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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 11월 24일 오전 9시 20분]
 
23일 서울 마포구 세브란스병원 신촌장례식장에 마련된 전두환씨 빈소.
▲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전두환 빈소 23일 서울 마포구 세브란스병원 신촌장례식장에 마련된 전두환씨 빈소.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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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씨의 사망 소식을 들은 구례고등학교 수석교사 김치민 선생은 23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자신도 모르게 1980년 5월 18일 그날을 떠올렸다.

"전남 영광 집에 가서 쌀 좀 받아온 뒤 송정리까지 와서 버스를 타고 학교 후문으로 갔다. 가서 보니 공수부대가 착검한 상태로 후문을 막고 있더라. A4용지만한 크기로 출입을 금한다고 적혀 있길래 자세히 보려고 뚜벅뚜벅 걸어갔더니 군인 하나가 '야 인마 너 뭐야'라고 묻더라. 그래서 '전대 학생이다. 뭐라고 쓰여 있나 보러 왔다'라고 답했더니 개머리판이 날아오더라. 그게 시작이었다."

당시 김 교사는 전남대학교 사범대 교육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주말을 맞아 고향집인 전남 영광에 들러 쌀을 받아온 뒤 학교에 막 들렀던 것. 그런데 학교에 발을 딛기도 전 입구에서부터 공수부대원이 휘두른 총기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김 교사는 후문 안쪽으로 잡혀 들어갔다. 그리곤 바로 내부에서 이름 모를 상사 계급장을 단 군인으로부터 "지금이 어느 때인데 겁 없이 돌아다니냐. 집에 들어가 조용히 있으라"라는 말을 듣고 풀려났다. 하지만 당시 김 교사는 스물한 살의 혈기왕성했던 나이. 그는 자취방이 있던 광주 백운동에 잠시 들러 흐르는 피를 닦은 뒤 동기, 선후배가 모여 있다는 금남로로 향했다. 

광주 백운동에서 2번 버스를 타고 금남로로 향하던 길, 잘 가던 버스가 갑자기 멈췄다. 이내 총검을 찬 공수부대 대원이 올라와 말했다.

"젊은 놈들 다 나와."

그 순간 버스 맨 뒷자리 우측에서 머리를 감싸고 있던 김 교사의 눈에 버스 중간에 앉아 있던 젊은 부부가 보였다. 누가 봐도 신혼여행을 다녀온 듯한 모습. 어린 신부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고, 젊은 남자는 양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공수부대원은 이들을 향해 "너희는 왜 안 내려"라고 소리를 지른 뒤 멱살을 잡고 끌고 내렸다. 뒤쪽에 있던 김 교사에게도 곤봉이 날아왔다. 그는 다시 쓰러졌고, 금남로 한복판에 무릎이 꿇린 채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 현장을 바라봐야 했다. 

그런데 이 순간에도 개머리판과 곤봉에 연신 머리를 맞은 김 교사는 여전히 이러한 상황이 이해가 안 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 순간 한 하사가 다가와 대검을 꺼내 김 교사의 목에 대고 "너 죽고 싶어?"라고 말했다고. 

"벌써 41년이 지났는데 그 순간 느껴진 칼날의 서늘함이 잊히질 않는다. 그리고 5.18에 대해 내 입으로 꺼내기까지 정확히 30년이 걸렸다."

1980년 5월, 멈춰버린 기억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 부인 이순자씨가 제42기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임관한 졸업생과 악수하며 격려하고 있다. 1986.3.27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 부인 이순자씨가 제42기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임관한 졸업생과 악수하며 격려하고 있다. 1986.3.27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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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31사단으로 끌려간 김 교사는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정확히 4일간 갇혀 있었다. 40여 년이 지났지만 그 안에서 있었던 일은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다. 

대검이 목에 들어왔던 순간의 서늘함, 아카시아나무 몽둥이에 매몰차게 맞았던 순간의 아픔, 합동수사본부 형사들에게 끌려가 취조를 당해 '위험인물'로 분류됐던 기억들. 다행인 점은 1980년 5월 21일 김 교사는 곡절 끝에 풀려났다는 것이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당시 31사단 사단장이었던 정웅 소장이 시민군의 요구에 따라 잡혀온 학생들을 풀어주라 했던 것. 

