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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다케(1852~1919)의 사령장, 위 조선총독 아래 총리대신 (출처 : 伊藤幸司, 日比野利信 <寺?正毅と帝?日本> 勉誠出版、2015年、표지 뒷면)
 데라우치 마사다케(1852~1919)의 사령장, 위 조선총독 아래 총리대신 (출처 : 伊藤幸司, 日比野利信 <寺?正毅と帝?日本> 勉誠出版、2015年、표지 뒷면)
ⓒ 김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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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대신 데라우치도 조슈번 출신이었다. 현재의 야마구치시 출생으로 모계의 양자로 들어가 모친의 성을 따르게 된다. 1864년 소년 데라우치는 다카스기 신사쿠가 이끄는 기병대에 입대하여, 이후 막부를 타도하는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가 만6세이었을 때에 요시다 쇼인은 옥사하지만, 그는 요시다 쇼인을 평생 정신적 지주로 두고 따르려고 했다.

1877년 세이난(西南)전쟁에서 대대장으로 전방부대를 자원하는데, 오른팔 부상을 당한다. 이후, 실전부대를 맡지 못하고, 군정과 군교육 분야에서 경험을 쌓는다.

그는 1902년 조슈번 출신 선배인 가쓰라내각에서 육군대신으로 입각한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한 후, 제2대 한국통감 소네 아라스케(曽根荒助1849∼1910)가 사임한 다음, 1910년 5월 육군대신으로 제3대 한국통감을 겸임하는데, 한국병합을 주도하고, 10월에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초대 조선총독이 된다. 제1대 부터 3대 까지 한국통감은 주거니 받거니 모두 조슈번 출신이 차지한다.

1906년 4월 초대 한국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는 육군대신인 조슈후배 데라우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은 겉으로 평온한 듯이 보이지만,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고 불신감을 표시하면서 경계의 눈빛을 늦추지 않고 있다. 조선이 외교권을 빼앗기고 풍전등화 속에서 항일운동이 거세지는 가운데, 무력에 의한 단속이 필요한 이유를 편지 내용에 보이고 있다.
 
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한 일제의 강압 속에 강제로 을사늑약아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길 41-11). 중명전 1층에 을사늑약 강제 체결 현장이 재현되어 있다. (왼쪽부터) 이근택, 권중현, 이지용, 이완용, 하야시 곤스케, 이토 히로부미, 박제순,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
 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한 일제의 강압 속에 강제로 을사늑약아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길 41-11). 중명전 1층에 을사늑약 강제 체결 현장이 재현되어 있다. (왼쪽부터) 이근택, 권중현, 이지용, 이완용, 하야시 곤스케, 이토 히로부미, 박제순,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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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조선식민정책이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인민을 탄압하는 무단통치였다고 비판하는 이유는, 역대 조선총독이 군인, 특히 육군대신 경험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육군대신에 조선총독을 겸임시켜, 임기중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육군대신의 지휘아래 진압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16년까지 조선총독으로 재임하면서, 이른바 조선식민지 무단통치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이는 제도는 일본으로부터 들어오지만, 일본과 다른 통치방식을 적용시킨 것이었다. 일본과는 다르게 헌병이 보통경찰을 대신하는 방식이다.

무력통치의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테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날조된 구실로 대대적으로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105인 사건이다. 105인 사건은 조선이 식민지화되는 1910년 12월말 안명근 사건과 엮어서 평안도 일대의 항일세력에게 데라우치 암살모의란 누명을 씌우면서, 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를 와해시키는데, 데라우치 총독의 무단통치의 서막을 알려주고 있다.

테라우치는 무단통치로 조선을 안정화시킴으로써 대륙으로 세력을 확장시키는 기반을 삼으려 했는데, 그의 사후에 만주사변, 중일전쟁과 같이 일본의 대외침략정책에서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조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만주를 일본의 세력 아래 두어야 하고, 만주 침략은 조선을 보호할 수 있다는 명분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조선총독이 군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가 필요했던 이유다.

테라우치는 야마카다 아리토모, 가쓰라 타로와 같이 조슈번 출신인데, 조슈벌이 육군 내의 파벌투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육군 계승자로 올라설 수 있었다. 1902년부터 1911년까지 약 10년간 육군대신으로 재임했는데, 육군 내의 테라우치의 파워는 참모부와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일본에 남아있는 조선 문화재

일본에는 한반도에서 임진왜란시 약탈 등 여러 과정을 거쳐 들어온 조선문화재가 약 30만점이 있다. 규모가 크고 작은 박물관과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지방의 작은 박물관에 보존 전시하고 있는 조선으로부터 들어온 문화재를 보면서 의문이 든 적이 있다. 어떠한 경위로 들어와 이렇게 많은 조선의 문화재가 전시될 수 있는 것이고, 왜 이렇게 많은 조선의 문화재가 박물관에서 공간을 차지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다.

동경국립박물관에 있는 오구라 컬랙션 1,100점 중 대부분은 조선에서 수집한 문화재다. 이 중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한국으로 반환된 문화재는 극히 일부이다. 총독으로 재임시 데라우치가 수집한 조선의 자료 등 문화재는 야마구치현립대학에 데라우치 문고 안에 보존되어 있다.

러일전쟁의 영웅인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1849∼1912)는 조슈번의 지번(支藩)인 조후(長府)번 출신인데, 동향이고 같은 육군 수뇌부였기에 데라우치와 깊은 교분을 쌓았고, 많은 서신을 남기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한달 전 데라우치 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와카(和歌)를 읊으며, 이제야 안심이 된다면서 지난 날을 돌이켜보고 있다.

메이지 천황의 위광으로 주위 민족이 복종하게 되었도다
가까운 벗과 담소한 후, 돌아오니 밤길에 둥그런 달이 걸려있네
(노기가 데라우치에게 보낸 편지, 1912년 8월 30일)


일본의 대외침략전쟁의 완성은 조선식민지 지배로 귀결된다면서, 축배를 들고 있는 모습이 연상된다.

요시다 쇼인과 제자들의 사고와 행동에 대해 아홉 차례 (21∼30)에 걸쳐 살펴보았다. 한국과 일본에서 이들에 대한 평가가 너무 차이가 난다. 어떻게 다른 이웃나라를 침략한 자들을 오늘날에도 영웅이나 선각자로 받들 수가 있는 것일까?

일본의 역사나 외교방침에서 침략을 정당화하거나 이를 주도한 자들에 대한 미화가 계속된다면, 당연히 이를 시정하도록 방향을 잡아주어야 한다.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오롯이 우리 후손들이 받아내어야 할 짐이 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한일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한일 간의 공통의 역사적 평가와 함께, 이를 교육을 통해 보급하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
첨부파일
GBW-30 (21-11-29).do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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