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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스기의 기병대
                                                                                             
도쿠가와 막부라는 거대한 세력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었는가? 요시다 쇼인의 꿈을 계승한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1839~1867)는 기병대(奇兵隊)라는 조직을 창설함으로써 답을 찾으려 했다. 기병이란 정규병의 반대되는 의미다. 기병대란 사무라이가 중심이었던 신분사회의 전투조직에 농민 등 무사가 아닌 신분이라도 입대를 가능하게 하여, 농병대(農兵隊)라고도 부른다. 기병대는 비무사계급을 입대시킴으로써, 서민들의 사기를 북돋우며 전투인원을 배가시킬 수 있는 조직을 뜻한다. 국민개병제로 나타나는 근대 징병제도와도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조직에 근대화된 신식무기로 무장하여, 훈련시킴으로써 막부라는 거대한 세력에 도전하여, 파고들 수 있는 틈새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 군사근대화에 힘을 쓴 사쓰마번과 동맹을 맺어 세력을 확대시키고 마침내 막부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시바 료타로가 사카모토 료마(坂本竜馬 1836~1867)와 함께 다카스기에 주목한 이유는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유신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카모토의 중재로 막부를 타도하는 중요한 연결고리인 삿초동맹(薩長同盟)이 이루어졌다. 다카스기와 사카모토 두 사람은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으로 생을 마감하는데, 메이지 유신이 개시하기 직전에 절명한다.

막부라는 거대한 권력에 대항하는 요시다의 저항과 옥사로 마친 그의 죽음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라는 의문에 대해, 작가 시바는 요시다와 다카스기의 이생에서의 시차로 설명하고 있다.

요시다 쇼인과 다카스기와의 나이 차는 9살이다. 요시다는 만 29세가 되는 1859년에 옥사를 하는데, 메이지유신 개시(1868년)와 9년의 시차가 벌어져 있다. 그 시차를 메우는 중심인물에 다카스기를 선보이고 있다.

다카스기는 메이지정부가 들어서기 1년전 시모노세끼에서 폐결핵으로 생을 마감하는데, 메이지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조슈번 출신들이 안타까워 하는 것은 막부에 대항한 그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시다와 다카스기가 추구하던 목표는 일본이 미국을 비롯한 서양제국에 꿀리지 않는 대등한 관계를 맺는 것이었는데, 반면교사가 바로 아편전쟁을 겪은 후 신음하는 중국이었다. 중국과 같이 서양세력에 의해 당하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막부타도를 통한 근대화였다.

요시다 쇼인이 일으킨 일탈행동은 학습욕구와 외부세계에 대한 동경에서 시작한다. 탈번하여 동북지방을 주유하면서, 당시 여러 학자들을 만나면서 외국정세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했다. 하지만, 페리함대가 우라가만에 입항했을 때, 아무런 허가없이 미군함에 승선하여 거부당하자, 자수하여 조슈번의 노산옥에 투옥된다.

시바가 요시다에 대해 비현실적이고 광적인 모습이라고 소개하는 대목은, 준비없이 외국을 견문하려한 무모한 시도였다. 이러한 허황된 시도를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가 실제로 외국견문을 통해 서구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스승의 이상을 현실세계로 끌어오게 된다.

요시다와 다카스기의 이상과 현실은 메이지 유신을 통한 근대화에 의해 부국강병을 이룩한 다음, 조선을 청에서 떼어놓아 일본의 영향권 안에 둔다면, 서양도 일본을 무시하지 못하고, 적어도 중국과 같은 굴욕은 받지 않을 것이라는 그림으로 확장되는 것이었다.

일본의 근대화는 메이지 유신 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확인이 되는데, 시바는 두 전쟁의 승리의 배경에는 임진왜란에서 조선수군에 패한 기억이 학습효과로 작용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러일전쟁에서 대한해협을 통과하는 발틱함대에 대해 정자(丁字) 전술로 함포사격을 할 때는 마치 조선수군에 당한 수모를 설욕하는 듯 한 장면으로 떠오른다.

소설가 시바가 한국출신 작가들에게 밝힌 술회에 따르면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실력발휘가 러일전쟁에서 멈춰야 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과연 두번의 승리를 맛본 일본이 대외침략이란 관성열차에서 하차하기가 쉬었을까? 조선병합이라는 어긋난 선택에 대해 고민한 흔적은 보이지만, 당시 보통 일본인이 가지고 있던 조선식민지에 대한 기대와는 멀리 떨어진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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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외형적인 성장과 함께 그 내면에 자리잡은 성숙도를 여러가지 측면에서 고민하면서 관찰하고 있는 일본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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