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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인천에는 영화제작사가 여러 곳 있었다. 1930년대에 설립된 혜성영화사를 필두로 건설영화사, 청구사진문화사, 성보영화사, 신광영화사, 국보영화사, 자유영화사가 그것이다.

혜성영화사​​
 
인천의 혜성영화제작소에서는 제1회 작품 마도를 촬영하러 중국 대련으로 떠난다는 내용을 담은 신문기사다. 1935년 12월 11일 조선중앙일보,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인천의 혜성영화제작소에서는 제1회 작품 마도를 촬영하러 중국 대련으로 떠난다는 내용을 담은 신문기사다. 1935년 12월 11일 조선중앙일보,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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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영화제작소 제1회 작품 마도를 촬영하려 대련행. 인천 혜성영화제작소에서는 조선 명화 마도를 촬영하기 위하야 김벽파, 한일송, 김연실 등 일행 10명이 대련을 향하는 공동환으로 인천을 떠났는데 약 일주일 예정으로 대련을 무대로 촬영하리라는 바 일반의 기대되는 명화도 얼마 되지 아니하야 공연되라 한다."

한일송은 1935년 조선 최초의 토키영화 <춘향전>에 출연했고 김연실은 1927년 나운규프로덕션 제1회 작품인 <잘 있거라>로 데뷔해 <임자 없는 나룻배>, <청춘의 십자로> 등 여러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 겸 대중가수였다.

대련은 중국 랴오둥반도 남단에 있는 해변 도시인데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선생이 순국하신 여순감옥이 있는 곳이다. 당시 해외 로케촬영을 했다는 것은 작품의 의미나 규모면에서 대단한 것이었다. 마도는 당시 상해를 일컬었는데 영화 <마도>가 어떤 내용의 영화인지 사료를 찾기가 힘들다.
 
인천 혜성영화제작소에서 제1회 작품 <마도>를 촬영코자 대련으로 출발하는 광경을 담은 사진이다.1935년 12월 15일 조선중앙일보,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인천 혜성영화제작소에서 제1회 작품 <마도>를 촬영코자 대련으로 출발하는 광경을 담은 사진이다.1935년 12월 15일 조선중앙일보,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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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인천 혜성영화제작소에서 제1회 작품 '마도'를 촬영코자 대련으로 출발하는 광경"

출발 모습이 신문에 실린 정도였다.

​건설영화사​
 
인천 건설영화사가 제작하는 무영의 악마 로케를 담은 기사. 1946년 8월 2일 대중일보,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인천 건설영화사가 제작하는 무영의 악마 로케를 담은 기사. 1946년 8월 2일 대중일보,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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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영화사 제1회 작품, 무영의 악마 로케. 시내 송학동 건설영화사에서는 제1회 작품으로 시 후원하에 <무영의 악마>를 지난 7월 중순서부터 촬영을 개시. 방금 월미도를 비롯해 시내 각처에서 로케를 진행 중인데 금월 초순까지 촬영을 마쳐 중순경에는 상영하게 되리라 한다..."

건설영화사는 지금 인성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최철이 설립했는데 배우 최불암의 부친이다.

최철은 건설영화사를 설립하자마자 첫 번째 작품으로 <무영의 악마>를 제작했다. 월미도 등 인천에서 촬영이 이루어졌다. 기사를 보면 다음 2회 작품으로 <복수>를 제작 준비 중이라고 나온다.

1948년에 최철은 3번째 작품인 <수우>를 제작했다. 흑백 35mm 영화로 김소영, 전택이, 이금룡, 신카나리아 등이 출연했다. 순수 극영화가 아니라 항구의 조직 두목과 그를 개과천선 시키려는 카바레 마담과의 이야기를 다룬 경찰 정책 영화였다. 흥행 성적은 실패였다.​
 
탤런트 최불암의 부친인 최철이 만든 건설영화사. 세 번째 작품으로 영화 <수우>를 제작했다. 1947년 12월 7일 제일신문,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탤런트 최불암의 부친인 최철이 만든 건설영화사. 세 번째 작품으로 영화 <수우>를 제작했다. 1947년 12월 7일 제일신문,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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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배 전 영화촬영 감독
 정의배 전 영화촬영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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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배 영화촬영 감독은 최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철이 제작한 <수우> 촬영현장에 간 적이 있었다. 인성초등학교 운동장 자리가 최철의 집이었는데 상해에서 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검은 안경을 쓰고 키는 작았는데 체격이 땅땅했다. <수우>는 경찰청 후원으로 제작한 반공영화였다. 반도영화주식회사 사람들이 스텝이었다. 감독은 안종화, 촬영은 홍일명이었다. <수우>의 세트촬영은 최철의 큰 저택에서 했다. 최철의 일본식 저택 내부를 개조해서 영화 세트촬영의 거의 모든 장면을 촬영했다."

