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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매일 기자들의 집단 사직서
 전남매일 기자들의 집단 사직서
ⓒ 나경택 전 전남매일신문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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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1980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어요. 성당에서 야외 미사를 드리고 있는데, 광주 시내에 난리가 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카메라를 들고 금남로로 갔죠. 계엄군이 시민을 패대기 치는 걸 보고 찍어 회사에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1980년 5월 19일) 신문에는 아무것도 실리지 않았습니다." (나경택 전 전남매일신문 기자)

1980년 5월 광주에는 기자들이 있었다. 흔히 '공수부대'라고 불렸던 3·7·11공수여단의 폭력을 눈앞에서 목격한 이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들의 기록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계엄군은 전남도청 내에 설치된 전남북계엄분소 언론검열관실을 통해 5·18과 관련한 보도 일체를 불허했다. 당시 기자들은 기사 대신 집단 사표를 통해 당시의 참담함을 남겼다. 
 
우리는 보았다 /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 그러나 신문에는 단  싣지 못했다. /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 1980년 5월 20일 전남매일신문 기자 일동

당시 사표의 문구를 직접 쓴 이는 박화강(75) 전 전남매일신문 기자다. 그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광주의 진실을 묻힐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가 본 이야기를 남겨야 했다"라면서 "사표라는 이름을 빌려 또 다른 진실을 알렸다"라고 말했다. 1980년 5월 20일, 당시 기자들은 공동 사표 2만여 장을 인쇄해 광주 시내에 뿌렸다. 이후 5월 21일부터 10일 동안 전남매일신문의 발행이 중단됐다. 

"계엄군, 폐간 협박하며 신문 제작 강요"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1980년 6월 2일 신문을 재발행한 후 5.18묘역을 찾아 5.18 관련 보도를 하지 못한 것에 사죄하고 참배했다.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1980년 6월 2일 신문을 재발행한 후 5.18묘역을 찾아 5.18 관련 보도를 하지 못한 것에 사죄하고 참배했다.
ⓒ 나경택 전 전남매일신문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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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자들은 취재를 멈추지 않았다. 나경택(72) 전 전남매일신문 사진기자는 흰색 점퍼 안에 두 대의 카메라를 숨긴 채 취재를 이어갔다. 그는 "신문 발간이 중단된 후 기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 거리로 나가 취재를 이어간 기자도 많았다. 당시 나는 빌딩에 숨어 사진을 계속 찍었다"라고 말했다. 

계엄군이 시민을 곤봉으로 구타하는 장면, 한국은행 광주 지점 앞으로 실려온 시신, 전남도청을 가득 메운 채 거리에서 주먹밥을 나누는 시민들의 모습이 그의 카메라에 담겼다.

계엄군은 광주시민을 폭력진압하는 동시에 신문 제작을 중단한 기자들을 끊임없이 협박했다. 문순태(82) 전 전남매일신문 부국장은 "계엄군이 새벽부터 전화해 무조건 나와서 신문을 만들지 않으면 신문을 폐간 시킨다고 압박했다"라며 "폐간되더라도 신문을 만들 수 없다고 버텼는데, 광주의 아픔을 어떤 방식으로든 남겨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라고 속간의 이유를 밝혔다.

결국 10일 후인 1980년 6월 2일 전남매일신문이 다시 발행됐다. 신문을 제작한 문 전 부국장은 "결국 창간하는 마음으로 신문을 발행하자고 결정했다"라며 "진실을 기사로 전할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 신문 지면을 채우자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6월 2일, 전남매일신문 1면에 '애독자 여러분께 알립니다. 필설로는 감히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참극을 참고 견디신 애독자 여러분 앞에 보은 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로 시작한 속간의 말이 담겼다. 

"기사로 진실을 전할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광주의 현실을 전달해야 했습니다. 급하게 김준태 시인에게 시를 써달라고 부탁했죠. 당시 신군부 언론검열관실 검열관은 김 시인이 쓴 120행 시 중 80행을 '삭제'하고, 나머지 40행은 '재고 요망'이라고 붉은 글씨를 써서 내려보냈죠. 하지만 그 40행을 그대로 신문 1면에 넣었습니다."

문 전 부국장은 "'광주사태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사원 일동 명의의 7단 광고를 실어 희생자의 넋을 위로했다. 그리고 김준태 시인의 시 '아 광주여'라는 시를 실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문 발행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계엄군에 미운털이 박힌 기자들은 8월부터 강제 해직됐다. 이후 신군부의 언론사 통·폐합 정책에 따라 1980년 11월 29일 전남매일신문은 전남일보와 강제로 통합됐다. 기자들이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5.18 진실규명은 아직 끝내지 못한 숙제"
 
1980년 5월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비상계엄 즉각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1980년 5월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비상계엄 즉각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 나경택 전 전남매일신문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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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혈기 왕성한 기자들의 청춘을 빼앗았습니다. 가장 열심히, 가장 치열하게 보도한 수십 명의 젊은 시절을 앗아간 겁니다."

소옥원(69) 전 전남매일신문 기자가 말했다. 그는 "전남매일신문에서 강제해직된 후 통합된 광주일보로 복직했는데 반정부 기자로 찍혀 다시 강제해직을 당했다. 모두 전두환 때 벌어진 일"이라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과거사 정리를 하며 명예가 일부 회복됐지만 기자 일을 하기엔 이미 늦은 나이였다"라고 회고했다. 

이어 "그런 전두환이 이런식으로 죽다니 치가 떨린다"라면서 "망나니 전두환은 광주에서 벌어진 폭력을 끝끝내 부정했다. 전두환이 '잘못했다'고만 했으면, 광주 시민의 응어리가 조금은 풀렸을 거다. 그런데 41년 내내 그 한마디를 하지 않다 죽었다. 광주 시민은 한을 품고 살아가게 됐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경택 전 기자는 "생각할수록 전두환의 죽음은 기가막힌다. 허망하다 못해 헛웃음이 날 정도"라고 말했다. 

동시에 이들은 광주의 참혹한 비극을 끝끝내 밝혀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전 부국장은 "전두환이 죽고 5.18 단체들은 '전두환의 죽음으로 진실을 묻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의 절실함이 담긴 말"이라며 "분노하고 서글픈 마음을 뒤로하고 진실규명에 집중할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박 전 기자는 "전두환의 죽음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죽음"이라면서 "일흔이 넘어 기력이 약해지고 몸 여기저기가 성치 않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남은 사람들이 광주의 진실이 묻히지 않도록 노력할 거라 믿는다"라고 말했다. 

나 전 기자는 "5.18 진실규명은 아직 끝내지 못한 숙제"라면서 "북한군이 개입했다느니 전두환이 경제성장을 이룬 대통령이라는 따위의 헛소리가 남아있는 한 광주의 영령들은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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