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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전 세계는 오랜 기간 기축통화(基軸通貨, Key currency) 전쟁을 벌여 오고 있다. 17세기의 스페인 달러가 19세기 금본위제와 영국 파운드로, 20세기엔 다시 미국 달러로 자리를 번갈아 가는 과정의 점철이다.

여전히 미국 달러가 기축통화이며, 이외에 4개 화폐가 국제통화기금(IMF)이 인정하는 특별인출권(SDR)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이 중 특히 2016년 SDR 지위를 얻은 중국 위안화가 미국 달러화의 위상을 위협하는 실정이다.
 
1912년 식민지 조선의 중앙은행으로 지어진 옛 한국은행 본관.
▲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1912년 식민지 조선의 중앙은행으로 지어진 옛 한국은행 본관.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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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전쟁 바탕은 자국의 화폐 가치를 지켜낼 국제적 공신력을 갖춘 경제력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렇듯 어느 국가든 화폐는 국제적 공신력을 갖춘 금융기관에서 발행되고 관리되어야 한다. 따라서 '발권 은행' 기능은 통상 중앙은행이 담당한다. 우리는 한국은행이 중앙은행이다.

중앙은행은 또한 화폐 가치를 유지해야 하고, 예금자에 대한 지불능력을 보장하는 '은행의 은행'으로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아울러 '정부 은행'으로서 국고 수납·지불 업무는 물론 국채발행·상환 업무를 대행한다.

우리의 경우 외환관리와 더불어 한국은행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로서 합의제인 금융통화위원회가 통화 및 신용에 관한 정책 수립과 이자율 결정, 한국은행 업무 및 관리에 관한 지시·감독을 수행하는 구조다. 이렇듯 한 나라의 중앙은행은 정치·군사 부문과 더불어 경제 발전계획과 관리를 담당하는 핵심기구로서, 나라의 미래를 짊어진 기관으로 그 기능을 다 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최초 중앙은행을 설립하려던 대한제국의 노력은 좌절되었고, 기울어 가는 나라 운명을 따라 일제 손아귀에서 중앙은행이 탄생하는 설움을 겪었다.

차관도입 노력

일본과 러시아가 비밀리에 체결한 '모스크바 의정서'가 1897년 3월 조선에 알려지자, 고종은 프랑스 공사 플랑시와 뮈텔 주교를 불러 대응 방안을 논의한다.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할 새로운 세력, 프랑스의 등장이다.

1898년 독립협회의 공화정 요구를 패퇴시킨 광무 정권은 그 보수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일본 손아귀에서 벗어날 노력을 기울인다. 1899년 들어 대한제국 재정(財政)을 이용익(李容翊)이 장악한다. 한국은 본위화폐 안정과 심각한 재정난 해소, 자립경제구축 등 재정 관련 현안이 산재하다.
 
井자 모양으로 지어진 조선은행 본점의 모형. 남대문로 일대가 모형으로 재현되어 있는 부분임.
▲ 모형도 조감 井자 모양으로 지어진 조선은행 본점의 모형. 남대문로 일대가 모형으로 재현되어 있는 부분임.
ⓒ 이영천(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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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익은 이의 타계 책으로 대규모 차관도입을 구상한다. 자본력을 키워 중앙은행 설립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플랑시 중개로 프랑스계 홍콩은행과 차관도입을 교섭하나 신통치 못하다.

이 교섭은 1900년 5월 운남(雲南)신디게이트(영·불 자본가가 중국 운남성 광산채굴을 위해 1896년 설립)의 대표인 프랑스 자본가 카잘리스(Cazalis) 방한으로 급진전 되어, 이듬해 4월 평양 탄광채굴권을 포함, 6개 조항으로 은화 500만 원 차관 도입계약이 성사된다. 한국의 해관(海關)세입이 담보다. 고종은 뒤이어 영국인 총세무사 브라운을 해고해 버린다.

