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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에 김 전 대통령이 1993년 받은 '무궁화대훈장'이 놓여져 있다.
 2015년 11월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에 김 전 대통령이 1993년 받은 "무궁화대훈장"이 놓여져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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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1월 22일)은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6주기다. 김영삼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14대 대통령으로서 한국 현대사에 매우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서거 6주기에 맞춰 그가 남긴 역사적 유산을 생각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김영삼의 역사적 무게를 고려할 때 다양한 영역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기사에서는 김영삼과 김대중과의 관계를 분석 대상으로 하고 두 사람의 관계를 '협력과 연대'의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김영삼과 김대중, 김대중과 김영삼 두 인물의 관계는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상을 갖는다. 그 이유는 두 인물은 최대 라이벌임과 동시에 최고 협력자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두 인물의 관계를 보면 '경쟁과 협력' '대립과 연대'라는 상호모순적인 성격이 오랜 기간에 걸쳐서 주기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그런데 요즘 두 인물에 대한 이해와 평가는 주로 대립과 경쟁 측면에서 다뤄지고 있다. 비교적 최근의 일인 1987년 단일화 실패, 1990년 3당 합당 이후의 역사가 현재에도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그래서 두 인물의 협력과 연대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은 많이 잊히고 있다. 특히 최근에 정치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2030 젊은 세대는 이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잘 모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들은 두 인물의 관계를 부정적 측면에서 이해하는 경우가 잦다. 현재와 같은 상황은 한국 정치와 역사에 대한 일면적인 이해와 해석을 낳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또한 이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두 인물이 대표하는 야당의 역할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와 평가를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김영삼 대통령 서거 6주기를 맞아 22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공개한 1983년 김영삼 단식투쟁 당시 김영삼-김대중의 협력과 연대와 관련된 사료(1983년 5월 20일 김대중이 김영삼에게 보낸 전문(電文), 1983년 5월 24일 김대중의 김영삼 단식투쟁 지지 성명서)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글에서는 이 자료와 관련된 내용에 기초해서 두 인물의 협력과 연대의 역사와 그것의 현재적 함의 등에 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1983년 김영삼 단식투쟁의 역사적 의미
 
1983년 5월, 23일 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모습.
▲ 김영삼 전 대통령 단식투쟁 1983년 5월, 23일 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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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은 1980년 5월 광주학살을 통해 집권했다. 광주에서 수천 명의 시민들을 살상할 정도로 전두환 정권의 잔혹함과 폭력성은 극에 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두환 정권 초기 한국 민주화 운동은 침체돼 있었다.

그리고 광주항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으로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체포되고 수감됐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의 중심 세력 형성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자신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는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의 자유를 제한했다. 그래서 이 시기 민주화 운동은 제대로 전개되지 못했다.

김영삼은 이와 같은 상황이 지속될 경우 국민들이 민주화에 대한 희망을 잃게 되면서 전두환 정권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을 크게 우려했다. 그래서 김영삼은 이와 같은 분위기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김영삼이 생각한 방식은 단식투쟁이었고 시기는 광주항쟁 발생 3주년이 되는 1983년 5월 18일이었다. 단식투쟁은 폭압적인 전두환 정권의 허점을 찌르는 매우 효과적인 투쟁방식이었다. 또한 김영삼은 5월 18일부터 단식투쟁을 시작해 광주항쟁에서 희생된 수많은 민주열사의 뜻을 계승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이는 광주학살이라는 원죄를 갖고 있는 전두환 정권의 치명적인 약점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1983년 5월 18일부터 시작된 김영삼의 단식투쟁은 시기와 방식 모두 국내외적인 관심을 촉발시켜 전두환 정권에 큰 부담을 줬다. 김영삼의 단식투쟁은 6월 9일까지 무려 23일간 지속됐다. 특히 당시 김영삼은 55세로서 적지 않은 나이였기 때문에 그의 단식투쟁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이는 정치적 국면전환에 있어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김영삼의 진면목을 확인시켜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미국에서 김영삼의 활동을 지원한 김대중
 
1983년 5월 20일 김대중이 김영삼에게 보낸 전문 내용 친필본.
 1983년 5월 20일 김대중이 김영삼에게 보낸 전문 내용 친필본.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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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김영삼의 단식투쟁은 전두환 정권 초기 억눌려 있던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고취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한국 민주화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당시 미국 망명 중에 있던 김대중이다. 김대중은 1982년 12월 23일 미국으로 출국하면서 2차 미국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김영삼의 단식투쟁 소식을 들은 김대중은 김영삼에 대한 지원활동을 전개했다. 먼저 1983년 5월 20일 김영삼에게 전보를 보냈다.
 
