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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일인 18일 오전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부모들이 고사장으로 향하는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일인 18일 오전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부모들이 고사장으로 향하는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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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한심하달 수밖에 없다. 공약이랍시고 선거철에 '죽지도 않고 찾아오는 각설이' 마냥 다시 또 어김없이 등장했다. 대입 전형 이야기다. 몇몇 대선 후보들이 청년을 위한답시고 당선되면 수시를 폐지하겠다며 목청을 돋우고 있다. 100% 정시로 선발하자는 거다. 

'문제는 승자독식의 사회 구조야, 바보야!' 삼척동자도 아는 근본적인 원인은 나 몰라라 하고 애먼 대입 전형만 다시 손 보겠다는 뜻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지금의 수시 전형이 정시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대안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그저 '구관이 명관'이라며 옛날로 돌아가자는 퇴행적 사고다. 

세월이 흐르면 고통스러웠던 기억조차 앨범 속 따듯한 추억인 양 여겨진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가 주야장천 기출문제만 달달 외우듯 반복해서 푸는 야만적이고 획일적인 교실 풍경을 까맣게 잊은 걸까. 그건 교육이 아니라 '사육'이었다.

암기 과목이라는 역사와 영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논리를 따지는 수학조차 문제 풀이 과정을 통째로 외우던 시절이었다. 유형이 비슷한 문제를 하도 많이 풀다 보니, 출제 의도는 몰라도 정답은 맞히는 '내공'을 터득하기도 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됐으니 말이다.

"차라리 그때가 더 공정했던 것 같아요." 요즘 아이들에게 종종 듣는 이야기인 건 맞다. 오로지 명문대 진학을 꿈꾸며 종일 책과 씨름해야 하는 그들에겐 대입의 교육적 가치와 사회적 의미를 생각해볼 겨를이 없다. 당장 자신의 유불리만 저울질해 판단할 뿐이다. 거칠게 말해서, '옳고 그름'은 개나 줘버리라는 식이다. 

어디서 전해 들었는진 몰라도, 전두환 정권 때의 학력고사 방식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아이마저 있다. 자신의 점수를 고려해 원하는 대학에 먼저 지원하고 시험을 치러 당락이 결정되는 게 가장 공정하다는 주장이다. 이것저것 재고 따질 필요가 없으니 명쾌하지 않으냐는 거다. 

'대입의 불공정은 복잡한 전형에서 비롯된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진학지도를 담당하는 현직 교사들조차 이렇게 생각한다. 대선 후보들이 선거철 앞다퉈 수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거는 것도 그래서일 테다. 과연 100% 정시 주장처럼 전형이 단순해지면 불공정이 해소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천만의 말씀이다. 

그저 '공정하게 보일' 뿐, 별반 차이가 없다. 가정의 경제력과 자녀의 성적이 정확히 비례하는 상황에서 대입 전형이 어떻게 달라지든 예나 지금이나 상류층의 꽃놀이패일 뿐이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점수 높은 아이가 수시 성적도 좋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기회의 불공정

무엇보다 기회의 불공정을 간과한다. 한날한시에 똑같은 문제지로 시험을 치러 맞힌 개수로 우열을 가리는 걸 공정하다고 철석같이 믿을 뿐, 시험장에 앉기까지의 과정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으니 이것만이라도 공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아이는 수능을 '불공정한 사회에서 공정하길 기대하는 마지막 마지노선'이라는 표현을 썼다. 누구 말마따나, 부모 잘 만난 것도 실력 아니냐는 일종의 체념이다. 거대한 불공정의 산 앞에서 무릎 꿇은 채 호미로 흙 한 줌 걷어내려는 눈물겨운 노력이라고나 할까. 

안타깝게도, 공정에 목매단 아이들조차 어떤 전형을 통해 명문대에 합격했는지 궁금해할 뿐, 그가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는지 따져보지 않는다. 명색이 지성인이라는 대학생들 사이에 '수시충(수시 전형으로 합격한 사람)', '지균충(지역균형선발 전형으로 합격한 사람)', '사배충(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을 통해 합격한 사람)' 등의 혐오 표현이 스스럼없이 나오는 요즘이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합격한 게 아니므로 '벌레'로 취급당해도 싸다는 인식이다. 불공정한 경쟁을 통해 승자가 된 것이 잘못일 뿐, 승자독식이 뭐가 문제냐고 반문하는 아이 앞에 할 말을 잃는다. 또래 중에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면 대번 '지질이'라는 조롱을 듣게 될 거라고 말했다. 

