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18 15:47최종 업데이트 22.01.05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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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비평연재 <좋은데, 싫었습니다>(좋싫)는 주류의 담론에 대항하는 저항의 언어조차 어쩌면 '당위'라는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질문합니다. 그저 이것'만'이 옳고, 이것은 '반드시' 좋아해야 하고,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대해야 한다는 절대적이고 당위적인 언어들이 정말로 대안과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편집자말]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한석규)과 정기준(윤제문) ⓒ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사대부 세력을 대표하는 정기준(윤제문 분)과 세종이 '백성의 지혜'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대목이다(한국에서 나온 드라마 중 정치의 본질과 민주주의의 철학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이다).

세종은 "정치의 본질은 책임"이기 때문에 모든 백성이 저마다 글을 읽고 공부를 하여 마침내 제 생각을 만들고 제 말을 하고 제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모두가 책임을 나눠지는 것으로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드라마 속 세종이 생각하는 정치의 본질이다.


반면 정기준 역시 "정치의 본질은 책임"이기 때문에 모두가 책임을 나눠지는 것은 책임을 방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생업이 고단한 백성이 자기의 언어와 정견과 신념을 갖추기란 어려운 일이며 글을 배웠다는 사실로 인해 오히려 지배층에게 더 이용당하고 더 쉽게 속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 책임 있고 현명한 태도로 안전하고 안정적인 세계를 만드는 것'이 정기준이 생각하는 정치의 본질이다.

정치의 의미를 우리가 사는 세계를 더 행복하게 만드는 질문이라고 한다면 둘의 이야기 모두 수긍할 수 있고 고민해볼 여지가 있다. 결국 세계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누구냐는 질문. 얼마 전 VOD로 <뿌리깊은 나무>를 다시 꺼내 봤다. 더불어민주당이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강행 처리하려고 노력 중이라는 기사와 그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읽은 다음이었다.

# 지긋지긋한 기레기의 나라

언론중재법(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가짜뉴스를 비롯해 언론에 의한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언론에 보다 강력한 규제를 가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조작 또는 허위 보도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고, 문제가 되는 기사는 기사의 열람 자체를 차단할 수 있도록 하자는 거다. 읽은 기사의 댓글에서도 그랬지만 여론은 대부분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동의하는 분위기다. '기레기를 때려잡고 언론 개혁을 해내야 한다'는 것이 여론의 요지. 사람들의 분노는 많은 부분에서 이해되는 일이다.

자본과 권력을 감시하겠다며 스스로 자본과 권력이 되어버린 언론사, 접대와 '뽀찌'를 일상처럼 챙겨먹는 언론인, 기사를 팔아 돈을 벌고 대중을 속여 권력에 굴종하는 언론 행태. 지난 수십 년간 언론의 적폐는 그렇게 쌓였다. 망가진 (사실 망가졌다고 표현하기엔 언론이 망가져 있지 않은 시절이 언제였는가 싶기도 하지만) 저널리즘은 사회를 뒤틀었다. 언론의 본질이 사회의 뒤틀림을 방지하고 감시하는 것이라면 망가진 언론이 이끌어낸 결과가 사회의 뒤틀림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금 멀리는 도시 하나를 봉쇄하고 몇 명인지도 모를 사람을 학살한 일에 침묵했고, 가까이는 바다에 빠져 수백의 목숨이 사라진 사고를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기레기'라는 멸칭이 등장했고 언론적폐라는 말도 나타났다. 기성의 언론을 믿을 수 없다고 여기게 된 사람들은 유튜브나 1인 미디어, 아니면 '정치평론'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들이 출연하는 팟캐스트를 더 신뢰했다.

마침 미디어의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디바이스의 발전, 언어의 변화, 언론 신뢰도의 저하는 알맞게 박자가 맞았다. TV 9시 뉴스의 자리는 숏폼의 유튜브와 SNS 영상이 대체했다. 인쇄매체의 문어체는 욕설과 은어가 간간이 섞인 일상어로 대체됐다. 신뢰를 잃었는데 심지어 변화와 발전마저 더딘 기성 언론이 맞이한 참담한 최후.  

