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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윤의 근본 없는 이장 일기'는 귀농 3년차이자 함평군 대각리 오두마을의 최연소 이장으로,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유쾌한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27살 한대윤 시민기자의 특별한 귀농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주말 동안 서울에 들렀다가 집에 들어온 참이었다. 들어오고 나니 문득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 오두마을 대나무 오솔길 주말 동안 서울에 들렀다가 집에 들어온 참이었다. 들어오고 나니 문득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 한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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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이상하다

오두마을의 어느 평범한 월요일 오후, 주말 동안 서울에 들렀다가 집에 들어온 참이었다. 들어오고 나니 문득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한 칸짜리 방에 가구 하나 없는 집이라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사소한 흔적이지만 방바닥에 깔아 둔 매트 위치, 화장실에 걸려 있는 수건의 위치가 달라져 있었다. 나는 평소 화장실에 수건을 걸어두지 않는 터라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집에 누군가 다녀간 것이다. 귀촌 2년 차에 접어들 무렵 처음 겪는 황당한 일에 고민이 깊어져 갔다. 누가 다녀갔지?

내가 사는 집은 누군가를 초대하기엔 좁은 집이었다. 그리고 나도 손님 대접을 제대로 해본 경험이 적어 마을 주민들을 집에 초대한 적이 거의 없었다. 필요한 일이 있을 때면 경로당에 모이거나 직접 댁으로 찾아가는 방식으로 주민들을 만났었다.

그러다 보니 주민들도 우리 집 위치를 대강은 알아도 정확히 아는 분들이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일 먼저 의심되는 분은 귀농 형님이었다. 평소에도 서로 자주 왕래하고 워낙 가깝게 지내던 형님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을 귀농 형님께 조심히 여쭤봤다.

"혹시 이번 주말에 저희 집에 다녀가셨나요?"
"아니, 왜?"


형님의 아니라는 답변을 듣고 도움을 요청드렸다. 집에 누가 다녀갔는데 알게 되시면 알려달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마을 주민 한 분씩 찾아가면서 집에 왔는지 캐묻기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대부분 주민들은 집 문고리를 걸지 않고 다녔다. 서로 편하게 왕래하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문고리를 걸지 않고 다녔지만 막상 집에 누가 다녀가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사 와서 처음으로 자물쇠를 사서 달았다.

집에 없어진 물건은 없는지 확인하는 습관도 생겼다. 집에 훔쳐갈 만한 것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달가량이 지나고 나서야 사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정체는 바로 당시 내가 세 들어 사는 집의 주인분이었다. 우연히 툭하고 던진 말씀을 들었다.

"저번에 집에 갔는데 아무도 없더라고. 결혼식 피로연이 있어서 남은 음식 넣어 뒀는데 상해서 다시 내가 빼놨어."

잉? 내 집에 말도 없이 온 게 한 번이 아니고 두 번이라고? 나는 냉장고에 음식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주인 어른의 말을 듣고 안도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저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시골에선 법보다 밥

이 일을 계기로 곰곰이 고민한 끝에 한 가지 결론은 내렸다. 이게 바로 '시골인심의 정체'라는 생각이었다. 농촌사회는 도시사회랑 다르다. 농촌사회의 특징으로 꼽는 것이 시골 인심 혹은 '오지랖'(오지랖이 넓다)이다. 나는 농촌의 중요한 특징이 오지랖에 더해 한 가지 더 꼽는다면 '밥'이라고 말하고 싶다.

종종 "농촌 사람들은 오지랖이 넓어서 선을 안 지킨다"는 얘기를 듣는다. 농촌사회는 기본적으로 가족, 친척끼리 어울려 살았던 곳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잘 안다. 그러다 보니 이웃들에 대해서도 가족, 친척 같은 가까운 관계를 맺으려 한다.

특히 귀촌한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마을에 해를 끼칠 사람인지 도움을 줄 사람인지 관심이 많다. 가깝게 지낼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면 웬만해선 친해지기 어려울 수도 있다.
 