청구사진문화사​​
 
청구사진문화사가 제작한 심판자는 동방극장에서 상영됐다. 1950년 1월 7일 대중일보,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청구사진문화사가 제작한 심판자는 동방극장에서 상영됐다. 1950년 1월 7일 대중일보,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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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심판자>를 경기도경찰국에서 상영금지한다는 내용을 담은 기사. 1950년 1월 15일 국제신문.
 영화 <심판자>를 경기도경찰국에서 상영금지한다는 내용을 담은 기사. 1950년 1월 15일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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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청구사진문화사를 설립한 최성연은 <개항과 양관역정>의 저자다. 그가 남긴 사진과 사료는 인천 향토사의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1948년 청구사진문화사를 설립한 최성연은 <개항과 양관역정>의 저자다. 그가 남긴 사진과 사료는 인천 향토사의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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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사진문화사(대표 김철세, 최성연)가 제작한 <심판자>가 동방극장에서 상영됐다. <심판자>는 독립투사인 이향이 외아들에게 자신의 뜻을 잇게 하려고 고된 훈련까지 시키면서 교육하는데, 철이 없는 아들이 왜경에게 매수돼 동지가 숨어있던 곳을 알려주는 바람에 동지가 체포되고 이향을 향해 반역자라고 욕한다. 이에 이향은 외아들을 훈련장으로 끌어내어 총살하고 조국과 동지 앞에서 사죄한다는 내용의 영화다.​

"영화 <심판자>를 도경서 상영금지. 지난 10일 상오 십시 시내 동방극장에서 최초로 봉절한 청구사진문화사 제작 영화 <심판자>는 봉절한 지 불과 하루 만에 도경찰국의 지시에 따라 상영을 금지하게 됐는데 이에 관해 도경찰국장 장영복씨는 동 영화 내용에 있어 불미한 점이 많아 부득이 상연을 금지하게 됐다고 엄명했다."

도경찰국은 영화 내용을 문제 삼아 심판자의 상영을 금지했다.​

성보영화사
 
성보역화사가 제작한 <사랑의교실>이 동방극장에서 개봉됐다. 1950년 4월 7일 대중일보,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성보역화사가 제작한 <사랑의교실>이 동방극장에서 개봉됐다. 1950년 4월 7일 대중일보,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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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성 시인의 부친은 한국문인협회 초대 인천지부장을 지냈다. 그는 원용일 감독의 <사랑의 교실> 시나리오를 썼다. 사진은 조우성 시인과 이화창고 세트장
 조우성 시인의 부친은 한국문인협회 초대 인천지부장을 지냈다. 그는 원용일 감독의 <사랑의 교실> 시나리오를 썼다. 사진은 조우성 시인과 이화창고 세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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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예술인들의 피땀어린 고투의 결정!"

성보영화사(대표 원용일)가 제작한 <사랑의 교실>이 동방극장에서 개봉됐다. 화가 김웅은 풍경화를 그리기 위해 어느 시골 마을에 머물면서 한 아이와 친해지고, 그의 어머니인 과부 남해연과 알게 돼 어느덧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들은 사랑방에 어린이들을 위한 사랑의 교실을 꾸미고 자칫하면 삐뚤어지기 쉬운 어린이들을 불러 모아 착하고 아름답게 자라도록 선도하는 데 힘쓴다는 줄거리였다. 영화의 원작자 조수일은 조우성 시인의 부친이다.

"​내 아버지(조수일)가 한국문인협회 초대 인천지부장을 하셨는데 원용일 감독의 <사랑의 교실> 시나리오를 쓰셨다. 그리고 이광수 원작의 <사랑>을 인천 여러 지역에서 촬영했는데 송​현동 이화창고에 세트장을 마련하고 눈 내리는 장면을 촬영했다. 당시에는 서울을 빼고 자체적인 자본으로 자체적으로 영화를 제작, 촬영한 곳은 인천이 유일했다. 지금은 촬영을 유치한다면서 인천 배경의 영화들만 나오고 있다. 진정한 인천 영화가 앞으로 나올 길 바란다."
 
신광영화사

 
인천출신 김옥돈이 설립한 신광영화사의 창립작품은 <사랑>이었다. 1957년 작 영화 <사랑> 포스터
 인천출신 김옥돈이 설립한 신광영화사의 창립작품은 <사랑>이었다. 1957년 작 영화 <사랑>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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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9월 12일 조선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52년 9월 12일 조선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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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출신 김옥돈이 설립한 신광영화사 창립작품으로 <사랑>이 제작됐다. 허봉조 산부인과 원장집, 송학동 카바레 댄스홀 등 인천 곳곳에서 촬영됐고 특히 송현동 이화창고에서 병원 내부를 세트로 지어 촬영했다. 배우와 스텝들이 내동에 있던 연안여관에서 1년 가까이 머물며 촬영했다고 한다. 완성 후 애관극장에서 상영했다.

"​강화로케 완료. 문화영화 <복지>. 인천 이승하씨의 노력으로 창립을 보게 된 당지 자유영화사에서는 문화영화 <복지>의 강화도 현지촬영을 마치고 극영화 촬영 준비에 분망중이다."​​

그밖에 <복지>를 만든 자유영화사가 있었고, 중앙동에 자리 잡은 국보영화사도 있었다. <날개 없는 천사>를 제작했다.

○ 혜성영화사: 1930년대 설립. <마도> 제작.
○ 건설영화사: 1940년대 최철이 송학동에 설립. <수우> 제작.
○ 청구사진문화사: 1940년대 최성연이 설립. <심판자> 제작.
○ 성보영화사: 1940년대 원용일이 설립. <사랑의 교실> 제작.
○ 신광영화사: 1950년대 김옥돈이 설립. <사랑> 제작.
○ 자유영화사: 1950년대 설립. <복지> 제작.
○ 국보영화사: 1950년대 설립. <날개 없는 천사> 제작.

글· 사진 윤기형 영화감독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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