이에 열강들 압력이 거세진다. 화들짝 놀란 영국은 인천에 군함을 띄워 무력 시위를 벌인다. 일본도 자국 제일은행 업무인 해관 운영에 위협 요인으로 여긴다. 미국과 러시아도 해관세(海關稅)를 담보로 하는 차관도입에 반대한다. 궁극적으로 모두가 프랑스 진출과 세력 확장을 염려한 것이다. 대한제국 내부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커진다.

결국 정부는 1902년 2월 운남신디게이트에 차관도입 거부를 선언해야만 했다. 궁지로 내몰린 처지에 심각한 부작용 우려에도 불구하고, 할 수 없이 백동화 주조를 더욱 늘려가는 수밖엔 도리가 없었다.

중앙은행 설립 시도

백동화 인플레이션은 심각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국가자본 축적에 큰 몫을 담당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용익은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중앙은행' 설립을 도모한다. 1903년 3월 '중앙은행조례'와 '태환금권(兌換金券, 금화나 금괴로 교환할 수 있도록 중앙은행이 발행한 지폐)조례'를 반포한다.

총자본금 300만 환(圜)의 중앙은행은, 해관세를 포함한 모든 세금과 국고금 수납을 담당하며 태환금권의 발행을 전담케 한다는 구상이다. 태환금권은 1환·5환·10환·50환·100환 등 5가지다.

이용익은 금괴 3만 개를 내장원(內藏院)으로 운반한다. 은행 본점을 남대문로 부근 옛 사자청(寫字廳) 자리로 정하고, 지소는 각 도(道)에 둔다는 방침이다. 보유 금화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태환금권 발행이 남발되면 백동화보다 더 큰 부작용이 생긴다는 내부 지적과 비판에도, 계획은 추진된다.

1903년 12월 전환국은 120만 원의 금괴를 확보하고 50전(半圓) 은화 150만 원 상당을 주조했으며, 1904년 4월엔 태환금권 및 백동화 어음의 인쇄도 시작한다. 그해 11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전환국이 폐쇄되기 전까지 주조나 저장한 화폐, 금, 은, 지금(地金, 제품으로 만들거나 세공하지 않은 황금) 총액을 추산하면 약 460만 환이다. 여기에 미포함된 화폐 액수 등을 고려해 보면 광무 정권은 중앙은행 설립을 통한 경제개혁에 충분한 자본력을 확보했음이 분명하다.
 
1911년 12월부터 발행한 조선 은행 1백 원 권.
▲ 조선은행권 1911년 12월부터 발행한 조선 은행 1백 원 권.
ⓒ 이영천(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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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월 강제로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이용익이 일본으로 납치되어 버린다. 8월엔 치욕적인 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어 재정을 장악당한다. 중앙은행 설립을 통해 화폐 및 경제주권을 되찾고 한반도에서 제멋대로 화폐를 발행하며 영업하며 외국은행, 특히 일본제일은행을 통제하려던 꿈은 일제 침범으로 무산되어 버린다.

일제가 세운 중앙은행

일본제일은행에 1905년 넘어간 엔화본위제 화폐 발행기능이, 1909년 11월 중앙은행인 '한국은행' 설립으로, 대한제국에 형식적으로 넘어온다. 그전 7월에 일제는 한국 정부에 '한국은행조례'를 제정·공포케 강제하고, 통감부 강압으로 8월에 '중앙은행에 관한 각서'를 교환한다.

뒤이어 일본 정·재계 인사를 동원해 구성한 창립위원회를 통해 중앙은행 설립업무를 진행 시킨다. 형식적으로 한국인 2인(한상룡, 백완혁)을 위원으로 참여시켜, 10월에 한국은행을 설립한다. 중앙은행으로서 한국은행은 태환은행권 발행, 일본 국고금 취급, 일본제일은행 발행 화폐 인수 및 소각 업무를 맡는다.
 