민주회복을 위한 귀하의 투쟁에 감사하오며 하느님이 귀하를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우리 재미동포와 미국의 민주인사들이 다같이 귀하의 투쟁에 합세하며, 성원을 다하기로 결심하고 있읍니다. 반듯이 건강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 1983년 5월 20일 김대중이 김영삼에게 보낸 전문(電文) -
 
김대중이 1983년 5월 24일 김영삼에게 보낸 지지성명서.
 김대중이 1983년 5월 24일 김영삼에게 보낸 지지성명서.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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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5월 24일에는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서에 김대중은 전두환 정권의 잘못된 행태를 비판함과 동시에 자신의 입장을 세 가지로 밝혔다. 첫째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 조치를 취할 것, 둘째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는 미국 행정부의 정책 전환 촉구, 셋째 김영삼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와 연대 의사 확인 등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김대중은 6월 5일에는 지지강연을 했으며, 6월 9일에는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 '김영삼의 단식투쟁(Kim's Hunger Strike)'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기고문에서 김대중은 김영삼의 단식투쟁이 한국 민주화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평가하고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는 미국 정부의 대한정책은 문제가 많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처럼 김대중은 다양한 방식으로 김영삼의 단식투쟁을 지지하고 이에 대한 지원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김대중의 지원활동은 미국에서 한국 민주화에 대한 관심 제고에 기여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미국 사회에서 김영삼에 대한 인지도도 상승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한국 민주화에 기여한 결정적 두 장면
 
그리고 이때 확인된 두 사람의 연대는 1984년 5월 18일 민추협 결성으로 이어졌다. 민추협은 재야정치인들의 결사체라고 할 수 있다. 재야정치인이라는 개념은 유신 이후 정치활동의 자유가 제한되면서 나타난 현상과 관련이 있다.

민추협은 김대중-김영삼 공동연대와 민주화 투쟁을 위한 결사체였으며 1985년 2.12 총선 돌풍의 주역인 신민당의 사실상의 모태 역할을 했다. 1985년 2.12 총선에서의 신민당 돌풍은 1987년 6월 항쟁의 중요한 정치사회적 배경이 됐다. 그러므로 1983년 김영삼 단식 투쟁 이후 형성된 김영삼-김대중의 협력과 연대는 1987년 6월 항쟁의 기반이 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협력과 연대는 유신 정권을 붕괴시키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대중은 1979년 5월 30일에 개최된 신민당 총재 선거에서 김영삼을 지지했다. 당시 김영삼은 중도통합론을 내세운 이철승 후보와 당권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김대중이 김영삼을 지지해 김영삼이 총재가 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김대중은 이철승과 사적인 인연이 김영삼보다 더 깊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철승과 김대중은 민주당 신파 출신이며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 결선투표에서 이철승 세력의 상당수가 김대중을 지지해 김대중이 김영삼을 상대로 역전승할 수 있었다.

김영삼은 구파 출신이며 1967년 원내총무, 1970년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 등에서 김대중과 경쟁관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유신 체제를 상대로 한 투쟁에 있어 선명야당을 내세운 김영삼이 총재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김영삼을 지지했다.
 
유신 정권 시절 당시 야당은 무력화된 상태였다. 그런데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가 되고 난 이후 'YH여공 사건'에서 보듯 유신 체제 하에서 고통받던 사회적 약자들이 당시 야당을 협력자로 인식하게 됐다. 그래서 야당과 사회 세력 사이의 연대가 이뤄지기 시작했으며 이는 유신체제에 큰 부담을 주게 됐다.

이미 지나칠 정도로 경직된 유신정권은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수렴하는 등 유연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결국 유신 정권은 극단적인 강경책을 동원해서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이라는 사상 초유의 폭거를 자행했다. 이는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유신 체제 내부의 내분에 의해서 결국 10.26이 발생하게 됐다.
  
김영삼-김대중의 관계를 협력과 연대의 관점에서 살펴봐야 할 필요성
  
1987년 7월 16일, 6월 항쟁의 승리로 석방 직후 행진하고 있는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
 1987년 7월 16일, 6월 항쟁의 승리로 석방 직후 행진하고 있는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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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김영삼과 김대중의 협력과 연대는 앞에서 살펴본 전두환 정권을 상대로 투쟁뿐만 아니라 박정희 정권을 상대로 한 투쟁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한국 민주화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한국이 처한 지정학적, 역사적 조건을 감안할 때 한국의 민주화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연대와 협력이 갖는 의미는 크다.
 
한국은 준세계대전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전쟁을 경험했고 정전협정을 통해 전투만 종료했을 뿐 평화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결과 수십년간 불안한 평화 상태를 경험했다. 그래서 수시로 군사적 긴장이 조성되었으며 심지어 전쟁위기 상황까지 발생했다. 이러한 안보위기는 독재체제 형성과 유지에 있어 매우 큰 배경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여건에서 민주화를 이룬다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안보를 이유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억압이 정당화되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화는 오랜 기간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기에 김영삼과 김대중 두 인물의 협력과 연대는 독재에서 민주화로의 이행이 가능하도록 한 중요 요인 중의 하나였다.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한국의 민주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영삼과 김대중, 김대중과 김영삼에 대해서 대립과 경쟁의 관계에서만 주로 바라보는 일반적인 평가와 해석은 문제가 있다. 두 인물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보면 연대와 협력의 역사가 대립과 경쟁의 역사만큼 길다. 반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위해서는 두 사람의 연대와 협력의 역사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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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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