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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유튜브를 가장 열심히 자주 애용하는 사람 중의 하나가 골퍼다. 첫 라운드도 어언 5년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필드만 나가면 캐디에게 양몰이를 당하는 백돌이(정규 18홀에서 100타수 이상을 기록하는 사람) 신세인 나도 유튜브 골프 레슨을 자주 본다.

유튜브에서 온갖 종류의 골프 채널을 섭렵하다가 한 신선한 프로를 만났다. 여느 프로와는 달리 말솜씨가 대기업 회의를 진행하는 듯한 유려한 프로다. 채널 이름도 특이하다. '나쁜 골프', 채널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워낙 막힘이 없이 레슨을 진행해서 자주 본다.

기술적인 부분보다 내기골프나 동반자 매너 같은 골프의 인문학적(?)인 부분 등 아마추어 골퍼라면 한 번쯤 고민하게 되는 내용을 말한다. 여하튼 이분이 책을 냈다고 해서 <나쁜 골프>를 잽싸게 입수해서 읽었다.

필드 위의 선비라서 그런지 일본의 짧은 시 '하이쿠'를 연상케 하는 짧은 글이 대부분이다. 마치 장자의 도덕경을 읽는 듯한 우화와 같은 글도 많은데 유머와 깊은 공감을 주기도 하고 혼자서 피식피식 웃게 하는 뼈 때리는 내용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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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끌리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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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제일기획에서 카피라이터를 근무했었고 글만 보아도 자동으로 음성지원이 되는 '쿠쿠 하세요'라는 카피를 만든 분이라고 한다.
 
100개와 99개는 한 타 차가 아니다. 90개와 89개는 한 타 차이가 아니다. 뒷자리를 줄이는 것이 연봉 올라가는 느낌이라면 앞자리를 바꾸는 것은 직급 바뀌는 느낌. 승진하는 느낌이다.

과연 그렇다. 나는 골프장에를 가면 라베(라이프 베스트) 스코어나 버디를 노리지 않는다. 목표는 항상 99개이다. 99개를 친 날은 최소한 내가 골퍼로서 골프장에 가는 것이 민폐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보다 1개를 더쳐서 100개를 친 날은 세상의 온갖 자괴감이 다 든다. 나의 목표는 싱글이 아니고 깨백(100타 부수기)이다. 1타 차이로 희비가 엇갈린다.
 
72번을 받았다고 72타를 치는 건 아닌데 111번을 받았다고 보기만 하는 건 아닌데 99번을 받았다고 후진을 하는 건 아닌데 좋은 번호를 받고 싶다. 나이가 들면 그냥 외우기 쉬운 번호를 받고 싶다.

골프장에 가면 제일 먼저 하게 되는 고민이다. 카운터에서 준 내 락카 번호표를 쿨하게 휴지통에 버리고 머릿속에 입력하고 갈 것인가. 아니면 숫자 하나를 외우지 못하는 머리라는 걸 인정하고 번호표를 조심스럽게 뒷주머니에 넣고 갈 것인가, 락카 번호표를 사진으로 찍어서 핸드폰에 넣어갈 것인가.

당연히 나는 후자를 어쩔 수 없이 선택한다. 운수 좋게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번호를 만나면 깨백을 한 것 만큼이나 운수가 좋은 날이라고 쾌재를 부른 다음 번호표를 버리고 홀가분하게 필드로 나간다.
 
첫 홀 일파만파를 꼭 해야 하는 거라면 내가 일파를 하자!

내 친구는 항상 이렇게 외친다. '공자도 일파만파를 했다고 하더라'(일파만파 : 첫 홀에서 한명이 파를 하면 라운딩을 하는 모두를 파로 기록하는 것을 의미하는 골프 은어). 내가 첫 홀에서 죽을 썼는데 캐디가 '첫 홀이니까 좋게 적을게요'라고 말하면 그 캐디가 천사로 보인다.

