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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하철 노동자들이 어둠 속에서 분주히 작업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언더그라운드>의 한 장면.
 부산지하철 노동자들이 어둠 속에서 분주히 작업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언더그라운드>의 한 장면.
ⓒ 영화 <언더그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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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도깨비가 아니다. 우렁각시도 아니다. 차라리 이들이라면 밝아오는 태양만으로 알아챌 수 있었을 텐데. 우리는 우리의 '노동'을 알아채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플랫폼에서 지하철이 들어올 때 열차 그 아래쪽을 살펴 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저 바퀴, 발통, 지하철에 움직임을 주는 곳? 그 이상의 의미를 찾지 않는 그런 곳이다. 마치 우아하게 호수를 지치는 백조가 들어서듯, 내가 선 플랫폼에 미끄러져 들어오는 객차만 보인다. 지금은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어 더 그렇다.

나는 발통이라 불리는 아래쪽을 본 적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학원을 마치고 지하철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스크린 도어도 없고 SNS도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전해줄 편지를 꺼내 훑어보고 있었는데 무정차 열차가 지나치는 순간 편지는 플랫폼 아래 발통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때 처음 보았다. 열차 아래가 꽤나 깊고 복잡하다는 것을.
     
넓고 높은 작업장이다. 머리만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 깊이, 본적 있는 그 깊이 아래로 들어선 사람들이다.

객실 한 량엔 몇 사람이 들어설 수 있을까? 한국철도공사에 의하면 한 객실의 정원을 160명으로 본다고 한다. 출퇴근 러시아워처럼 꽉꽉 들어차 있을 땐 320명라고 하니 최소한 아침, 저녁 하루 4시간 이상 최대 중량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그 무게를 견딜 발통은 그래서 크고 깊겠고, 왜 화면에 그 아래에서 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머리만 보였는지 알 수가 있다. 어른 키만큼의 깊이로 객실을 받치며 달리는 발통의 생김새는 크고 단순하지 않았다.

고개를 한껏 젖히고 객실 아래에서 연결한다. 혼자 할 수 없는 작업. 연결한다는 것은 다 분리해 냈다는 말. 곧이어 장정 서넛이 민다. 단단하고 우람해 보이는 발통. 짝으로 붙어있는 쇳덩이. 그것을 사람이 레일 위에서 밀어 닦고 점검하고 연결한다. 혼자서 할 수 없는 작업. 객실의 아래 그곳이 열차 정비공들의 메인 작업장이다.

만일 내가 쓰는 자리에 컴퓨터를 매번 다 분리해 닦고 조립해 써야 한다고 하면 어떨까? 우리는 그런 수고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없다. 소비의 시대에 남의 노동을 수고롭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선택하고 지불하고 쓰면 된다. 내가 타던 지하철의 안전과 책임은 지하철 공사나 국가가 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매일 보이지 않는 그곳까지 누군가가 노동으로 책임지는 것인 줄 몰랐다. 감사한 노동으로 마련된 지하철 객실에 실려,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가치 있는 노동을 하러 사람들은 각자 출근하는 중이다.

특성화고 작업장에서 기술을 배우는 학생들이 보인다. 책상에 앉아 공부도 하고 선생님과 상담도 나눈다. 방금 전 화면에서 본 객실 아래에서 근무하는 친구도 있다. 실습처가 될 곳, 누군가에게는 취업처가 되는 곳. 지하철 정비공으로 취업이 된 어떤 학생에게 이런 질문이 있었던 거 같다. 왜 이곳에 취업하게 되었는지?

학생들 기준에서는 학교에서 기술점수가 좋고, 성실한 친구들이 순서대로 취업에 나설 것이다. 학생은 성실하다. 이 작업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인정할 것이다. 이게 저렇게 고생스럽게 해야 할 일이야? 라는 말이 나오는. 하지만 '시민의 안전' 문제에서 지나칠 수 없는 작업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곳의 일은 '중요성'만큼 중요하지 않은 '직업'이다.

학교에서 성실하다는 것은 이 모든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학생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학교생활 성실하고 좋은 석차를 유지하는 것이 학생의 생각대로 다양하고 제 기술을 온전히 뽐내어 볼 수 있는 그런 선택지를 주었을까? 근면성실, 바른 태도, 창의적 기술로 쥐어주지 않는 분명한 선이 존재한다.

