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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은 소소한 탐식을 통해 일상의 고단함과 노곤함을 이겨냅니다. 고독한 방구석 연주자인 임승수 작가는 피아노 연주를 통해 얻는 소소한 깨달음과 지적 유희를 유쾌한 필치로 전달합니다.[편집자말]
우리 집에 방문한 손님은 대체로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라게 되는데, 한가운데에 덩그렇게 놓인 그랜드 피아노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의외의 존재를 만난 손님은 '네가 거기서 왜 나와?'라고 묻는 듯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검은색 고급 세단을 연상시키는 미려한 외관에 오픈카인 마냥 뚜껑을 한껏 열어젖히고는, 검은색과 흰색이 교차하는 88개의 건반이 가지런한 치열처럼 한껏 웃음을 지으며 손님을 맞이한다.
 
위세와 포스가 어마어마해서 인테리어의 95%에 이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거실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 위세와 포스가 어마어마해서 인테리어의 95%에 이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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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집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제외하면 내세울 만한 것이라고는 없다. 집 내부가 근사하다며 입을 쩍 벌린 손님에게 한번 그랜드 피아노가 없다고 가정하고 다시 둘러보라고 하면 쩍 벌린 입이 금세 다소곳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그랜드 피아노의 비중과 포스는 어마어마해서 인테리어의 95%에 이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저나 거실에 그랜드 피아노 놓고 사는 걸 보고는 부자라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나도 부자면 좋겠는데, 인근 경기도 광명보다 집값이 싼 서울 금천구 귀퉁이의 30평대 소규모 아파트 단지에서 조촐하게 산다. 상대적 빈곤을 서류로 완벽하게 증명해야 받을 수 있는 디딤돌대출 20년(240개월) 할부를 이용해 2014년에 생애 처음으로 주택을 소유하게 됐다. 그랜드 피아노는 당시 디딤돌대출의 힘을 최대한 활용해 구입한 것이다.

아무리 미관상 좋다고 해도 그렇게 무리해서 그랜드 피아노를 놓을 필요가 있겠느냐, 전공하는 것도 아닌데 업라이트 피아노 정도면 되지 않느냐? 이런 오해가 있는데, 나는 그랜드 피아노를 인테리어 때문이 아니라 소리 때문에 구입했다.

2014년 어느날 종로 낙원상가

2014년의 어느 날 이사를 앞두고 아내와 함께 종로구 낙원상가의 한 중고 피아노 매장을 방문했는데, 거기서 사달이 났다. 원래는 분수에 맞게 중고 업라이트 피아노를 염두에 뒀다. 그러다가 어차피 사지는 않을 거지만 한번 쳐보기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진열된 그랜드 피아노를 이것저것 쳐 본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권투 경량급 세계 챔피언이 아무리 용을 써 봐야 헤비급의 평범한 선수조차 상대하기 버거운 그 압도적 피지컬의 차이랄까. 완전히 다른 체급의 음향이 뿜어져 나오는데, 그 충격파로 뇌가 흔들려 경제 감각을 상실했다. 어차피 20년 장기대출 쫘악 당겨 집도 사는 판국에, 거기다가 중고 그랜드 피아노 가격 좀 얹는다고 매달 갚을 원리금이 확 불어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는 엄청난 생각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그랜드도 역시 비쌀수록 좋더라. 삼익, 영창보다 야마하, 가와이의 소리가 더욱 귀에 감기고 건반의 터치감도 섬세하며 부드러웠다. 이미 마음속에서는 삼익과 영창은 관심 밖이고 야마하와 가와이를 저울질 중이었다. 보다 못한 아내의 일침에 가까스로 경제 감각을 수습한 나는, 중고 삼익 그랜드 피아노를 사는 것으로 아내와 타협을 보았다. 구입 가격이 540만 원이었는데, 어차피 디딤돌대출 240개월 할부로 나누면 충분히 희석될 수 있는 액수라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도대체 그랜드 소리가 업라이트와 얼마나 다르길래 한 남자의 경제 관념을 금치산자 수준으로 허물어 버릴 수 있을까? 모든 곡에서 확연하게 차이가 나지만, 나는 특히 프랑스의 인상주의 작곡가 드뷔시(1862-1918)의 <달빛>을 연주할 때 그랜드의 위력을 여실히 느낀다.

