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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전이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로비
 박수근전이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로비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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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화백을 새롭게 조망한, 대규모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윤범모) 덕수궁관에서 내년 3월 1일까지 열린다.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과 공동주최다. 이번 전시에는 그의 유화, 수채화, 드로잉, 삽화 등 총 174점이 소개된다. 역대 최다 전시다. 무료입장이고 그동안 못 본 박수근 작품을 실컷 볼 기회가 왔다.

이 전시가 늦어진 이유에 대해 윤범모 관장은 "전시의 난이도가 높은 데다, 보험료가 고가이고 소장자 섭외가 힘들었다, 다른 전시에 비해 애로사항이 많았다"는 설명이다. 국립미술관에서 그의 회고전도 시작됐으니, 전 세계에 알릴 과제도 남게 되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한 김예진 국립 학예연구사는 다시 묻는다. "과연 우리는 박수근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가?" 김 학예사는 박수근을 단지 국민 화가로만 보지 않고 경제적 궁핍 속에서도 축적한 지성으로 당시 사회를 리얼하게 그려낸 모더니스트로 봤다.

박수근 덕수궁 전은 1층 1부-2부, 2층 3부-4부로 나뉜다. 노년층을 고려해 1층 2부에 그의 작품 에센스를 모았다. 1부 <밀레를 사랑한 소년>, 2부 <미군과 전람회>, 3부 <창신동 사람들>, 4부 <봄을 기다리는 나목>으로 나눈다.
 
박수근 I '나무와 두 여인' 캔버스에 유채 130×89cm 1962. 리움미술관 소장
 박수근 I "나무와 두 여인" 캔버스에 유채 130×89cm 1962. 리움미술관 소장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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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선 박수근이 12살 때 밀레 그림을 보고 감동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밀레는 '농부'를, 박수근은 '아낙'을 그림의 주인공 삼았는데 당시로는 유례가 없는 사건이다. 그는 밀레를 넘어 서양 유화로 한국적 도상을 잘 표출해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되고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비범한 것임을 그는 보여줬다.

2부에선 박수근 대표작 '나무와 두 여인'이 전시된다. 6·25 후 박수근은 생계로 미군PX에서 초상화가로 일했는데 거기서 박완서를 만난다. 그녀는 후에 <나목>을 써 소설가로 데뷔한다. 사실 이건 박수근이 그녀의 문학성을 자극해 글을 쓰게 한 것이다. 박완서는 이 소설에서 그를 시대의 추위를 맨몸으로 견뎌낸 한국인의 자화상 같은 '나목'에 비유했다.

3부에선 1950~1960년대 창신동 전성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이웃을 세속적 종교화처럼 그렸다. 생존에 거의 개인전을 못했지만, 미국 몇몇 컬렉터가 그를 알아보고 작품을 사줬다. 4부에선 박수근이 평생 그린 아낙과 나목 등이 주로 등장한다.

위에서 보듯 그의 마티에르(화면에 나타난 재질감)는 거칠고 울퉁불퉁한 '마애불' 화강석을 닮았다. 게다가 입체감과 추상효과를 내 현대적이다. 이건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발명품이다. 구성미는 단순하나 빼어나다. 절제된 색채는 여러 겹으로 물감이 합쳐진 거다. 그의 회화는 조각이고 판화이면서, 풍속화이고 영화장면 같다. 그래서 5차원으로 보인다.

박수근 어떤 화가였나?
 
1959년 창신동 자택 마루에서 박수근과 김복순 여사와 그의 딸
 1959년 창신동 자택 마루에서 박수근과 김복순 여사와 그의 딸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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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1914~1965)은 식민시대 31년, 분단시대 20년, 51년을 살았다. 어려서 부잣집이었으나 광산이 망하고 논답이 홍수로 쓸려가 가세가 기울면서 보통학교만 나왔다. 그래서 독학으로 1932(18살)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와 '국전'에 입선했다.

일제 강점기 그는 한국에는 미술잡지가 없기에 일본의 <미술수첩> 등을 수집해 봤다. 당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계열인 '폴록'도 접했고 '레제'와 '피카소' 그림도 모사했다.

그는 1940년 김복순 여사와 혼인 후 도청서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고향 근처 금성에서 여중미술교사도 했다. 북에서 교인이라 해서 감시가 심해 1950년 월남했다. 2년 후 서울에서 가족과 상봉했다. 1953년 국전에서 특선했고, 1957~1958년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서 전시가 열렸다. 1962년 국전 심사위원이 됐고, 1965년 간경화증 악화로 자택에서 별세했다.

일상과 예술, 한국과 서양의 화해
 
박수근 I '고목과 여인' 캔버스에 유채 45×38cm 1960대 전반. 리움미술관 소장
 박수근 I "고목과 여인" 캔버스에 유채 45×38cm 1960대 전반. 리움미술관 소장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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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였던 박수근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기독교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을 일치시켰다. 한국적 형태 속 기독교 내용을 담았다. 둘의 공통점은 '이웃사랑'과 '이웃간 정'이다. 근데 요즘 개신교는 변종 같다. 그는 또 충돌할 것 같은 일상과 예술을 화해시켰다. 이게 박수근의 천재성이다. 결국, 그는 동서를 넘는 인류보편성을 추구했다.

