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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장기식당, 대구 현풍할매곰탕과 함께 3대 곰탕으로 일컬어지는 파주옥은 오랜 역사는 물론 평택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 평택을 대표하는 곰탕, 파주옥 포항 장기식당, 대구 현풍할매곰탕과 함께 3대 곰탕으로 일컬어지는 파주옥은 오랜 역사는 물론 평택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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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송탄을 대표하는 수많은 음식들과 만만치 않았던 여정 덕택에 속이 더부룩하고 몸이 찌뿌둥하다. 오늘은 평택의 도심과 예전 평택의 중심지였던 팽성 주변을 돌아보려고 하는데 속을 든든히 채울 겸 이곳을 대표하는 국밥집인 파주옥에서 그 첫 여정을 시작하려고 한다.

50년 이상 평택역 앞에서 곰탕을 팔며 현풍할매곰탕, 포항장기식당과 함께 3대 곰탕으로 손꼽힐 만큼 그 명성은 대단한 식당이다. 현재 파주옥은 본점뿐만 아니라 평택, 오산 일대에 지점이 들어설 만큼 현재도 이 고장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처음엔 주차가 힘든 본점 대신 비산점을 갈까 하다가 그 식당의 맛뿐만 아니라 분위기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그것을 감수하고 가기로 했다.     

낡은 외관은 물론 찾는 사람들도 주로 어르신들이 많은 걸로 보아하니 이 식당의 역사가 허언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주문하자마자 곧바로 나온 곰탕은 나주곰탕과 달리 맑은 국물이 아니라 소뼈를 진하게 우려낸 하얀 국물이었다. 맛도 투박하게 느껴지고 이 집만의 독특한 점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모처럼 속을 든든하게 해결했고, 나름 평택의 역사를 몸으로 체험한 듯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평택 시내 일대를 둘러보려고 한다. 사실 평택역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소사라고 불리는 넓은 들판과 평평한 대지가 이어져있던 작은 마을이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지금의 팽성읍 일대가 관아도 있었던 중심지였다.  

평택 시민들의 일상 곳곳에 녹아있는 역사들 
 
배를 엮어 만들었다고 해서 배다리라는 명칭을 지녔던 배다리 저수지는 현재 평택시민들의 문화 공간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 배다리 저수지 배를 엮어 만들었다고 해서 배다리라는 명칭을 지녔던 배다리 저수지는 현재 평택시민들의 문화 공간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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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평택 시민들의 산책 장소로 사랑받는 배다리 저수지에서 예전 평택의 기억을 떠올리게 할 수 있는 조형물이 있다. 수변공원의 데크길을 걷다 보면 데크의 바닥에 나무배들이 연이어 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조형물이 예전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알려주는 그 증거다.

예전 이 일대는 바닷물이 들어찼던 동네로 지금의 남쪽에 위치한 안성천이 전에는 이 일대로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엮어 배다리를 만들어서 이곳의 지명이 굳어지게 된 것이다. 현재 이 일대는 도서관과 상가들이 들어서 옛날의 자취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이처럼 지명과 조형물을 통해 과거를 유추하는 재미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김육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탄생한 대동법은 백성의 삶을 좀 더 윤택하게 만들었다.
▲ 대동법시행기념비 김육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탄생한 대동법은 백성의 삶을 좀 더 윤택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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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저수지에서 머지 않은 장소에 뜻깊은 문화재가 하나 있어 가보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 가장 큰 개혁으로 일컬어지는 대동법 시행비가 원소사 마을 한복판에 있기 때문이다.

대동법은 쉽게 이야기해서 쌀로 세금을 바치게 한 납세제도다. 조선의 공물 제도에서는 각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내게 했는데 생산에 차질이 생기거나 자연재해로 인해 피해를 본 경우에도 반드시 바치게 해 백성들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이런 폐단을 이용한 상인과 관리들은 이를 대신해 공물을 나라에 바치고, 그 대가를 몇 배씩 가중하여 받아내는 방납 때문에 점차 문제가 되었다.     