인상주의 음악으로 분류되는 곡들은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달빛> 역시 그러해서 잔잔한 호수 위에 쏟아지는 달빛처럼 음들이 층층이 쌓여나가는데, 자칫 서늘해질 수 있는 그 명료함을 몽환적 배음들이 호숫가 안개처럼 뿌옇게 감싸준다. 이 명료함과 흐릿함이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가 음악에 특별한 색깔을 입힌다. 이 특유의 배음을 조성해내는 능력에 있어서 업라이트 피아노는 그랜드 피아노를 절대 따라올 수가 없다.

배음이 뭐길래
 
명료함과 흐릿함이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곡이다.
▲ 드뷔시 "달빛" 악보 명료함과 흐릿함이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곡이다.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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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음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다소간의 물리 지식이 필요한데, 한번 간략하게 설명해보겠다. 우리가 피아노와 바이올린으로 동일한 음을 연주하면 음높이는 같지만 '음색'은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이 음색의 차이를 통해 해당 소리가 피아노인지 바이올린인지 구분할 수 있는데, 이렇게 악기마다 음색이 차이 나는 이유는 '배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피아노 건반을 눌러 해머로 현을 때리거나 활로 바이올린 현을 켜면, 양쪽 끝이 고정된 현이 진동해 소리가 생성되고 그 소리가 울림통을 통해 증폭된다. 아래 그림을 피아노나 바이올린 현의 진동이라고 생각하자. 1로 표기된 맨 위의 진동이 '기본음'이고, 1/2로 표기된 게 '2배음', 1/3은 '3배음', 1/4은 '4배음' 이런 식이다.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본음의 파장이 제일 길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파장이 1/2, 1/3, 1/4의 비율로 짧아진다.
 
악기마다 음색이 차이 나는 이유는 ‘배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 진동하는 현의 배음들 악기마다 음색이 차이 나는 이유는 ‘배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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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피아노 건반을 누르거나 활로 바이올린을 켤 때 우리가 듣는 음은 '기본음'에 2배음, 3배음, 4배음, 5배음 등이 중첩되어 동시에 들리는 것이다. 대체로 우리가 음높이라고 인식하는 성분은 '기본음'이지만, 하나의 현이 진동하더라도 그 안에는 저렇게 다양한 진동의 양상이 중첩되어 일어난다. 그런데 악기마다 2배음, 3배음, 4배음 등의 배음 비중이 제각각이다. 이 배음 비중의 차이가 음색의 차이로 이어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보자. 예컨대 기본음의 주파수가 100Hz이면 2배음은 200Hz, 3배음은 300Hz, 4배음은 400Hz이 된다. 파장이 감소하는 비율만큼 주파수가 증가하는 건데, 지금은 물리 수업 시간이 아니니 그냥 그렇다고만 이해하자. 알다시피 주파수가 높을수록 우리는 높은음으로 인식한다. 그러니 기본음보다 2배음이, 2배음보다 3배음이 높은음이라는 의미다.

같은 음을 연주하더라도 피아노보다 바이올린의 음색이 더욱 예리하고 날카롭게 들리는 이유는 8배음, 9배음, 10배음, 11배음 같은 높은 주파수의 배음 성분이 피아노보다 더 풍부하기 때문이다. 중첩되어 울리는 배음 중에서 높은음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으니 음색이 날카롭고 찌르는 듯한 색깔을 갖게 된다.

