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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도 첫눈이 내렸다. 굵은 눈이 소리도 없이 성큼성큼 내려와서 어느새 머리 위를 덮었다. 첫눈 오는 날 할 일이 있고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한 달에 두 번 가는 무료급식센터 도시락 만들기 봉사활동 날이었다. 월초에 시화엽서 나눔을 했지만 한번 더 드리고 싶어서 준비했다. 그런데 비 오는 날 도시락을 나누다 보면, 수혜자들이 비닐봉투에 도시락을 넣어 가져가는 것도 여간 수고가 아니기에, 오늘 같이 눈 오는 날에도 엽서를 받는 그들의 마음에 혹시라도 불편함이 따를까 걱정되어 다른 날로 미뤘다.

오늘의 밥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시화엽서전시회로 모은 기부금으로 쌀 50kg(250인 점심 한끼 분이다)을 준비해서 센터에 드렸는데 그 쌀로 지은 밥이라고 했다. 일부러 다 소문낼 일은 아니어서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내 맘에는 유독 오늘의 밥 냄새가 고소하고 윤기가 가득해 보였다. 일부러 도시락에 밥을 담는 '밥 푸는 아줌마'를 자청했더니, '저절로 피부미인 되려고 그러는구나'라는 이모들의 농담이 이어졌다.

갓 지은 밥솥에서 나오는 온기가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는 첫눈 같다는 남편의 수다는 곧이어 밥 푸는 남자의 대화로 이어졌다. 도시락을 만들 때 가장 매력적인 자리가 바로 밥을 푸는 것이라며 그 자리로 승진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신은 이곳에 온 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멀었지요. 더 열심히 활동하시면 곧 자리를 양보하리다."

"각시 말이 무섭고만. 밥푸는 것이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지"라며 이모님들도 쿵짝을 맞췄다.

갑작스런 첫눈 탓이었는지 준비한 도시락 몇 개가 남았다. 마지막으로 도시락을 받아든 할머니의 머리 위에 쌓이는 눈을 보고 걱정 하니 할머니는 곧 노란색 보자기를 꺼내어 머리에 두르시며 괜찮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떠나갔다.

우두두둑 포슬포슬 쏟아지는 눈화살을 맞으며 하늘을 올려봤다. 애피타이저를 먹듯 눈송이를 받아먹고 활동 사진을 시화전 문우들에게 전했다. 뜻하지 않은 칭찬의 글이 올라와서 무안했다. 그림책 <흰눈>에 나오는 구절이라며 '할머니' 대신에 '모니카'를 넣어서 보낸다고 문우 구르미 샘이 보내온 거였다.

앉다가 앉다가 더 앉을 곳이 없는 눈은
할머니가 꽃나무 가지인 줄만 알고
성긴 머리 위에 가만가만 앉는다.


활동 후 도시락을 함께 먹으면서 이모님들에게 첫눈에 대한 설렘을 말했다. 젊은 사람들은 좋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걱정만 앞선다면서 얼른 집에 가야지라고 하셨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이모님들에게 문화의 향기를 보여드리겠다'고, '저만 따라오세요'라며 근처에서 전시되는 서예와 문인화 전시회장을 찾았다. 참고로 이 두 예술가는 국선작가들이며 나의 지인들이기도 하다고 자랑했다.

"이모님들, 저희가 육체적으로 봉사를 했으니 지금부터는 정신적으로 예술을 느껴보시게요. 저도 예술에 대해선 문외한이라 설명은 못하고요, 단지 며칠 전 전시회 개막식 때 들은 얘기를 전해드릴 수 있어요. 글씨도 그림도 아주 멋져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뭘 알겠어. 그런 자리는 가는 것도 부담스럽더만. 그래도 한번 가보세."

 
30여점의 전시작품 속에 꽃을 좋아하는 이모님들의 인기1순위
▲ 일목 백영란선생의 문인화 30여점의 전시작품 속에 꽃을 좋아하는 이모님들의 인기1순위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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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장에는 정통 한문서예가 가산 김부식 선생의 글과 일목 백영란 선생의 문인화작품이 있었다. 이모님들에게 작품을 설명하는 책자를 한 권씩 드리고, 쭉 한번 둘러보시라고 했다.

개막식에 들은 풍월로 작품을 설명하고 있노라니 뜻밖에 작품의 주인인 서예가가 들어왔다. 작가의 안내를 받으며 각 작품에 대한 글의 뜻과 글의 배경, 서체 등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이모님들은 나보다 더 많이 한자를 읽으셨고, 질문도 많이 했다.

"이런 자리에 많이 가본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작가의 설명을 들으면서 글과 그림을 보니까 진짜 눈에 쏙 들어오네."

"관세음보살의 '관'자에 그려진 올빼미 눈이 왠지 부처님의 눈처럼 보이고 그림 같은 글자가 멋지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이런 말은 요즘 정치인들이 꼭 들어야 할 말이고만."


이모님들은 모두 한마디씩 당신들의 감정을 쏟았다.
 
이모님들의 경청이 자못 학생들같은 모습이다.
▲ 가산 김부식 선생의 글 "화목행복" 이모님들의 경청이 자못 학생들같은 모습이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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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가 이모님들 여기로 모시고 온 것 정말 잘했죠? 제가 종종 이런 봉사도 해드릴게요. 몸과 마음이 균형을 이루어야 우리가 건강하게 사는 거예요."

정호승 시인은 첫눈 오는 날에 대한 표현으로 이런 말을 했었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날 약속을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나고 싶은 사람 단 한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다


첫눈이 오는 날 어디 한 사람만 만날 것인가. 첫눈 오는 날 70개 이상의 나이테를 가진 이모님들을 만나 겨울에도 성장하는 나무의 비결을 배웠다. 인생의 흔들림 없는 심지가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은 크나큰 영광이였다. 올겨울에도 이 거목들이 보여주는 나이테의 흔적에 내 발자국 하나를 찍어보련다.

태그:#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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