던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가 생각나곤 한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학창시절의 인연이 그러했고, 육아기의 인연이 그러하듯, 언젠가 글쓰기 관심이 다른 곳으로 흐르면, 이들과의 인연은 어떻게 될까? 이들과 언젠간 멀어지게 될 수도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 슬퍼지곤 한다. 가끔 이들과 마주한 인연이 슬로우비디오처럼 아주 느리게 흘러간다. 결코 잊지 않겠다는 듯이.

지금의 친구들은 사는 곳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다. 그러나 문학을 사랑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설사 절친이 되지 못하고 멀어진다고 하더라도 이들과 나누었던 향기는 오랫동안 가슴에 남을 것 같다. 이제야 나는 학창시절에 읽던 시를 음미하며, 절친보다 지란지교를 꿈꾼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혜선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longmami) 및 브런치(https://brunch.co.kr/@longmami)에도 실립니다.


40대가 된 X세대입니다. 불혹의 나이에도 여전히 흔들리고, 애쓰며 사는 지금 40대의 고민을 씁니다.
태그:#낀4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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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하면서 프리랜서로 글쓰는 작가. 하루를 이틀처럼 살아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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