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나는 상담심리사다. 15년째 마음이 힘든 사람들을 만나오고 있다. 그런데 최근 유독 상담실에서 자주 만나는 이들이 있다. 바로 20, 30대의 젊은 여성들이다. 이들은 저마다 다른 어려움을 가지고 상담실을 찾지만, 공통적으로 '우울하고 무기력하다'고 호소해온다. 이에 더해 '우울하고 무기력한 나'에 대한 죄책감까지 지니고 있다. 상처받고 아픈 것은 나인데 아픈 것 자체가 내 잘못인 것만 같고, 나의 우울로 가족이나 가까운 이들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나는 이런 여성 내담자들에게 "당신은 아픈 것이고,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다. 다른 가족들이 아프다면 그걸 그 사람 잘못이라고 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지며 상담을 이어가곤 한다. 하지만 심리학 서적들이 넘쳐나는 요즘, 고통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데 익숙해진 이들은 내 말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건 당신 때문이 아니라고, 심리적 고통은 사회적 맥락이 있고, 당신은 지금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중이라고 말하려 해도, 늘 언어가 부족하다 싶은 참이었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여성 우울증, 하미나(지은이)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여성 우울증, 하미나(지은이)
ⓒ 동아시아

관련사진보기

 
그러던 중 무척 반가운 책을 만났다. 하미나 작가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2021, 동아시아)이다.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 책은 조울증을 앓았던 저자의 경험과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성들 31명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쓰여진 20,30대 여성 우울증에 대한 보고서다. 우울증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부터, 원인과 치료의 과정까지를 여성과 당사자의 시각에서 탐구하고 있다.

남성의 시선에서 진단되는 여성 우울증

저자는 남성의 몸을 표준삼아 만들어진 정신의학의 진단 체계를 비판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독립적이며 강하고 성취 지향적인 전통적인 '남성적 특질'을 '정상'으로 가정하고 정립된 정신의학과 심리학은 여성들의 증상 자체를 여성의 의존성, 혹은 여성의 몸이 가진 생물학적 문제로 치부하는 시선이 강하다.

가장 최신판 정신의학진단체계인 DSM-V 역시 이런 함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때문에 여성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여성성 자체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부정 당하는 경우가 많다.
 
남성의 몸이 표준이 될 때 아픈 것, 병리적인 것, 비정상적인 것은 남성의 몸 바깥에 놓인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우울과 같이 병리적인 상태를 설명할 때, 그 원인은 남성의 '정상'적인 몸이 아닌, 그를 힘들게 한 외부적 요인, 곧 사회문화적 조건에서 찾아진다. 반대로 여성의 우울은 그 원인이 여성의 '비정상'적인 몸 안에서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곧 여성이 아픈 것은 '원래 그렇게 태어나서'이다. (24쪽)
 
정말 그렇다. 몇 해전부터 이슈가 되어 오고 있는 20,30대 남성의 분노에 대해서는 불안한 취업환경 등 사회적 문제에서 그 이유를 찾는 시선이 강하다. 이와 관련한 특집 TV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정도로 이는 사회적 이슈였다. 하지만, 급증하고 있는 여성의 우울은 사회적 문제로 다뤄지지 않는다. 그저 개인의 문제로, 때로는 호르몬 같은 신체적인 문제로 치부될 뿐이다.
  
여성들의 우울은 사회적 맥락보다는 여성의 심리적 특성 혹은 여성호르몬 때문에 겪게 되는 '원래 그런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여성들의 우울은 사회적 맥락보다는 여성의 심리적 특성 혹은 여성호르몬 때문에 겪게 되는 "원래 그런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 unsplash

관련사진보기

 
여성의 눈으로 본 여성 우울증

저자는 매우 내밀하게 우울증을 앓고 있는 20,30대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여성들의 우울증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발현됨을 입증해낸다.