그런데 '내 스코어는 정확하게 적어주세요'라고 어깃장을 놓는 친구가 있다. 저 친구는 세상을 왜 저렇게 삐딱하게 사는 거냐며 원망을 한다. 그런데 내가 첫 홀에서 파를 했는데 트리플을 한 친구가 '일파만파로 가자'라고 말을 하면 세상을 다 잃은 듯한 원망과 짜증이 밀려온다.
 
자동차는 오른쪽 뒷자리가 상석이고 카트는 오른쪽 앞자리가 상석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겨울에는 오른쪽 앞자리는 칼바람을 최전선에서 맞이하는 최악의 자리가 된다. 그래서 겨울만 되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예의가 바르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 된다. '넌 덩치가 크니까 앞자리에 앉아' '너 1월생이지? 난 12월생이니까 네가 앞자리에 앉아' '골프는 매너지. 레이디는 앞자리 상석으로 모셔야지'.
 
빈 스윙이었는지 헛스윙이었는지 본인은 안다. 본인이 안다는 걸 다른 사람들도 다 안다.

헛스윙하고도 빈스윙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못 할 일이 없다. 헛스윙하면 누구라도 욕을 하든가 혼자서 헛웃음을 지어서 동반자들에게 빈스윙을 했다는 사실을 강제로 실토하게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동반자가 '너 지금 빈스윙 한 거지?'라고 위로랍시고 멘트를 날려도 위안이 안 된다. 당신의 동반자가 헛스윙하면 그냥 애써 모른 척하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다.
 
'뽀올!' 하고 캐디가 외칠 때 캐디는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지만 친 사람은 그 볼을 걱정한다.

과연 그렇다. 다만 내 경우에는 내가 친 공이 산이나 저수지로 향해서 로켓처럼 질주하면 저 공이 저번 홀에서 주운 로스트 볼인지 아니면 지난주에 카드 할부로 산 비싼 공인지를 먼저 생각한다. 하도 많은 공을 잃다 보니 내가 공을 고르는 기준은 필드에서 가장 덜 잃어버린 모델을 따진다. 가장 덜 잃어버린 공이 가장 좋은 공이다.
 
분명히 뒷바람이었는데 내가 칠 때면 앞바람으로 바뀐다.

이건 고수들이나 생각하는 것이고 나 같은 사람에게 바람의 방향 따위는 신경을 쓸 여유도 의사도 없다. 앞바람이나 뒷바람이 거기서 거기다.
 
'분명. 여기 어딘데.'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갈 볼은 아닌데.'로 이야기는 이어진다. 오늘만큼은 산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정직하고 양심적인 사람인지 판단할 기회다. 동반자는 저 멀리 있는데 나 혼자 죽은 것이 분명한 공을 찾는 시늉을 하다가 주머니에 들어 있는 히든카드를 꺼내놓고 공을 찾았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친다면 그다지 양심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 일단 공을 찾은 척하는 연기를 하는 것이 귀찮기 때문이다. 내가 PGA 대회에 출전한 프로도 아니잖은가.

그런데 공을 찾다가 다른 사람이 잃어버린 공을 발견하면 내 양심도 심각하게 흔들린다. 주머니에서 다른 사람이 볼세라 공을 꺼내는 긴장감이나 연기를 할 필요가 없이 그저 나지막하게 '여기 있구먼'이라고 읊조려 주면 그만이다. 그 공의 전 주인이(아마 성이 조씨일 가능성이 크다) JO라고 대문짝만하게 표시한 공도 박씨인 나는 당당하게 내 공인 것처럼 무표정하게 친다.
 
나보다 하루만 먼저 쳐도 모든 사람이 선생님이 된다. 세상의 모든 골퍼는 어디선가 모두 선생님이다.
 
이건 무조건 진리다. 필드에 나가면 스코어보다 친 공이 사느냐 죽느냐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백돌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한두 타 못 치는 동반자에게 훈수를 두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정말 소름 끼치는 장면이다.

나쁜 골프

강찬욱 (지은이), 끌리는책(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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