공정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이토록 강퍅해졌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일 뿐, 그들을 나무랄 순 없다. 우리는 9수를 통해 사법고시에 합격한 야당의 대선 후보의 사례를 보면서도 기회의 불공정을 간파해내지 못하는 외눈박이 사회다. 되레 그의 목표를 향한 불굴의 의지를 상찬하는 목소리만 드높다.

무려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10년 동안 기약도 없는 시험을 뒷바라지해줄 수 있는 가정은 거의 없다. 그의 사법고시 합격은 온전히 넉넉한 집안의 경제력 덕분이다. 폐지된 지 이미 오래인데도 부활시키자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 사법고시조차 마냥 공정하다고 볼 수 없는 이유다. 

대입 전형이라고 다를까. 정시와 수시를 두고 사법고시와 로스쿨과의 관계로 비유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대개 자사고의 의대 진학률이 일반고에 견줘 압도적으로 높은 건 재수든 삼수든 합격할 때까지 응시하기 때문이다. 흡사 인디언 기우제 하는 식이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누가 뭐래도 몇 년이고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어서다. 9수까지 해가며 사법고시에 끝내 합격하는 경우와 하등 다를 바 없다. 그걸 공정하다고 하려면, 누구든 돈 걱정 없이 그렇게 시도할 수 있도록 여건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물론, 허황한 바람일 뿐이다.

근본적인 해법
 
대학수학능력시험을 하루 앞둔 17일 오후 대전의 한 고등학교에서 예비소집에 참석한 수험생들이 유의사항 등을 듣고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하루 앞둔 17일 오후 대전의 한 고등학교에서 예비소집에 참석한 수험생들이 유의사항 등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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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승자독식 사회인 우리나라에서 애초 공정한 시험이란 허상이다. 대입 전형이 크게 정시와 수시로 나뉜 후,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아야 하는 아이들의 부담이 커졌다는 게 핵심일 뿐, 공정성과는 무관하다. 실상 공정하다는 믿음 때문에 아이들이 정시를 선호하는 게 아니다. 

코흘리개 초등학생조차 'SKY 서성한 중경외시…'를 읊고 다니는 현실에서 공정한 대입 전형을 기대하는 건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다. 대입 전형 방식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학벌 구조와 지방대 차별 의식을 어떻게 혁파할 수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대선 후보들의 '도돌이표' 대입 전형 공약이 민망하다 못해 안쓰럽다.

요컨대, 정시와 수시 중 어느 전형이 더 공정하냐에 천착하는 건 바보짓이다. 차라리 정시가, 혹은 수시가 아이들의 대입 준비를 위한 학습 부담을 줄여줄 수 있다고 설득하는 게 합리적이다. 물론, 승자독식의 사회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법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굳이 영화의 대사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경영하겠다는 사람이라면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했으면 좋겠다. 고작 대입 전형을 두고 밑도 끝도 없는 공정성 논쟁을 벌일 게 아니라, 거대한 불공정의 산을 허물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의 대선 후보들의 그릇의 크기가 이 정도밖엔 안 되나. 

사족 하나. 언젠가 아이들에게 점수 높은 아이가 우대받는 게 과연 공정하냐고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백 보 양보해서, 도덕적이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대우를 받는 게 공정하다고 해도, 과연 도덕 시험 점수가 높다고 도덕적인 인간이라 말할 수 있는지, 나아가 인간의 능력과 잠재력을 수능 방식의 일제고사로 평가할 수 있는지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다.

아이들이 뭐라고 답했을 것 같은가. 평가가 기존의 사회 구조를 지탱하기 위한 도구라거나, 시험 제도의 변천이 곧 제대로 된 평가를 위한 노력이라고 말하는 제법 진지한 아이들은 극소수였다. 대다수는 그런 고민을 할 시간에 한 문제라도 더 풀어보는 게 도움이 된다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귀찮다는 거다. 

내 질문에 진지하게 답했던 아이와 시큰둥해 하던 아이, 둘 중 누가 더 수능을 잘 볼 것 같은가. 수능 점수를 높이려면 유형에 따른 기출문제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푸는 게 왕도라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다. 부디 오해는 마시라. 수시가 정답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태그:#대입 전형 공약, #수시 폐지, #윤석열, #안철수, #김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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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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