중간관리와 상인들의 이익만 늘어갔고, 백성들은 물론이고 정부의 수입도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를 개혁하기 위해 율곡 이이 등이 나섰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군량이 부족해지자 정부에서는 일시적으로 세금을 미곡으로 납부하도록 독려했다.

그것을 계기로 경기도에서 시작된 대동법은 김육의 주도로 점차 충청, 호남, 영남 등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평택은 충청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었고, 김육이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시행을 건의했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이 비석이 건립되게 된 것이다. 대동법 시행 기념비를 통해서 교과서에서 봤던 역사적인 사실을 되새길 수 있어서 뜻깊은 장소였다.  
    
관리들의 숙박시설로 주로 이용되었던 팽성객사는 팬데믹 이전 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 팽성읍 중심에 자리잡은 팽성객사 관리들의 숙박시설로 주로 이용되었던 팽성객사는 팬데믹 이전 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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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평택시내를 벗어나 예전 평택의 중심지인 팽성읍으로 이동해 본다. 고려시대부터 불렀던 평택의 지명인 팽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곳으로, 흡사 초한지에 나왔던 초패왕 항우의 본거지와 이름이 같아 무슨 연관이 있었을까 생각이 든다.

평택시내에서 차로 20분 정도 남쪽으로 떨어져 있는 팽성은 전반적으로 한적함이 묻어 나오는 조용한 동네 같았다. 그 중심에는 향교와 객사가 남아있어 과거의 모습을 증언해 주고 있다. 주택가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골목의 끝자락에 제법 위엄을 갖춘 기와집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관리의 숙박시설 또는 고을 수령이 망궐례(멀리서 궁궐을 바라보고 절하는 예식)를 행했던 팽성 객사가 바로 그곳이다.      
 
예전 평택 시가지라 할 수 있는 팽성의 언덕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 농성이 자리잡고 있다.
▲ 팽성에 자리잡은 농성의 전경 예전 평택 시가지라 할 수 있는 팽성의 언덕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 농성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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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문이 굳게 닫혀 있지만 연극 또는 '임금님을 만나러 가는 길' 등의 행사를 개최하며 평택시민의 사랑을 받았던 문화재다. 그 아쉬움을 뒤로하고 팽성읍을 바라보는 언덕에 세워진 성인 농성을 향해 가보기로 하자.

보통 성이라고 하면 적을 막거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쌓았을 텐데 농성은 돌이 아니라 흙으로 쌓은 토성이라 그런지 위압감 보단 동산에 온 듯한 푸근함이 느껴진다. 농성은 안성천과 아산만이 합쳐지는 평야지대에 우뚝 솟아 있었고, 주변에 높은 산들이 보이지 않아 일대가 훤하게 내려다 보인다. 성은 전체적으로 타원형이고 둘레는 약 300미터, 동쪽과 서쪽에 문 터가 남아있었다.     

이 성을 쌓은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삼국시대 도적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는 설, 평택 임씨의 시조인 임팔급이 축조하여 생활근거지로 사용했다는 설, 고려시대 서해안으로 침입했던 왜구를 막기 위해 세웠다는 설 등 다양한 이야기가 있으나 전부 확실치 않다.

현재 농성의 내부는 공원처럼 조성되어 근교 주민들의 피크닉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평택의 문화재를 두루 돌아보니 평택 시민들의 삶과 함께 전반적으로 녹아들었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다음은 평택의 불교문화재에 대해 답사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1권 (경기별곡 1편)이 전국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 절찬리 판매 중 입니다. 경기도 각 도시의 여행, 문화, 역사 이야기를 알차게 담았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경기도는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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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현재 각종 여행 유명팟케스트와 한국관광공사 등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편> 저자. kbs 경인 <시사인사이드> 경인방송 <책과 사람들> 출연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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