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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영어교사 더글라스 리드가 직접 타자기로 써 작성한 김대중-이희호 대화 내용. 더글라스 리드는 1974년 9월부터 1975년 9월까지 13개월 동안 매일 그날 있었던 일을 기록했다.
 김대중의 영어교사 더글라스 리드가 직접 타자기로 써 작성한 김대중-이희호 대화 내용. 더글라스 리드는 1974년 9월부터 1975년 9월까지 13개월 동안 매일 그날 있었던 일을 기록했다.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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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은 18일 미국인 더글라스 리드(Douglas Reed)가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동교동 자택에서 김대중과 만나서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자료를 공개했다. 이 자료는 1974년 9월부터 1975년 9월까지 13개월 동안 기록한 것으로 총 460페이지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양이다. 특히 이 자료에는 1975년 인혁당 사건 관계자 사형선고, 같은해 장준하 선생 의문사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반응이 담겨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김대중의 영어교사였던 더글라스 리드는 김대중을 만나고 난 뒤에 매일 그날 있었던 일과 대화 내용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 자료의 성격과 의미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유신정권 시절 연금·감시 중 영어회화 배웠던 김대중
 
1973년 8월 14일 김대중이 동교동 자택에서 납치사건에 대한 회견을 하고 있다.
 1973년 8월 14일 김대중이 동교동 자택에서 납치사건에 대한 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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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납치테러 사건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8월 13일 한국으로 강제귀국당했다. 그 직후부터 장기간 가택연금을 당하다가 10월 26일 연금이 해제됐다. 장기간 연금이 해제됐지만 이후 김대중은 주기적으로 연금을 당했고 연금조치까지 없어도 노골적인 감시가 이뤄졌다. 그렇기 때문에 동교동에 출입하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김대중의 대외 활동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이때 김대중은 영어공부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한순간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김대중의 치밀함과 성실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대중은 영어회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미국인 영어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수업은 동교동 자택에서 이뤄졌다.

김대중의 첫 번째 영어가정교사였던 여성 교사가 그만두면서 후임으로 더글라스 리드가 김대중의 두 번째 영어 가정교사가 됐다. 더글라스 리드는 1974년 9월부터 1975년 9월까지 13개월 정도 영어교사로 활동했으며 1주일에 세 번 동교동 김대중의 집을 방문해 영어수업을 진행했다.

더글라스 리드는 김대중을 만난 이후 김대중을 존경하게 됐다. 그래서 영어수업을 마치고 난 후에 김대중, 이희호 등과 나눈 대화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했다. 바로 당일에 작성했기 때문에 내용이 매우 상세하다.

더글라스 리드는 유신정권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정리한 자료가 훼손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기 형식으로 정리한 글을 미국에 있는 자신의 지인에게 편지로 보냈다. 이렇게 보낸 편지가 총 141통이며 분량은 460쪽에 이를 정도로 매우 방대하다. 더글라스 리드는 이 자료를 2021년 9월에 김대중도서관에 기증했다.

김대중 관련 이해와 연구에 크게 기여 할 자료 

그러면 이 자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선 이 자료는 유신 정권 중반기 김대중과 민주화 운동 관련 연구에 기여할 수 있다. 더글라스 리드는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인물들의 활동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동교동 자택에서 이뤄진 대화였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다양하면서도 깊은 대화가 가능했다. 이 시기는 언론의 자유도 없었고 김대중의 대외적인 활동도 크게 제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관련 기록이 적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이 사료는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당시 주요 인사들의 활동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역사 기록이 될 수 있다.

두 번째로 김대중과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인의 시각을 알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이 자료를 보면 미국인 더글라스 리드가 김대중과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해하는 과정이 나타나 있다.

1970년대 중반만 해도 미국 사회에서 한국은 전쟁과 독재 등 부정적인 측면으로 알려졌다. 그런 상황에서 더글라스 리드는 김대중을 미국인도 존경할만한 세계적인 민주주의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갖게 됐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더글라스 리드의 자료는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인의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연구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인혁당 사건 직후 김대중·이희호가 한 말은?
 