1926년 발행된 조선은행 주권. 10주짜리 1천원 권으로, 조선은행 자본금이 8천만원으로 증액되던 시점에 발행된 주권으로 추정.
▲ 조선은행주권 1926년 발행된 조선은행 주권. 10주짜리 1천원 권으로, 조선은행 자본금이 8천만원으로 증액되던 시점에 발행된 주권으로 추정.
ⓒ 이영천(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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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설립자본금은 1천만 원으로, 이의 조달을 위한 발행주식 10만 주 중 한국 정부가 3만 주를 떠안는다. 그러함에도 경영진에 단 한 사람의 한국인도 참여치 못하고,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되기에 이른다. 식민지화에 대한 일제의 자신감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중앙은행 설립을 계기로 재정 실권을 장악한 일제는 그해 11월 은행 업무를 개시한다. 기존 중앙은행 기능을 맡던 일본제일은행 업무를 인계받아 한국 식민화의 경제적 초석을 다진다. 1910년 8월 국권이 상실되고, 1911년 3월 '조선은행법'이 제정·공포된다. 명칭도 조선은행으로 바뀌고, 해방 때까지 식민 지배 중앙금융기관으로서 기능한다. 1950년에 이르러서야 중앙은행으로서 현재 한국은행이 재탄생하게 된다.

악랄한 집에 어울리지 않는 순한 얼굴
 
이토 히로부미 친필로 확인된 옛 한국은행 본관 정초석.
▲ 정초석 이토 히로부미 친필로 확인된 옛 한국은행 본관 정초석.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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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침략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 흔적이, 서울 한복판 건축물에 버젓이 남아있다. 한반도에 최초 중앙은행으로 탄생한 집이다. 지금은 화폐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옛 한국은행 본관 '정초(定礎)석'이다. 2020년 10월 문화재청은 이 글씨가 이토 친필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한다.
 
준공 3년 후 모습. 위압적인 건물 앞 거리에 전차와 보행자가 혼재한 모습이 보임.
▲ 조선은행(1915) 준공 3년 후 모습. 위압적인 건물 앞 거리에 전차와 보행자가 혼재한 모습이 보임.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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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국은행 본관은 1908년 일본제일은행 본점으로 착공에 들어간다. 1909년 정초하고 한국은행 설립과 함께 준공 후 한국은행으로 사용을 예비하여 1912년 완공된다.
 
건물 설계에서 중앙보다 양 측면 의장을 강조하였고, 중앙에는 아담한 포치를 두어 절제한 흔적이 역력함. 포치에 우리 전통건축의 배흘림기둥을 적용.
▲ 정면 포치 건물 설계에서 중앙보다 양 측면 의장을 강조하였고, 중앙에는 아담한 포치를 두어 절제한 흔적이 역력함. 포치에 우리 전통건축의 배흘림기둥을 적용.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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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1909년에 지어진 대한천일은행 광통관과 그 형태가 유사하다. 한마디로 광통관을 부풀려 놓은 형상이라 해도 무방하다. 중앙 포치는 대한의원 본관의 그것과 닮았다. 차량 이동이 가능케 한 점과 약간 변형된 형태마저 유사하다. 일본 건축가 설계임에도 중앙 포치에는 우리 전통의 배흘림기둥을 가져다 썼다.
 
井자 한가운데 트인 중앙 홀. 지금은 화폐박물관 전시장으로 사용 중이며, 창과 기둥이 정연한 배열을 볼 수 있음.
▲ 내부모습 井자 한가운데 트인 중앙 홀. 지금은 화폐박물관 전시장으로 사용 중이며, 창과 기둥이 정연한 배열을 볼 수 있음.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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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에는 네오바로크 등 여러 서구 건축양식을 적절하게 혼용하였다. 중앙부위는 절제된 의장으로 처리한 반면, 양 측면엔 서양 성(城)을 연상시키는 박공지붕과 돔을 채용하였다. 그 바람에 '井자' 대칭형 건축물인데도 압도적인 위압감이 그리 강하지 않다.

지하에는 대형금고를 두었고, 사각형 중앙 홀은 트인 구조이며 4방향으로 사무공간을 두었다. 철근 콘크리트에 화강석으로 마감하였다. 집은 이식된 식민자본주의 표상이다. 자본주의 완성형 수탈구조가 '금융자본'이라던 말이 생각나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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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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