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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약속을 지킨 시루떡
 40년 전 약속을 지킨 시루떡
ⓒ 최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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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관 초인종이 울렸다.

"저희 부군이 전두환 죽었다고 시루떡 한 말을 했어요."

성당의 신자인 형제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1980년 5월, 대학 재수 시절 광주에서 온 대학생이 등사 유인물을 들고 진안성당에 왔어요. 신부님과 함께 학생회 회원들이 대학생 증언을 듣게 되었어요. 잔악한 광주학살 유인물 내용이 사실이냐고 묻자, 대학생이 울면서 사실이라고 고백했어요. 제가 광주학살의 진상을 처음 듣게 되었어요."

"저도 고입검정고시 떨어지고 재수 시절에 슈퍼마켓 점원생활을 했어요. 정기휴일에 새벽차를 타고 광주 양동 복개상가 큰 형님 옷가게에 갔어요. 돌아오려고 금남로 터미널에 갔는데 공수부대와 학생시민들이 대치하고 있었어요. 도로에는 보도블록 파편이 어지럽고 공중전화부스는 쓰러져 있는데 공수부대가 군홧발을 굴리며 터미널 쪽으로 몰려왔어요.

겁에 질린 시민 학생들이 일제히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어요. 화장실로 도망가서 화장실 문을 닫아걸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공포에 떨었어요. 열여섯 살 아픈 기억입니다. 남원으로 가는 버스가 출발하고 한 시간 후에 교통이 통제되었어요. 제가 한 시간만 늦게 터미널에 왔다면 저도 광주에 고립될 뻔 했죠."
 
광주 망월동 구묘역에서 한 방문자가 참배하고 있다.
 광주 망월동 구묘역에서 한 방문자가 참배하고 있다.
ⓒ 최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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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여행을 광주 망월동으로 갔어요. 광주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망월동을 갔어요. 택시 기사가 눈치를 채고 어디서 신혼여행을 왔냐고 묻더라고요. 1988년 5월 15일 결혼식 올리고 16일에 망월동을 갔거든요. 큰 도로에서 내려 망월동 묘지로 가는 추모행렬 인파가 어찌나 많은지 택시가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어요.

택시 기사가 문을 열고 '여기 망월동으로 신혼여행 온 신혼부부가 탔습니다'라고 말하자, 앞으로 앞으로 말이 번지면서 홍해 바다 갈라지듯 도로 양쪽으로 이동한 참배객들이 망월동에 도착할 때까지 축하의 박수를 보내는 거예요. 얼마나 가슴 뭉클했는지, 또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라요.

꽃 파는 아주머니에게 망월동으로 신혼여행 온 신혼부부라고 소개를 하자, 세상 물정 모르는 신혼부부에게 더 받는 것이 아니라 더 싸게 깎아 주는 거예요. 2시간 넘게 묘비를 확인하며 망월동을 참배했어요. 대기한 택시 기사가 5.18 당시 광주가 고립되었을 때, 폭동이 일어났다고, 북한 간첩들 선동에 넘어갔다고, 방송에서 신문에서 난리를 쳤는데..."(한동안 침묵)

"형제님, 그 기사님 생각에 지금 우시는 거죠. 저도 왜 이렇게 눈물이 나죠."

"이렇게 전주에서 신혼여행까지 와 줘서 너무 감사하다며 2시간 넘게 대기한 요금도 받지 않았어요. 말끝마다 감사하다는 40대 기사의 소설 속 이야기 같은 따뜻한 환대를 잊을 수가 없어요.

40년 전에 전두환 대통령이 죽으면 떡 해서 돌리겠다고 제 자신과 약속했어요. 저야 약속을 지켰지만, 아직도 시체를 찾지 못한 유가족들, 총칼에 쓰러진 수백 명 영혼들, 그 유가족들,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수많은 부상자와 광주 시민들, 의로운 사람들과 선량한 국민의 한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어요."

"우리 뇌리에 동학농민혁명, 광주학생운동, 4.19 혁명의 정신과 얼, 그 항쟁의 유전자들이 5.18 민주항쟁으로 분출한 거죠. 우리는 지금 그 희생자들 덕분에 평화롭게 사는 겁니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큰 빚을 진 겁니다. 그 공로를 잊으면 안 되죠."
 
전두환 죽으면 돌린다고 했던 시루떡
 전두환 죽으면 돌린다고 했던 시루떡
ⓒ 최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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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끈뜨끈한 시루떡을 보자 회합 중인 할머니들이 떠올랐다. 떡을 썰어 접시에 담았다. 사무실에서 도란도란 떡을 먹는다.

"전두환 모습이 왜 그렇게 추악해요."
"그렇게 많은 사람을 학살한 악귀가 붙었으니 그렇죠."
"이순자 여사도 추악해요."
"수백 명을 학살하고도 사과 한 마디 없이 갈 수 있나요."

"5.18 당시 큰 시누 외아들이 전남대 다녔는데 행방불명되자, 큰 시누 남편이 실성한 사람처럼 외아들을 찾아다녔어요. 암매장되었다는 소문을 따라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다가 기차에 치어 돌아가셨어요.

독재자 전두환 때문에 외아들에 남편까지 잃고, 얼마나 허망한 세월을 살았겠어요. 죽는 날까지 외아들 시체도 찾지 못했어요. 큰 시누가 심한 치매에 걸려 사람도 몰라보았는데 죽는 순간 외아들을 부르며 숨을 거두었어요. 두 눈도 감지 못하고요.

큰 시누의 한을 누가 알겠어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무주성당 주임신부인 최종수 신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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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 기자는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일꾼으로, 불평등한 소파개정 국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으로 2000년 6월 20일 폭격중인 매향리 농섬에 태극기를 휘날린 투사 신부, 현재 전주 팔복동성당 주임신부로 사목하고 있습니다. '첫눈 같은 당신'(빛두레) 시사 수필집을 출간했고, 최근 첫 시집 '지독한 갈증'(문학과경계사)을 출간했습니다. 홈피 http://www.sarang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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