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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리에 뿌리박혀 인천 땅에서 살아온 장수동 은행나무가 바라보는 고향 인천은 어떤 도시일까. 가상 인터뷰 형식으로 장수동 은행나무를 둘러싼 역사와 사연을 정리했다. [편집자말]
올해 850살을 먹은 장수동 은행나무. 높이 28.2m, 근원둘레(지표 경계부 둘레) 9.1m, 수관(가지나 잎이 무성한 부분)의 폭 동서 27.1m, 남북 31.2m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850년간 내가 지켜본 인천은 늘 우리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면 온몸으로 외침을 막아냈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우리 고유의 문화를 내보내며 한반도의 인후 역할을 해왔지. 암, 그렇고말고."

올해 850살을 먹은 장수동 은행나무는 "인천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목구멍이라 할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해 책임을 잘 수행한 도시"라며 "인구 300만에 세계적 공항과 항만을 가진 인천은 이제 위상에 걸맞은 대접을 받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장수동 은행나무는 전국의 800살 이상 된 나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로 손꼽힌다. 원형을 잘 간직한 데다, 무성한 가지와 잎이 버들가지처럼 늘어져 있다. 높이 28.2m, 근원둘레(지표 경계부 둘레) 9.1m, 수관(樹冠, 가지나 잎이 무성한 부분)의 폭 동서 27.1m, 남북 31.2m의 외양. 장수동 은행나무가 지난 2월에서야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562호'로 지정된 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가을에 만난 장수동 은행나무(이하 장은나무)는 서서히 노란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고려 때 장수동에 뿌리내려... 우리나라 역사 지켜봐온 나무
 
"돌아보니 나도 참 많은 사건을 겪었구나. 태어나던 시기 고려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이 쳐들어왔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이후 조선 후기까지 조용한 시기도 있긴 했어."

가을 아침, 장은나무 가지에 달린 나뭇잎들이 바람을 타고 흔들렸다. 아직은 녹색기가 가시지 않은 은행잎 몇 개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장은나무는 고려 명종 임금이 즉위하던 1170년쯤 태어났는데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정중부가 무신정변을 일으켜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19대 왕으로 옹립한 시기였다.

"나라가 불안해 보이니까 장수동 사람들이 나를 여기에 심은 거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 같은 나무를 신처럼 모시며 나라의 안녕과 마을의 번영을 기원했거든.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인천과 고려 왕실은 깊은 인연이 있었단다."

깊은 인연이라... 그다음 말이 궁금해 장은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나무를 뒤덮은 무성한 잎들이 가을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어떤 인연인지 궁금하지? 껄껄껄. 인천에선 당시 많은 규수를 고려 왕실로 시집보냈다. 고려의 제11대 국왕인 문종부터 제17대 인종에 이르기까지 7대, 80년 동안 인주(인천) 이씨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인 거지. 이 기간 인주 이씨 집안은 고려 최고의 명문가로 자리 잡았고 인천의 위상이 상당히 높아졌지."

장은나무는 "무신들이 고려 왕실을 '접수'하면서 인천 사람들은 인천이 왕비들의 고향이라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장수동에 살던 사람들이 인천의 안녕과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며 이 자리에 나를 심은 것"이라고 귀띔했다.
 
"850년간 지켜본 인천은 늘 우리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면 온몸으로 외침을 막아냈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우리 고유의 문화를 내보내며 한반도의 인후 역할을 해왔지. 암, 그렇고말고."
 
장수동 은행나무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올해 850살, 인천 사람들 정성으로 지금도 건강
 
태풍이나 전란과 같은 천재지변이나 변고가 있었을 텐데 지금껏 가지 하나 상하지 않고 건강한 모습으로 남은 특별한 비결이 있었을까.

"그거야 인천 사람들이 나를 정성껏 보살폈기 때문이지.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 같은 나무를 상당히 귀한 존재로 인식했다. 지금도 나에게 당제를 올리지 않더냐.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여긴 거지. 지금 우리 인천시가 자원순환 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그 운동의 핵심은 자연 존중 사상과 맞닿아 있는 것이지."

장은나무는 850년 동안 나라가 몇 번 바뀌었는데 어려운 시기가 없었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인천은 삼국 시대부터 중국으로 가는 중요한 길이었고, 조선 시대 들어서는 수도 서울의 관문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겪은 첫 번째 위기는 몽골이 쳐들어와 전 국토를 유린했을 때였고, 두 번째는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였으며, 세 번째는 제국주의자들이 들어온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마지막 위기는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였지."