우선, 가족 안에서 여성들은 더 쉽게 폭력에 노출된다. IMF때 어린 시절을 보낸 지금의 20,30대 여성들은 당시 대대적인 '가장 기 살리기' 문화 속에 아버지가 휘두르는 각종 폭력에 노출된 세대다. 폭력적인 상황들은 정신적 트라우마가 되고, 우울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부양자로서의 역할만 잘해내면 모든 것이 괜찮았던 가부장제의 전통 속에,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발생한 심리적 문제는 양육을 잘못해 낸 어머니 탓으로 돌려진다. 정신의학 역시 양육자를 어머니로만 설정하며 심리적 문제를 '나쁜 엄마'와 연결시켜 왔다. 때문에 사회적 문제여야 할 '가정폭력'은 드러나지 않고 이로 인한 우울과 정신적 고통은 '엄마와 딸'의 문제로 치부된다.
 
엄마와 딸이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난장에서 함께 미쳐 뒹구는 동안, 아빠는 난장의 원인을 제공했으나 그곳에 개입하지 않는 방식으로 비난의 화살을 피해간다. 다양한 맥락 속에서 발현되는 정신질환을 가족 내의 문제로 납작하게 환원하는 것 또한 사회가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이다. (151쪽)
 
또한, 여성의 주변엔 늘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수많은 데이트 폭력과 강간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두려움이다. 홀로 밤 길을 걷는 것뿐 아니라, 옆에 있는 애인마저 조심하며 늘 긴장한 채 살아가야 하는 여성들이 우울해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해 보인다.

'쓸모'와 '자격'만을 강조하는 능력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의 분위기도 여성의 우울증에 기여하고 있는 부분이다. 책 속의 인터뷰이들은 '있는 그대로' 사랑받기보다는 '무언가를 성취하고 해냈을 때만' 인정받는 환경에 길들여져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여성들은 수동적이고 의존적이며 자신을 낮춰야 한다는 전통적 성역할 고정관념 속에 자라난다. 때문에 많은 여성들은 무언가를 성취해냈으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부적절감은 다양한 심리적 증상들을 유발하기 마련이다. 저자는 이런 여성들의 증언을 토대로 여성의 우울증을 사회적 맥락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젊은 여성들의 고통이 너무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가 질병을 서사화할 때, 살기 위해 마주해야 했던 각자의 배경들이 유사하다면, 그것은 더 큰 공간에서 논의될 필요가 있다. (107쪽)
   
스스로 치료의 주체가 되는 여성들

하지만, 저자가 만난 여성들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았다. 이들은 이미 자신들의 우울을 맥락 속에서 파악하고 힘껏 스스로를 돌보는 능동적인 치료의 주체였다.
 
의학 지식에서 한발짝 물러나 해주는 대로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픈 몸을 가진 주체로서 그리고 자기 몸의 전문가로서 치료 과정에 함께 한다. 세상이 자신을 환자로 보면 환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세상이 자신을 미친년으로 보면 미친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들을 단지 우울증 환자로만 보지 않는다. 이들은 미쳐있고 괴상하지만, 동시에 오만하며 똑똑한 여자들이다. (261쪽)
 
실제 상담 현장에서도 그랬다. '우울증'을 진단받고 상담실을 찾은 여성들은 우울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자기 자신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우울이 '내 잘못이 아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이들은 어김없이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돌보고, 일상을 유지하며, 관계를 맺어가는 힘을 발휘했다. 저자의 말처럼 내가 만난 우울한 20,30대 여성들은 참으로 '똑똑한 여자들'이었다.

이런 멋진 여자들이 우울 때문에 주저앉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나는 무엇보다 '안전한 환경'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담실에서 이들이 자신의 힘을 발견해갈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시선을 드러내고, 힘든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며, 분노를 표출해도 안전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 역시 이런 '안전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 역시 이렇게 적었다.
 
무엇보다 안전하다고 느껴야 한다. 또한 고립되지 않아야 한다. 타인과, 나아가 공동체와 연결되어야 한다. 자신의 고통을 '엄살'로 보지 않는 공동체에서 사회적, 정서적 지지를 충분히 받아야 한다. (300쪽)
 
이것이 지금 우리가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20,30대 여성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일 테다. 안전한 환경이 제공되기만 한다면, 이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은 자신의 힘을 발견하고 우울을 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멋진 여자들의 힘이 세상에 더해질 때 우리 사회 역시 조금 더 건강해지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여성 우울증

하미나 (지은이), 동아시아(2021)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