1975년 4월 8일 새벽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사법살인' 당한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도예종(삼화토건 회장), 서도원(전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 하재완(무직), 이수병(일어학원 강사), 김용원(경기여고 교사), 송상진(양봉업), 우홍선(무직), 여정남(전 경북대 총학생회장) 8명의 사형이 집행된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1975년 4월 8일 새벽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사법살인" 당한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도예종(삼화토건 회장), 서도원(전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 하재완(무직), 이수병(일어학원 강사), 김용원(경기여고 교사), 송상진(양봉업), 우홍선(무직), 여정남(전 경북대 총학생회장) 8명의 사형이 집행된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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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가 작성된 시점은 유신정권 시절이었으며 인혁당 사건과 장준하 선생 의문사 사건이 포함된다. 이 사건 직후 김대중은 어떤 말을 했을까? 이 자료에는 이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먼저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1975년 4월 8일 인혁당 사건 관계자 8명에 대한 사형선고가 확정됐고 박정희 정권은 확정판결 후 18시간만에 사형을 집행해서 큰 충격을 줬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당시 김대중과 이희호의 입장이 이 자료에서 확인된다.
 
* 1975년 4월 10일 작성한 기록 중에서
She asked me making a sign of a slit across her throat if I knew about the eight. I said that I had learned of it. She said under this government the people are like "flies", there is no value placed on human life.
 
4월 10일 동교동을 방문한 더글라스 리드는 이희호와 대화를 했다. 이때 이희호는 '자신의 손으로 목을 자르는 듯한 흉내를 내면서 사형이 집행된 8명에 대한 소식을 아는지' 리드에게 물었다. 리드는 '알고 있다'고 답했고 이에 대해 이희호는 '유신 정권은 사람 생명을 존중하지 않으며 유신 정권 하에서 국민들은 마치 파리목숨과도 같다'라고 하면서 한탄했다. 당시 암울했던 분위기를 이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김대중은 이렇게 말을 했다.
 
* 1975년 4월 11일 작성한 기록 중에서
Mr. Kim said he told his wife when he finished his day in court on Tuesday that he felt Pak would probably act quickly to murder two or three of the eight. (Mr. Kim reported one radio report as having said that one of those being hanged shouted: "I am not a Communist" as he was hung. ) He did not expect that Pak would act so quickly against all of the eight.
 
4월 11일 더글라스 리드를 만난 김대중은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서 대화했다. 여기서 보면 김대중은 '4월 8일 인혁당 사건 관계자에 대한 사형선고 확정 직후에 박정희 정권이 2명에서 3명 정도를 신속하게 사형 집행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이 8명 전원을 그렇게 빨리(김대중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사형집행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그만큼 김대중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처럼 인혁당 사건 직후에 한 김대중과 이희호의 말은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장준하 선생 의문사 직후 김대중이 한 말은?
 
2015년 8월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 장준하공원에서 열린 고 장준한 선생 40주기 추모식에서 고 장준하 선생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2015년 8월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 장준하공원에서 열린 고 장준한 선생 40주기 추모식에서 고 장준하 선생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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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했다. 이 사건 직후 더글라스 리드가 정리한 자료를 보면 장준하 선생 의문사 관련한 내용이 몇 건 있다. 그 중에서 다음의 내용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 1975년 8월 27일 기록 중에서
Fall movement. Mr. Kim said he had talked to him & there was to be some democratic organizing in the Fall.
 
이 자료를 보면 김대중은 더글러스 리드에게 장준하 선생 의문사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을에 장준하 선생과 함께 민주화운동 관련 조직을 만들어서 함께 민주화 운동을 하기로 했다'는 언급을 했다. 장준하 선생 의문사 전에 장준하와 김대중이 만나 함께 민주화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는 내용은 2003년 김대중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증언하면서 확인된 바 있다.

이와 관련해서 더글라스 리드의 자료는 두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나는 김대중 증언을 확인시켜준다는 점이다. 더글라스 리드의 기록은 장준하 선생 의문사 직후에 작성된 것이므로 그당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확인해주는 자료다. 여기서 2003년 김대중의 증언을 뒷받침해주는 내용이 나왔다는 점에서 김대중-장준하 공동투쟁에 대한 합의는 역사적으로 확인된다.

두 번째로는 김대중-장준하 합의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자료에 보면 두 사람은 '공동투쟁을 위한 조직을 만든다'고 했고 투쟁의 시점을 '가을'로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을 보면 김대중과 장준하는 매우 구체적인 투쟁계획을 논의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장준하 선생이 8월에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가을에 새로운 민주화투쟁이 전개됐을 것이라는 점 역시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보듯 미국인 더글라스 리드의 기록은 김대중과 한국 민주화 운동사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서 의미가 크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록이 나오게 된 것은 한 미국인이 김대중을 만나고 난 뒤에 갖게 된 그에 대한 존경심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사, 한국 현대사에서 김대중이 갖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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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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