기성의 언론들이 참담한 현실을 직면하고 있는 와중 마치 '확인 사살'이라도 하겠다는 듯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등장했다. 이대로 개정안이 통과되면 고의든 실수든 오보를 한 언론사는 손해배상이라는 징벌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이 오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입증의 책임은 언론사가 져야 한다. 실수로 한 오보일지 아니면 조작된 가짜뉴스일지 아직 확인되지 않았더라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받는 기사라면 열람차단을 청구해 아무도 기사를 읽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언론중재법 논의 관련 '언론 표현의 자유와 피해구제강화를 위한 사회적 합의 모색 긴급토론회'가 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리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겠다는 이들은 이를 "가짜뉴스를 규제하고 언론사에겐 기사를 쓸 때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쓸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책임이 있는 자들에게만 언로가 허락돼야 한다'던 <뿌리깊은 나무> 정기준의 주장과 같은 메시지다. 말을 할 자격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모두에게 글과 말의 공간이 열려서는 혼란만이 가중된다는 이야기, 그러니 말과 글을 통제하고 더 엄격해야 한다는 이야기.

그런 관점이라면 언론중재법을 더 많은 제약과 책임이 따르는 법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식과 연륜, 경험과 지혜가 검증됐고, 선량함과 정의로움과 용기마저 가진 일부의 기자들만 좋은 기사를 생산해낼 수 있도록 강제할 수 있다면. 그러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공론장은 더욱 격조 있어질 것이고 정보의 왜곡도 없을 것이고 사회는 한층 더 품격 있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가능한 일일까? 혹은 지금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정말 원하는 것인가?

# 가짜뉴스란 무엇인가

가짜뉴스란 무엇일까. 사실 가짜뉴스란 말 자체가 이미 가짜다. 트럼프가 비판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즐겨 사용한 'Fake News'라는 말을 '가짜뉴스'란 번역으로 들여온 이래 가짜뉴스는 '허위의 조작된 정보'라는 본래의 의미보다 훨씬 확장된 개념으로 사용됐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019년 시민 1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시민들은 속칭 '지라시'와 조작된 뉴스 외에도 사실 확인이 부족한 오보, 선정적 기사, 어뷰징 기사 등을 모두 가짜뉴스로 인식하고 있다. 언론의 잘못된 행태 전반을 '가짜뉴스'라는 단어로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떨어진 언론신뢰도, 잘못을 거듭하고 있는 언론행태, 정쟁을 곧 정치로 이해하는 낙후한 정치 환경에 '포괄적 개념의 가짜뉴스'가 결합하면 가짜뉴스는 '찍어주기 좋은 좌표'가 된다.

일테면 이런 식이다. 어느 정치인이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적'에게 유리해 보이는 기사, 혹은 '우리 편'에게 불리해 보이는 기사가 나오면 그것을 '가짜뉴스'라고 낙인찍는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게 왜 가짜뉴스인지 판단하겠지만 언론은 (포괄적 의미의) 가짜뉴스를 늘 생산하고 있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잘못된 언론관행으로 사회에 해악을 끼쳐온 기득권이기 때문에, 또 어떤 언론은 그 '적'의 편에 선 언론이기 때문에 '그게 왜 가짜뉴스냐'는 질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저 기레기가 기레기 한 사례가 하나 더 추가될 뿐이다. 유력 대선후보들이 제각각 자기에게 불리한 보도를 다 '가짜뉴스'라고 주장하고 있듯이(그 가짜뉴스 프레임을 가장 잘 이용한 것이 트럼프다. 가짜뉴스라는 '유행어'를 만든 것도 트럼프니까).
 

ⓒ pixabay

 
그래서 다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가짜뉴스를 때려잡고 언론의 책임을 제고하겠다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정말 가짜뉴스'만' 골라서 때려잡을 수 있을까? 그보다 무엇이 정말 가짜뉴스일까? 차라리 대선후보니 정치인들 같은 소위 '웃전들'끼리 싸우는데 가짜뉴스 프레임을 사용하는 일이야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있든 없든 언제는 안 그랬나' 하고 자조하면서. 그러나 진짜 더 큰 문제는 힘이 없어 억울하고 억울함을 해소하지 못해 더 힘이 없어지는 우리 같은 장삼이사들에게 발생한다.