1980년 5월 21일 김 교사는 광주 인근 고속도로에 풀려났다. 그리곤 바로 광주 도청으로 다시 뚜벅뚜벅 걸어갔다. 김 교사는 창문이 깨진 버스에 타고 있던 시민군들, 광주 전역을 통제하던 공수부대들을 마주했다. 힘겹게 금남로 전일빌딩 앞에 섰던 김 교사는 갑자기 부모님이 떠올라 집으로 전화를 걸고자 했다. 하지만 무일푼이었던 상황. 지나가는 중년 남성에게 동전을 얻은 뒤 공중전화를 찾아 수화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발포 소리가 들렸다. 

실제 당시 기록에 따르면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께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됐다.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에 올라가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시작했다. 1시 20분, 청년들은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졌다. 

"그날(5월 21일)이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부모님한테 소식을 알리려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총소리가 이어졌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다. 골목길이 보여 뛰어들어갔고, 어느 아저씨가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길래 무조건 뛰어들어갔다. 다락방에 숨어 사태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탕탕탕, 피융피융... 만화책에서 보던 총소리가 계속 들렸다."

김 교사는 총소리가 다소 진정된 뒤 다락방을 나와 광주 백운동에 자리했던 자취방으로 힘겹게 걸어갔다. 집에 가서 보니 고향집에 있어야 할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취방에서 얼굴이 백지장이 된 상태로 있었다. 고향집을 나간 아들은 나흘 동안 행방불명됐고 걱정이 컸던 아버지는 누가 죽었다는 소식만 들리면 광주 일대 병원과 장례식장을 다 돌아다녔던 것. 어디선가 총 맞아 죽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던 아들이 나흘 만에 돌아온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부모님에 의해 감금 아닌 감금을 당했다. 그렇게 김 교사의 1980년 5월 기억은 40년 동안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채 멈춰 버렸다.

"5.18은 지금도 진행 중"
   
1980년 5월 당시 전남대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었던 김치민 선생.
 1980년 5월 당시 전남대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었던 김치민 선생.
ⓒ 김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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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하나 청년이었던 김 교사는 어느새 환갑이 됐다. 그리고 최근에야 31사단에 끌려갔던 그날, 합수부 형사들이 남긴 기록에 의거해 5.18 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김 교사는 지난 2010년까지도 당시 생긴 트라우마로 인해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매년 5월이 되면 먼저 간 학교 친구들과 시민들을 위해 망월동 묘역을 찾아 참배를 드릴 뿐이었다. 그러다 10년 전쯤 5.18재단에서 진행한 교사들을 위한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한 뒤에야 비로소 조심스럽게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다.

"5월이 되면 힘들어도 아이들한테 말해줘야 하는데, 지금도 울컥거려서 말이 잘 안 나온다. 이제야 조금은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이 23일 오전 8시 40분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화장실에 가다가 쓰러져 죽어 버렸다. 전두환의 나이 구십이다.

이에 대해 김 교사는 "전두환은 그가 살아온 그대로 간 것 같다"면서 "제대로 된 사과 한 마디 없이, 죗값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떠나보낸 것이 너무나 허망하고 아쉽다"라고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데 이날 오전 전두환 부고 기사를 확인하던 김 교사는 기사에 달린 여러 댓글을 보고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관련 기사에 "명복을 빈다"라는 댓글뿐 아니라 "한반도의 호랑이령이 되어 좌빨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세요", "전두환 대통령 없었으면 전라도 공산화되었다 영면하시길", "대한민국에 종북세력을 몰아내고 서민들의 경제를 잡으셨던 참 대통령... 감사합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라는 댓글이 달렸기 때문이다. 

이런 반응을 두고 김 교사는 "전두환의 죄가 얼마나 극렬하게 드러나는지 다시 확인되는 것 아니겠냐"면서 "1980년 5.18 이후 40년도 더 지났는데 전두환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명확한 사과와 사죄가 없다 보니 지금도 싸움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두환이 남긴 불씨와 씨앗이 이렇게 적나라하고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다"라고 씁쓸해 했다.

그러면서도 김 교사는 "전두환이 사망한 지금이 그의 악행과 죄업을 다시 한 번 세상에 제대로 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면서 "전두환이 대한민국과 광주에 어떤 상처를 입혔는지 지금이야 말로 더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학살자 전두환은 반란수괴,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등 9개의 중범죄에 대해 1996년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97년 대법원에서 감형돼 무기징역 및 추징금 2205억 원을 확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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