장은나무의 표정이 잠깐 동안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사람들이 나를 보호하려 애썼고, 나도 신령의 기운으로 지금까지 건강하게 내 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다. 인천 사람들은 오히려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해서 국난을 극복하고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더구나."

장은나무는 "몽골 제국이 고려를 침공한 1232년 고려 고종 임금은 항복하지 않고 싸우기 위해 강화도에 궁궐을 짓고 수도를 옮겼지. 고려 왕조는 이후 1270년까지 39년간 강화도에 머물며 몽골에 저항하는 한편, 눈부신 문화를 꽃피웠다"고 강조했다.

그는 "앞서 인천이 고대의 수도였던 시기가 있었는데 기원전 비류백제가 그것"이라며 "비류는 해양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문학산에 성을 쌓고 왕국을 건설했다"고 덧붙였다. 인천은 비류백제와 고려, 두 나라의 고도(古都)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천(仁川)'이란 지명은 언제 생겼을까.

"내가 240여 살 때까지 인천의 지명은 인주(仁州)였다. 그러나 조선 태종 때인 1413년 인주는 인천이 되었고 세조 5년(1459)엔 인천도호부로 승격됐다. 이는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의 어머니가 인천 이씨였기 때문이지. 인천은 이후 조선 후기까지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위기가 올 때마다 사람들이 나를 보호하려 애썼고, 나도 신령의 기운으로 지금까지 건강하게 내 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다. 인천 사람들은 오히려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해서 국난을 극복하고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더구나."
 
장수동 은행나무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국난 극복하며 위기를 기회로 꽃피워내
 
인천이 다시 전면에 등장하며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때는 장은나무가 700살 정도가 됐을 때다.

"19세기였지. 서해안 방어의 최전선으로 강화도와 인천 지역의 방어 체계가 중요시되던 시기, 산업혁명에 성공한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거야."

장은나무는 그 과정에서 "조불전쟁(병인양요, 1866)과 조미전쟁(신미양요, 1871)이 발발했으나 함포 몇 발을 맞고 두 손 두 발 다 든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조선은 항복하지 않았고 개항을 요구하는 프랑스, 미국에 맞서 싸워 쫓아냈다"며 "엄청난 희생이 따르긴 했으나 두 전쟁 모두 조선이 승리한 전쟁"이라고 단언했다.

장은나무는 "1883년 개항과 함께 인천은 중국과 일본, 서양인들이 북적대는 국제도시가 됐고 신문물의 입이 된 인천에서 '대한민국 최초'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며 "개항 이후 인천은 급속한 도시화의 길을 걸었고 광복과 6·25전쟁 등 엄청난 사건을 겪은 뒤 산업화, 민주화를 거치며 현재 인구 300만의 미래 국제도시가 됐다"고 강조했다. 21세기에도 인천은 격동의 역사를 창조하며 지금까지 정진한 것이라고.

"일제강점기와 광복, 6·25전쟁을 겪으며 극심한 혼란기 속에서도 인천은 우리나라 산업화를 견인해 온 도시다. 공단을 중심으로 제조업을 이끌었고 노동민주화운동도 활발했지. 대통령 직선제와 언론 자율화를 이끌어낸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인 5·3항쟁도 주안시민회관 앞에서 시작된 게 아니더냐. 그때 주안에서 터진 최루탄 냄새가 장수동까지 날아올 정도로 격렬했단다.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코가 맵구나."

장은나무에게 앞으로의 계획과 소망을 물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나를 영험한 나무로 여겨 집안에 액운이 있거나 마을에 돌림병이 돌 때면 제물을 차려놓고 치성을 올려왔다. 요즘 사람들은 사시사철 나를 찾아와 사진을 찍고 내 가지 아래에서 쉬었다 가곤 한다. 그렇게 사람들이 나를 귀히 여기고 많이 아껴줘서 지금까지 잘 사는 것 같다.

특히 나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 위해 민관이 함께 노력해 올해 결실을 얻은 점은 고맙게 생각한다. 나에게 정성을 올리는 사람들을 위해 나 또한 최선을 다해 보살피려 노력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한자리에 850년간 있었던 것처럼 우리 시민들도 이 땅을 잘 지키며 살고 싶은 도시로 함께 만들어갔으면 좋겠구나."

어느 틈엔가, 장수동 은행나무 가지의 잎들이 노랗게 팔랑거리고 있었다.
 
"내가 한자리에 850년간 있었던 것처럼 우리 시민들도 이 땅을 잘 지키며 살고 싶은 도시로 함께 만들어갔으면 좋겠구나."
 
장수동 은행나무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에서 발행하는 종합 매거진 <굿모닝인천> 2021년 11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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