이런 가정의 질문을 해볼 수 있겠다. 현재 논의 중인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통과된 세상에서 기업에 산업재해의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산업재해 사건에서 기업들은 재해의 업무 연관성을 판단할 수 있는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영업기밀이라는 이유다. 때문에 피해자 스스로 재해의 원인이 안전하지 않은 노동환경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그래서 언론의 역할이 강조된다. 부족한 정보 속에서도 합리적 의심을 도출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안전하지 않은 노동환경, 부족한 노동인권을 비판한다. 그 의혹제기와 비판을 바탕으로 사회적 논의를 주도하고 공론의 기회를 제공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성반도체 직업병 피해 사례다.

그런데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이 같은 보도는 사실상 요원하다. 민주당이 낸 개정안은 '진실하지 아니한 보도'를 징벌적 손해배상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재해의 업무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하며 일체의 정보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검증되고 객관적인 자료를 근거로 한 진실 된 보도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이 일하다 직업병을 얻었다"는 합리적 의심을 바탕으로 한 비판과 고발 기사는 '허위보도', '가짜뉴스'가 될 가능성이 크다. 민주당 개정안에 따르면, 징벌적 손해배상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는 입증의 책임은 언론사와 기자 개인에게 있다. 이를 입증하지 못하면 손해액의 3배 혹은 5배의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민주당은 대기업과 고위공직자에 대해선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게 하여 이 같은 일을 미연에 방지했다고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공시대상 기업집단은 71곳에 불과하다. 71개의 기업집단 외에는 얼마든지 언론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며 보도를 통제할 수 있다. 71개의 대기업도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한다 뿐이지 기사열람 차단을 청구하며 여론화를 가로막을 수 있다.

결국 가짜뉴스 프레임의 가장 큰 피해자는 비판과 문제제기의 경로가 닫혀버릴 사람들이다. 실제로 현재도 언론중재위원회를 통해 보도에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피해자'는 대부분 대기업이나 고위공직자들 주요한 감시와 비판의 대상들이다.

# 언론은 제도가 아니라 기능이다

그래서 이 기레기들과 언론적폐들을 그대로 놔두자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한국 사회의 왜곡된 언론문화는 바로잡아야 하고, 기레기라는 말도 아까운 일부 기자들이나 언론사들은 징치해야 한다. 다만 그 주체가 누구여야 하느냔 질문이다. 현행의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가짜뉴스의 프레임'을 전가의 보도로 삼아 그저 '마음에 안 드는 보도를 제어할 수 있는 근거'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 지금 그 법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선량하고 좋은 사람들만 있으리란 보장도 없는 일이고.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제도에 의한 통제, 법에 의한 규제를 신뢰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의심하기를 포기하는 태도다. 가짜뉴스가 무엇인지 규정하고 언론의 잘못을 지적하고 허위정보를 판별하는 것은 이 글을 읽고 쓰고 있는 우리 스스로 해야 할 일이다. 지난하고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의 말과 글을 빼앗기고 그저 찍어주는 좌표만을 쫓는 세상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언론이 잘못됐다고, 가짜뉴스가 횡행한다고, 그 허위정보의 팩트를 체크해보자고 말하는 것도 언론이다. 즉 언론은 제도와 기관이 아니라 사회의 뒤틀림을 방지하고 잘못을 정화해 가는 기능이다. 성능이 안 좋다고 기능을 제거해버릴 순 없는 노릇. 혓바늘 돋아서 밥 먹기 불편하다고 혓바닥을 뽑아버릴 순 없지 않은가.
 

SBS 대기획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 역으로 출연한 한석규 ⓒ SBS

 
<뿌리깊은 나무>의 마지막 회에서 결국 한글창제를 막지 못한 정기준은 세종에게 열린 언로로 인해 세상은 더욱 혼란해지고 백성들은 오히려 더 살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지금이 딱 그렇다. 자칭 엘리트라는 이들이 뿜어대는 각종 가짜뉴스와 사이버 레커들에 의해 세상은 단단히 오염됐다.) 이에 대해 세종은 "열린 언로와 그렇게 만든 지혜로 백성들은 스스로 극복해 나갈 것"이라고 답한다. (정치와 역사발전의 주체가 누구냐는 감동적인 질답이다!)

사실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계속 살아봐야 알 것이지만, 적어도 누구의 말이 더 멋있냐고 묻는다면, 내가 더 열심히 살 수 있는 쪽을 선택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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