오두마을 주민들이 동짓날 팥 칼국수를 나눠 먹고 있다.
▲ 2020년 오두마을 동지 팥 칼국수 오두마을 주민들이 동짓날 팥 칼국수를 나눠 먹고 있다.
ⓒ 한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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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마을 주민들이 과일을 나눠먹고 있다.
▲ 과일간식 오두마을 주민들이 과일을 나눠먹고 있다.
ⓒ 한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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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오지랖이라 불리는 것이 도시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따뜻한 관심으로 다가 올 때도 있다. 마을 아짐분들을 만나 뵈면 인사처럼 항상 '집에서 밥은 잘 해 먹는지, 반찬은 안 떨어졌는지' 물어보신다. 그리고 '언제든지 반찬 떨어지면 얘기해'라고 하신다. 말씀드리지 않아도 이것저것 음식을 가져다주신다. 그러다 보니 집에는 귀농 형님이 직접 수확하신 햅쌀, 아짐이 직접 담그신 된장, 고추장, 이집 저집에서 받은 김치들이 항상 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런 관심의 표현으로 집 대문을 불쑥 여는 사람도 있고, 지나치게 사생활을 캐묻는 사람도 있다. 도시사람 관점에선 불법적이거나,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할 만한 일들도 생기는 것이다. 농촌에 살기로 마음먹은 나는, 그저 한 발 물러나 이 마을 사람들은 도시와 다르게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살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이해하려고 한다.

주민들은 법적으로는 사유지인 곳을 마을길로 쓰기도 하고 이웃사람 땅에 자기 집이 걸쳐 있기도 하다. 농민들은 대부분 이웃사람 땅에 자기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농촌사회의 질서는 법 이전에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새롭게 터득한 농촌의 질서, 그중 하나가 바로 '밥'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농촌에서 밥에 인색한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이다. 반대로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받아도 웬만해선 밥에 대해 인색하지 않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주인댁에서 내 집에 불쑥 찾아온 것에 대해 공감하려고 노력해 봤다. 아마 '밥을 나눠주는 건 좋은 일이다'라는 생각이 있으셨을 것이다.

밥을 나눠주는 일이 빈집에 찾아가는 일에 비해 훨씬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빈집인 걸 알면서도 안에 먹을 것을 나눠 주신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여전히 받아들이진 못 했지만 머리로는 조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반찬이 한 가지이든 열 가지이든, 집이 잘 살든 형편이 어렵든 주민들은 동일한 생각을 갖고 계셨다. '어떤 손님이라도 식사자리에 초대했으면 배가 터지도록 음식을 내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흔히 말하는 인지상정(사람으로서 도리)인 것이다.

이렇게 한 가지를 알았다고 생각하니 많은 부분에서 마음이 놓이게 되었다. 왜 집에 초대될 때마다 밥을 한 공기만 먹으면 실망스러운 눈길을 주시는지 밥을 두 공기, 세 공기 먹기 전까지 집에 돌려보내지 않으시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알게 되니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내가 농촌사회에 녹아들기 위해선 밥이 정답이었다. 식사 자리에 초대되면 밥을 많이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또 내가 식사를 대접하긴 어려워도 항상 음료를 들고 다니는 습관이 생겼다. 고마운 일이 있을 때 , 반가운 일 좋은 일이 있을 때, 계기가 있을 때마다 음료를 나눠드린다. 나도 먹을 거에 인색한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인심과 오지랖 사이
 
오두마을이장이 주민들에게 명절 선물을 나눠주고 있다. 김(오두마을제공), 표고버섯(오두마을 버섯 사장님 제공)
▲ 오두마을 명절선물 오두마을이장이 주민들에게 명절 선물을 나눠주고 있다. 김(오두마을제공), 표고버섯(오두마을 버섯 사장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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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사소한 부분일 수 있지만 내가 갖고 있던 밥에 대한 생각과 주민들이 가지고 계시는 생각이 달랐다. 비단 밥뿐만 아니라 집, 마을, 가족, 땅에 대한 생각도 상당히 차이가 있다. 차이가 있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좀 더 관심을 가지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귀농귀촌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주민 분들 중에서도 "도시사람들은 불쑥불쑥 집에 찾아가면 불편해 해"라고 말하시며 많은 배려를 해주시는 분들도 계시고, "농촌에서 살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하는 분도 계신다.

이 차이를 좁히는 일은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랑 같은 시기에 귀농 형님의 지인으로 내려온 40대 누님이 한 분 계셨다. 그분은 나보다 훨씬 많은 '오지랖'을 경험하시는 것 같더니 결국 1년 즈음 후 오두마을을 떠나셨다. 나도 자물쇠를 채운 그 집에 더는 살지 못하고 앞집으로 이사를 간 터라 그 마음에 더 공감했다.

지금도 나는 농촌의 오지랖이 무조건 나쁘다고도 좋다고도 말하기 어렵다. 다만 나는 좋은 의도를 나에게 소담히 담아 전달해 주시는 분들과는 정을 돈독히 쌓고 있다. 그렇지 못한 주민들과는 여전히 거리감을 좁히지 못 하고 있다. 이사를 가고 난 뒤에 나는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인 정을 느끼며 다시금 집 자물쇠를 풀어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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