이러한 배음은 피아노라는 단일한 악기 사이에서도 차이가 있어서 현의 재질이 무엇인지, 울림통은 어떤 나무로 만들었는지, 피아노의 크기와 구조는 어떠한지, 현을 때리는 해머의 구조와 재질은 어떠한지 등에 따라 달라진다. 업라이트 피아노는 그 크기와 외형 및 구조의 한계 때문에 그랜드 피아노만큼 풍부한 배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드뷔시가 명백하게 피아노의 배음 효과를 노리고 작곡한 <달빛>은, 그런 의미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위한 곡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집에 그랜드 피아노를 들여놓고 <달빛>을 연주하며 경험했던 놀라운 소리의 입체감을 통해, 드뷔시라는 작곡가가 피아노라는 악기에 대해 얼마나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는지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드뷔시의 곡을 실연이 아닌 녹음으로만 접한다면 그 매력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드뷔시는 자신의 곡에서 이러한 특유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전통적인 화성법 체계에서 금기시하는 5도 및 8도 병진행이나 허용 범위 바깥의 불협화음 등을 과감하게 사용하고, 천편일률적인 장∙단음계를 벗어나 온음음계, 5음 음계, 교회선법 등을 적극적으로 채용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이라는 본질에 집중하며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회화기법을 뛰어넘었듯이, 드뷔시는 소리라는 본질에 집중해 전통적인 화성법과 음계의 울타리를 과감하게 뛰어넘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드뷔시는 현대음악의 선구자라 할 만하다.

어쨌든 그렇게 나름 풍부한 배음을 탐닉하며 중고 삼익 그랜드 피아노와 다섯 해를 보냈다. 종종 낙원상가에서 체험했던 야마하나 가와이가 떠오를 때도 있었지만, 내 주제에 삼익 그랜드도 과분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연주하는 한 시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2년여 전 종로구청 한우리홀에서 종로구민을 대상으로 <1만 원보다 1시간이 소중하다>라는 제목의 행복론 강의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강의 시작 30분 전에 도착해서 한우리홀을 둘러보는데 놀라운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무려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 대당 가격이 억대를 훌쩍 넘어가는 세계 최고의 브랜드 아닌가.
 
대당 가격이 억대를 훌쩍 넘어가는 세계 최고의 브랜드다.
▲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 대당 가격이 억대를 훌쩍 넘어가는 세계 최고의 브랜드다.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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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 홀린 듯 스타인웨이 로고가 새겨진 덮개를 벗기고 남이 보건 말건 손에 익은 바흐의 이탈리아 협주곡 1악장을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 힘의 미세한 변화에 음량과 음색이 마이크로그램 단위로 반응하는 것 아닌가.

세상에나! 이것이 바로 치는 대로 소리가 나온다는 그거구나! 그 해상도를 무지개에 비유하자면 집에 있는 삼익 그랜드 피아노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깔인 반면, 종로구청 한우리홀의 스타인웨이는 빨간색과 주황색 사이에만 스무 가지 색깔이 더 있는 느낌이었다.

이내 주택담보대출 여력을 따져보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다행히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아 대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의 손맛이 워낙에 강렬하다 보니 집에 있는 피아노와 비교가 되어 내내 심경이 복잡하다. 특히 섬세한 피아니시모를 연주할 때면 중고 삼익 그랜드 피아노의 한계를 더욱 절감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드뷔시 <달빛>도 대부분 피아니시모(pp.)에다가 심지어 피아니시시모(ppp.)까지 등장하지 않는가.

코로나로 경제적 타격을 입은 프리랜서 작가인지라 당장은 여력이 없지만, 상황이 좀 호전되면 섬세한 피아니시모 구현을 위해 피아노 교체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기존 삼익 그랜드 피아노를 처분하면서 실탄을 일부 마련하고 부족한 차액을 장기 카드 할부로 돌려서 야마하 중고 그랜드 피아노로 갈아탈까 싶다.

그래서 인상주의 화가나 드뷔시가 각자의 분야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도 아마추어 취미의 저 너머를 추구하기 위해 경제적 울타리를 뛰어넘어보련다. 연주하는 매일의 한 시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충분히 그 정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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