이런 그에게 서양에 대한 열등감이 전혀 안 보인다. 서양적 모방도 없었다. 그는 당시 서구미에 위축당할 법한데 그런 것도 없었다. 그런 자부심 때문인지 그의 삶 속에서 일체의 허무주의나 비관주의가 보이지 않는다.

아내와 자식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했던 그가 소외된 이웃에 관한 관심을 두었던 것은 자연스럽다. 그는 이 세상을 천국으로 알고 살았다. 신앙을 구실로 이 세상을 더럽다고 저주하거나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고단한 일상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여성을 '거룩한 성자'로 그리다
 
박수근 I '행인(왼쪽)' 나무판에 유채 1964. '귀로(오른쪽)' 하드보드에 유채 1962.
 박수근 I "행인(왼쪽)" 나무판에 유채 1964. "귀로(오른쪽)" 하드보드에 유채 1962.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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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그림은 대부분 여성과 아내에 대한 오마주다. 여성을 '거룩한 성자'로 그린다. 그림의 주인공이 아낙과 일하는 여성이다. 우리는 그들이 하는 일을 '살림'이라고 한다. 여성의 손길이 닿으면 모든 게 살아난다. 전후 보릿고개 남자들 실업자였을 때 여성이 행상으로 가족을 먹여 살렸다. 여성이 산업화의 초석을 일궈낸 주역이었던 것이다.

1964년 작 '행인'을 보면 아이를 업은 아낙과 짐을 머리에 인 세 명의 아낙, 당시로는 흔한 풍경이었는지 모르지만, 왠지 시대를 초월한 기념비적 풍경으로 다가온다.

1962년 작 '귀로(오른쪽)'를 봐도 그렇다. 여기 주인공은 곤한 일과를 마치고 가족을 만나려 흥분되어 총총걸음을 재촉한다. 보고 싶은 아이와 그리운 가족이 있는 곳으로 귀가하는 모습이 가슴 벅차고 장엄하게 보인다. 아무리 힘겨워도 이게 사는 게 아닌가 싶다.

봄을 기다릴 줄 아는 '나목', 박수근
 
박수근 I '노변의 행상' 캔버스에 유채 31.5×41cm 1956~1957 개인소장. 아래 박수근 일화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박수근 I "노변의 행상" 캔버스에 유채 31.5×41cm 1956~1957 개인소장. 아래 박수근 일화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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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그의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 몇 개를 소개한다.

<아내의 일기>에 나오는 일화다. 박수근이 창신동 살 때다. 밖에 비가 내려 부인이 남편을 기다리는데 행상을 하며 길에서 과일 파는 아주머니 셋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박수근은 과일을 한 곳에서 사지 않고 여러 곳에서 나눠 샀다. 부인이 왜냐고 물으니 "한 아주머니에게만 사면 딴 아주머니들이 섭섭하지 않겠어?"

또 다른 일화, 박수근은 1961년 일본 <국제자유미술전>에 출품을 했는데 주최 측에서 작품이 사라졌다는 통지가 왔다. 김 여사는 일본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냐고 했더니 그냥 두라고 했단다. 그 사람 돈은 없고 탐이 나서 그랬으니 얼마나 좋으냐, 작품 도난 당한 것도 영광이다"라고 오히려 기뻐했단다.

끝으로 흥미로운 그의 구혼 사건을 보자. 박수근은 김 여사를 보고 반했으나 뭐 하나 제대로 내세울 게 없었다. 여자 쪽에서 남자 쪽이 너무 없는 집안이라며 반대하자, 그럼에도 그는 순정으로 밀어붙였다. 아예 며칠 굶고 앓아 누었다. 우여곡절 끝에 혼인 허락을 받아냈다.

아래는 그 편지 중 일부다. 
 
"나는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 부농가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고운 옷에 갓신만 신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 광산사업이 실패하고 물에 전답이 떠내려가서 우리 집은 그만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귀여운 당신을 내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 온 내 아내상은 당신 같이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내 배필로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결론으로 박완서 말대로 그는 봄을 기다릴 줄 아는 '나목' 같은 화가였다. 난고 속에서도 사람과 세상을 따뜻하게 보고, 꽃도 나무도 혈육처럼 그렸다. 우리는 이 코로나시대에 한 예술가로 만이 아니라 일상 속에 숨겨진 기쁨을 찾아내며 노상의 나무처럼 꿋꿋하게 살아낸 한 생활인으로서 그를 그리워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홈 페이지 https://www.mmca.go.kr/contents.do?menuId=9051001526


태그:#박수근, #박완서, #나무와 두 나무, #김복순, #나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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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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