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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에서 한나라당(옛 민자당)의 20년 독주 계기가 되었던 3당 합당
 경남에서 한나라당(옛 민자당)의 20년 독주 계기가 되었던 3당 합당
ⓒ 이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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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권은 차츰 평민당이 강경하게 주장한 5공핵심 6인의 사법처리를 비롯하여 청문회에서 드러난 각종 비리처리에 대한 비협조적 태도, 문익환ㆍ황석영ㆍ서경원 등의 방북사건, 울산사태 등 잇단 시국사건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하면서 5공청산 작업을 크게 위축시켰다.

여기에 5공핵심 6인의 사법처리 문제에 관해 김영삼ㆍ김종필 측이 3야 간의 합의선에서 후퇴, 민정당 쪽에 기욺으로써 야3당 공조체제를 흔들고 5공청산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평민당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야권공조체제가 무너지면서 5공청산작업은 지지부진해졌고, 1989년 12월 15일 청와대 여야 영수회담 끝에 ① 전두환의 1회 국회증언 및 녹화중계 ② 정호용ㆍ이희성의 공직사퇴, 이원조의 고발 ③ 광주시민의 명예회복 및 보상을 위한 입법추진 등 11개항의 타협안에 합의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12월 31일의 전두환 국회증언은 광주 발포문제를 '자위권발동'이라고 강변하는 등 변명으로 일관, 여야에서 의원들의 야유와 폭언 속에 파행적으로 끝났다. 이로써 국민의 여망을 담은 5공청산작업은 큰 성과 없이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1990년 1월 22일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과 민주당 김영삼 총재, 공화당 김종필 총재는 청와대에서 회동, 3당통합에 의한 신당 창당 및 각당에서 5인씩 15명으로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키로 한다는 합의문을 발표했다. 이에 앞서 평민당 김총재는 노태우로부터 합당  제안을 받았으나, 국민의 뜻에 따라 정해진 정당구도를 임의로 바꿔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이날 노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양옆에 김영삼과 김종필을 세워놓고 3당통합 사실을 발표하여 그야말로 정계의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이들 3인은 회담을 끝낸 뒤 청와대 접견실에서 〈새로운 역사창조를 위한 공동선언〉을 발표, 통합신당은 온건중도의 민족 민주세력의 통합을 통한 새로운 국민정당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1988년 4ㆍ26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로 출범한 지 2년여 만에 국민의 뜻과는 상관없이 '여대야소'로 탈바꿈시킨 3당통합은 많은 곡절을 겪으면서 90년대 정국의 돌연변수로 등장했다. 3당통합을 선언한 민정ㆍ민주ㆍ공화당은 합당을 위한 전당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신당창당으로 가는 3당의 15인통합추진위원회는 1월 24일 첫 회의에서 '민자당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통합에 박차를 가해 2월 9일 민주자유당(민자당) 합당대회를 열었다.

민자당은 지도체제를 총재 노태우, 대표최고위원 김영삼, 최고위원 김종필로 선정하고, 강령으로 ①성숙한 민주정치 구현 ②지속적인 경제성장, 복지경제 실현 ③공동체사회 구축 ④교육의 자율성과 기회균등의 보장 ⑤평화적 민족통일과 자주적 외교노력 등 5개항을 채택했다.  

민자당은 3당합당으로 총의석수 221석을 확보, 개헌선인 원내 3분의 2 의석 이상이 되었다. 여소야대 원내구도가 거대한 여당과 왜소한 야당으로 뒤바뀌게 된 것이다. 3당야합에는 민주당 소속의 노무현ㆍ이기택ㆍ김정길ㆍ김광일 의원 등이 불참을 선언했다. 

전격적인 3당야합과 공룡 같은 여당의 등장에 제1야당 평민당은 거센 반발을 보였다. 평민당은 1월 23일 의원총회 및 당무지도위원 연석회의에서 노 대통령의 위약과 두 야당총재의 정치적 변신을 신랄히 규탄했다.

3당통합은 총선민의를 저버린 정치적 야합행위이기 때문에 국회의원 전원이 사퇴하고 총선에서 다시 국민의사를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평민당은 이와함께 내각제 개헌을 반대하기 위한 1천만 명 서명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하는 등 강경한 대여투쟁에 나섰다.

단시일 내에 거대여당으로 돌변한 민자당은 '한 지붕 세 가족'이라는 세평대로 사사건건 계파별로 집안싸움을 벌이는 가운데 특히 내각제 합의각서 유출사건을 계기로 심각한 대립상을 보였다. 그리고 국회에서는 다수의 힘으로 변칙과 날치기를 자행하여 여야의 물리적인 대치상태를 불러왔다. 

3당야합은 상도동계의 정통야당 일각이 군사정권의 본류에 편승하고, 부산ㆍ경남의 전통적인 야당세력이 보수화현상을 가져오게 되면서 한국민주화에 크게 역행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5공 청문회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
 5공 청문회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
ⓒ 노무현 공식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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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민자당 불참을 선언한 민주당 노무현 의원 등 5명과 무소속의 박찬종ㆍ이철 의원 및 1987년 대통령 후보 단일화 운동에 앞장섰던 홍사덕ㆍ장기욱ㆍ조순형 전 의원 등은 새 야당 창당을 선언하고 가칭 민주당창당준비작업에 들어갔다.

또한 '진보적 대중정당 결성을 위한 준비모임'은 3당합당에 대한 성명을 발표, "3당합당을 통한 신당 창당은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여망을 배신하고 당리당략만을 위해 군사파쇼세력조차 보수세력으로 위장시켜 정치적 수명 연장을 노리는 파렴치한 정치 쿠데타"라고 비난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평화민주당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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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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