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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2월 5일 민자당이 새당명을 '신한국당'으로 사용함에 따라 중앙당사 현관에 설치됐던 민주자유당 입간판이 철거되고 있다.
 1995년 12월 5일 민자당이 새당명을 "신한국당"으로 사용함에 따라 중앙당사 현관에 설치됐던 민주자유당 입간판이 철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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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이루어진 3당통합은 어떤 배경에서 가능했을까.

노태우ㆍ김영삼ㆍ김종필의 자의였을까, 아니면 달리 배후가 있었을까. 당시 문익환ㆍ서경원ㆍ임수경의 방북(밀입북) 사건이 일어나고, 대륙세력 중국과 소련에서 거대한 변화가 일고 있었다.

3당합당 직전 당시 김대중 평민당 총재의 측근이었던 김아무개씨는 이런 말을 했다.

"3당합당이 성사되기 몇 달 전 나는 미국에서 CIA요원을 만났다. 그는 '평민당이 민정당과 합치는 방향으로 노력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나는 정치적 기반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런 합당은 도저히 성사될 수 없다면서 노(NO)했다. 그랬었기 때문에 나는 통일민주당을 주요 상대로 한 3당합당이 성사됐을 때 전혀 놀라지 않았고 3당합당의 배후에 CIA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직감했다."

미정보기관 소식에 밝은 한 소식통은 3당합당 아이디어 창출에 미정보기관이 개입한 과정은 이렇다고 주장했다.

"3당합당 아이디어의 시원이 어디였는지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 시원은 서울의 한 호텔에 모인 세 사람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 3인은 김아무개 예비역 장군, 차 아무개 목사, 그리고 전중앙정보부 감찰과장 김 아무개씨다. 이들은 모두 각각 워싱턴 정계와 손을 잡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 3당합당 아이디어는 어떤 라인을 타고 워싱턴 정보기관으로 들어갔고, 그것이 다시 청와대로 들어간 것이다. 김예비역 장군은 노대통령과 절친한 사이였고, 차목사는 김영삼통일민주당 총재의 대미창구의 하나였으며, 중앙정보부 출신 김씨는 친CIA 거두인 이후락 전중앙정보부장의 직계로 정보정치에 밝았다." (주석 11)
 
1990년의 민자당 3당합당
 1990년의 민자당 3당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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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야당 총재로서 5공청산과 정치개혁을 주도했던 김대중과 평민당은 하루아침에 군소야당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5공청산과 정치개혁에 대한 리더십과 동력은 크게 떨어지고, 세상은 민자당의 천하가 되었다.

3당합당 뒤 2월 20일부터 제148회 국회가 열렸다. 김대중은 대표연설을 통해 3당합당을 비판하고 정치개혁의 추진을 역설했다.

3당통합은 반민주적 쿠데타로 총선을 실시, 이에 대한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총선은 다가오는 지방의회 선거와 함께 치를 것을 제안하며 민자당이 이러한 제안을 수용하지 않을 때는 1,000만인 서명운동 등 국민적 투쟁을 전개하겠다. 누가 야당으로 당선된 사람이 마음대로 여당이 되어도 좋다고 했는가. 국민심판을 받아야 한다. 최근의 심각한 민생치안 문제는 부익부 빈익빈의 불공정분배, 힘의 정치영향 등에 그 원인이 있다. 노정권이 다가오는 가을까지 민생문제를 해결 못하면 정권퇴진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주석 12)    

한국 전통(정통) 야당의 뿌리는 1954년 11월 29일 이승만이 시사오입 개헌으로 영구집권을 획책하자 신익희ㆍ장면ㆍ곽상훈ㆍ백남훈ㆍ조병옥 등 민국당계열, 흥사단계ㆍ자유당 탈당파ㆍ무소속의원들이 결집하여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956년 5ㆍ15정부통령 선거 투표일 직전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가 사망하여 수평적 정권교체가 무산되고, 1960년 3ㆍ15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후보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번에도 정권교체가 무산되었다. 4ㆍ19혁명으로 내각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장면이 국무총리에 인준되어 민주당 정부가 수립되었다. 
 
경남에서 한나라당(옛 민자당)의 20년 독주 계기가 되었던 3당 합당
 경남에서 한나라당(옛 민자당)의 20년 독주 계기가 되었던 3당 합당
ⓒ 이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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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61년 박정희 중심의 5ㆍ16쿠데타로 정당이 해산되고, 1963년 7월 박순천을 총재로 하는 민주당이 창당, 1965년 야권통합으로 민중당 창당(총재 박순천), 1965년 한일협정 비준문제로 민중당 강경파가 탈당하여 신한당을 창당했다.(윤보선 총재)

1967년 민중당과 신한당의 합당으로 신민당 창당(총재 유진오), 1971년 김대중 대통령후보 지명, 1972년 유신쿠데타로 정당활동 중지, 1978년 김영삼 신민당 총재 선출, 1980년 신군부에  의한 정치활동금지, 신민당 해산, 1981년 민주한국당창당(총재 유치송),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발족, 1985년 신한민주당 창당(총재 이민우), 1987년 통일민주당창당(총재 김영삼), 1987년 평화민주당 창당(총재 김대중)으로 이어졌다.

정통야당의 큰 산맥이었던 통일민주당이 군사독재의 후계정당과 합당함으로써 한국의 전통야당의 맥은 평민당이 승계하게 되었다. 평민당은 정통야당의 위치와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주석
11> 오연호, 「김영삼시대 자주의 빈곤」, 『우리 현대사의 숨은그림찾기』, 245~246쪽,『월간 말』, 1994. 
12> 『국회본회의 속기록』, 1990년 2월 27일.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평화민주당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평화민주당, #평화민주당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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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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