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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친구 문제로 많이 힘들었다. 단짝이 된 친구와 마음이 맞지 않았는데 주도적인 성향의 친구에게 끌려 다니느라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런 생활이 버거워 학교 가기가 끔찍하게 싫었던 때도 있다. 그런데도 또래 관계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라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척하느라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그러고 집에 돌아오면 피곤했고 내가 무능한 것 같아 화가 났다.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다. 집에서는 잔뜩 화가 난 사람처럼 얼굴에 힘을 주고 표정을 굳히고 있었지만 실은 누군가 괜찮냐고 물어주길 바랐던 것 같다. 
 
델핀 드 비강 지음 '충실한 마음'
 델핀 드 비강 지음 "충실한 마음"
ⓒ 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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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핀 드 비강의 소설 <충실한 마음>(윤석헌 옮김, 레모)에는 부모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숨기는 열세 살의 테오가 등장한다. 이혼한 부모의 집에서 일주일씩 번갈아 지내는 테오는 우울증으로 망가져가는 아빠를 홀로 지켜본다. 아빠 집에서 돌아온 테오를 안아주지도 않고 적대감을 드러내는 엄마.

증오심으로 전 남편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엄마는 테오가 아빠와 보낸 시간을 없는 것처럼 치부한다. 그런 엄마 앞에서 테오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훈련한다. 아빠 때문에 두렵고 무섭지만 도움을 청할 어른이 가까이에 없다. 테오는 절박한 마음을 무뎌지게 하려고 몰래 술을 마신다. 

어린 테오는 아빠의 비밀은 지켜줘야 하고 엄마에게는 상처를 주면 안 된다고 믿는다. 아빠와 엄마 둘 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 사랑하는 부모를 보호하려는 마음 때문에 자신에게 상처를 내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아이들은 믿음으로 인해 저주를 받는다"는 플래너리 오코너의 말처럼 테오의 믿음과 충실함이 아이의 삶을 망가뜨린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느끼면서 테오는 누군가 이러한 상황을 알아채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아빠는 죽을 것 같아 무섭고 엄마의 증오와 무관심은 몸에 난 상처처럼 아파서. 다행스러운 건 테오의 신호를 감지하는 어른이 한 명 있다는 것이다.

테오의 담임선생 엘렌. 어려서 아빠에게 학대받은 경험이 있는 그녀는 아이의 충혈된 눈과 어눌한 말투, 회피하는 태도에서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 드러난 증거가 없어 모두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데도 그녀만은 의심하고 질문하며 테오와 그 주변을 지켜본다. 마음이 울리는 경보를 무시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충실한 마음이 위기 상황에서 테오를 구한다.  
 
"충실한 마음.(…)몸속 어딘가 잠들어 있는 어린 시절의 법칙, 우리를 바로 서게 하는 가치, 저항하게 하는 근거, 우리를 갉아먹고 가두는, 해독할 수 없는 원칙. 우리의 날개이자 굴레."
11쪽, <충실한 마음>, 델핀 드 비강

델핀 드 비강은 소설의 첫 페이지에서 '충실한 마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를 바로 서게 하는 가치'이면서 '우리를 갉아먹고 가두는 굴레'이기도 한 것. 이야기는 굴레로서의 충실함과 지켜야 할 가치로서의 충실함을 나란히 보여주며 맹목적 충실함이 만드는 상처와 고통, 무관심과 증오를 살펴본다.

특히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거짓된 충실함이 서로를 어떻게 고립시키는지 이혼 가정과 청소년 음주, 사이버 공간에서의 혐오 표현 등 최근 이슈를 통해 풀어낸다. 그 고민이 다다른 지점에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 타인(특히 여리고 미성숙한 아이들)에게 잘못된 믿음을 심어 주지 않기 위해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다. 무해한 어른이 되기 위해 우리 안의 믿음을 의심하고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은 중요하다. 

아이들은 어른의 기분과 집안의 분위기를 감각적으로 알아채는 능력이 있다. 어떻게 하면 엄마 아빠가 좋아하고, 어떤 걸 싫어하는지 파악하고 나면 그 틀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다. 어린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엄마가 걱정할 것을 걱정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아프거나 속상한 일이 있어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어리고 여렸던 마음은 부모님이 좋아하는 방식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러느라 내 마음을 숨기고 억눌렀고 부정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표출했다. 싸늘하고 냉랭하게 표정을 굳히고 있던 사춘기 시절, 닫힌 표정 안에 SOS 신호를 숨기고 있던 건 아닐까. 누가 내 마음을 알아채 주면 좋겠다고, 힘들고 벅차다는 걸 이해해주고 같이 울어주면 좋겠다고.

며칠 전 아이의 이를 닦아 주는데 입술 아래 옴폭 들어간 부분에서 타박상을 발견했다. 어디에 부딪힌 건지 푸르게 멍이 들고 군데군데 실핏줄이 터져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었다. 갑자기 발견한 타박상에 놀라 넘어졌냐고 물었더니 아이는 모르겠다고 했다. 어린이집에서 놀다 그랬냐고 해도 기억이 안 난다고 얼버무리는 아이를 보며 가슴이 철렁했다. 상처를 보니 꽤나 아팠을 것 같은데 아프다는 내색도 없는 모습에서 뭘 숨기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때로는 아플 때 아프다고,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는 게 어렵다.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쉽지 않다. 우리 사회가 더 강인해지길, 아픔을 내보이지 말 길 강요하는 면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감정을 드러내고 주변에 쉽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회가 위험을 예방하고 사람들을 건강하게 하지 않을까.

아이가 아플 때 아프다고 큰 소리로 울었으면 좋겠다. 아이의 울음을 억지로 그치게 하지 않고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엄마이고 싶다. 건강하게 자신의 상처를 표현하고 타인과 나누는 법을 아이와 함께 배울 수 있길 바란다.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부끄러운 게 아니고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건 나약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우리는 저마다 고유한 통점을 가지고 있고 그걸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연약함을 드러내는 이를 무능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사회가, 부당한 고통을 인내하라고 강요하는 사회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곁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고 다른 기척에 예민하게 반응해주는 사회이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우선은 자신의 연약함에 너그러워져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감정을 보살피고 건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너그러움이 타인의 연약함까지 포용하게 해 줄 것 같다. 내 마음을 보살피는 충실함이 타인의 표정까지 돌아보는 충실함의 바탕이 되어 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충실한 마음

델핀 드 비강 (지은이), 윤석헌 (옮긴이), 레모(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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