왜 이곳에 취업하게 되었는지? 학생은 대답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 학생 뿐 아니라 비슷한 상황의 새내기 노동자들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코 그들의 준비가 미흡했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장면 얼떨떨한 학생의 표정은 내내 내게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남는다. 나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영화관을 나섰다.

밤. 낡은 셔틀이 올라간 그 앞으로 작은 트럭이 들어온다. 작업 도구와 노동자를 실은 차량은 어둠속으로 출발한다. 도착한 곳은 아무도 없는 심야의 레일 위. 불을 밝히고 정비 작업을 한다. 예전에는 모두 정규직이 했을 일이었지만 부분 부분 외주화되었고 밤의 일은 점점 더 관심 밖의 일이 되고 있다. 더 깊은 어둠 속. 터널 안에서 레일을 두드리며 걷는다. 한 번씩 자동화된 작업열차가 지나간다. 이제 막 일하기 시작한 새내기 노동자는 앳된 눈빛으로 질문한다. 정규직이라 저렇게 더 편리한 차량을 이용하겠죠?

정규직이라는 말이 이렇게 쓰리게 다가와야 하는 말일까. 이제 막 사회에 들어선 20살 노동자의 첫발이 참 차고 쓰리다. 이런 하청노동엔 답이 없다. 오래 버티는 사람도 없다. 박봉에 시달리면서 이곳이 아닌 어딘가 나의 노동력이 팔릴 곳을 생각해 보고 있어야 한다. 일을 하면서도 매일 취준생이 되어 부족한 나를 채워야 한다. 여기에서 노동을 시작한 새내기 노동자가 지하철의 '안전을 보장 중'이라는 노동 가치를 느낄 자긍심을 갖기에는 사회가 너무 초라한 점수와 임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선뜻 이곳으로 다시 불러준 동지 덕에 나는 <언더그라운드>를 봤다.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철도노조에서 상영한대"가 전부인 채로. 노조 조끼, 아마도 활동 중인 사람들이 보인다. 인사를 하고 어두워지고 그리고 화면 안에서 나와 나의 주변을 본다.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잣대만으로 이들의 노동을 줄 세울 수 없다. 나의 노동도, 너의 노동도 그렇다.

좁은 방. 연두색 유니폼의 그녀들이 모여 있다. 60~70년대 단칸방 신세. 광활한 역사, 청소노동을 하려면 옆으로 뉘인 여기 어두운 휴식처는 그녀들에게 유일한 재생처다. 이들의 노동은 밤낮 구별이 없다. 승객이 없을 땐 나라면 몇 개월에 한번 할까한 대청소를 벌인다. 승객이 있는 밝은 낮에도 역사를 빛나게 닦아주고 시원하게 뚫어준다. 다만 청소노동자, 그들의 휴식처는 늘 어두운 밤이다.

역사에 많은 것들을 남기고 간 사람들을 대신해 그들은 이곳을 닦는다. 고되고 쉽지 않은 일이지만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노래를 불러준다. "우리는 그렇게 넘기며 매일을 청소한단다. 내 삶도 그렇게 넘기며 살아가고 있지. 빛나게 닦은 만큼 우리 쉴 곳이 밝진 않아. 그렇다고 청소일을 쉽게 하지도 않지" 그런 말을 내게 하는 것 같았다.

다큐멘터리 <언더그라운드>는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버스를 타라>를 만든 김정근 감독의 작품이다. 작품은 부산 지하철 노동자의 노동과정을 설명하지 않고 렌즈의 심도를 깊게 맞춰 보여준다. 영화를 생각하니 지하철 노동자들의 노동과정, 그대로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이 장면, 장면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들이 빛나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당신의 발 아래, 빛나는 노동의 궤적."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있을까. 자꾸만 보이지 않는 어딘가로 감추어지는 우리의 노동, 그렇지만 무엇보다 빛나는 노동. 그리고 그 노동의 궤적을 보여주는 영화 <언더그라운드>. 사람들이 영화를 본 후 보였어야 하는데 가려진 노동에 대해 이야기 나눴으면 한다.

혹은 자신의 노동에 대해 이야기 해보아도 좋겠다. 내가 먹는 저녁, 내가 보는 TV, 내가 타는 버스… 어떤 것도 많은 노동자의 수고를 거치지 않은 것들이 없다. 알고 보면 우리는 서로의 수고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 한번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홍코알라님이 작성하셨습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 11월호에 연재한 글입니다.


태그:#영화_언더그라운드, #부산지하철_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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