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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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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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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산원에서 아기를 낳았다. 한국에서 조산원 출산 비율은 2%가 안 되고, 여기 오는 여성들은 고학력 전문직 페미니스트이고 생태주의 친화적인 경우가 많다. 평화로운 출산 이후 수월하게 모유수유를 시작했고 이용 가격마저 저렴하여 내가 스스로 한 선택에 자부심을 느껴왔다.

그런데 최근 이 생각이 변했다. 내가 가진 정보는 똑똑하고 진취적인 소수만 선택적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퍼져야 하는 것이었다. 엄마와 아기에게 이로운 출산 문화에 대해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른다는 것은 출발부터 불평등하다. (이런 맥락에서 '아기에게 친근한 병원 만들기 운동'도 그래서 병원 인증보다는 보편적 보건의료 체계에 통합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최근에 '엄마의 엄마'가 되어 반신불수 상태의 모친을 24시간 간병했고 부모 양쪽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시기에 깨달았던 점들이 너무 중차대하고 삶에 절실한 내용들이라, 조만간 이 내용을 정리해서 사람들과 공유해야겠다고 느꼈다. 이 내용들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왜? 사람은 누구나 죽고, 주변 사람의 죽음을 겪으니까.

그런데 22세 간병인의 존속살해 혐의 재판에 대한 기사를 읽고 다시 내 생각이 짧았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알게 된 내용을 퍼뜨리는 것은 그저 나의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내가 만나서 말을 전하거나 내가 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더 절실하게 죽음, 질병, 간병에 대한 고민과 지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정작 가 닿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죽음에 대해 미리 고민하게 하려면 공교육에서 죽음을 다뤄야 한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 물어야 한다 

내가 알게 된 핵심적인 질문은 이런 것이다. '당신은 어떤 상태로 삶을 이어가고 싶은가? 당신의 가족, 친구가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당신은 알고 있나?' 이것에 대해 모두가 이야기를 미리 해 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시력, 청력, 운동능력, 음식을 먹는 능력 등을 잃게 된다 해도, 새로운 것을 배우는 능력이 유지된다면 살고 싶다.

하지만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다면 그때는 내가 나 자신이 아닐 것 같다. 내가 이런 뜻을 반복적으로 사전에 가족, 친구들과 공유한다면, 내가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져서 의식이 없고 응급 수술에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해야 할 때, 친지들이 담당의사에게 '내 의사에 기반한 질문'을 할 수 있게 된다.

"수술해서 깨어나면 이 사람의 학습 능력이 유지될 수 있나요?" 담당의사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하면 나의 평소 뜻대로 수술하지 않고 보내 주는 것이 옳은 선택이다. 담당의사가 그건 가능하다고 하면 최선을 다해 치료하고 재활해야 한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는 재산도 충분하고 먼 미래에 기적의 치료법이 나올 수도 있다고 믿어서 어떤 조건으로든 살고 싶을 수 있다. 어떤 이는 지팡이를 짚고서 등산만 할 수 있다면 살고 싶을 수 있다. 어떤 이는 아프지만 않다면 살고 싶을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의사를 존중해주어야 하고 가치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또 시간에 따라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 그때그때 업데이트해서 주변 사람들과 공유를 해야 한다.

이 죽음에 대한 의사가 사전 공유되지 않으면(되더라도 미진하면) 예를 들어 이런 상태가 된다. 지주막하출혈로 갑자기 중태에 빠져서, 그대로라면 자연사하고 수술하면 생명 유지가 되는 기로에 섰을 때, 결정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가족은 "살려 주세요"라고 의사에게 매달리게 되고, 의사는 살리는 게 업이니까 수술해서 중태를 넘기게 된다. 그리고 자가호흡이 가능하고 비위관(콧줄)으로 영양공급하면 소화흡수가 되어 생명이 길게는 십수 년 넘게 이어지는 상태가 이어진다.

중태를 '넘겼기' 때문에, 이 상태에서는 영양이나 산소 공급을 차단하는 것은 살인이 된다. 이처럼 24시간 간병이 필요한 상태로 기나긴 시간을 보내는 것은 본인도 원하지 않았고, 아마 가족도 원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 얼결에 그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상황에 떠밀려들어가지 않으려면 미리 생각해두어야 한다. 닥쳐서는 절대 못 한다. '지금 수술 들어갈까요, 말까요' 묻는 의사 앞에 두고 환자의 평소 일기를 뒤지면서 가족회의를 할 수는 없다. 절체절명의 시간에 결정을 제대로 하려면, 미리 생각하고 공유해두어야 한다.

그런데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걸 5년 전부터 알았던 나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빠, 어떤 상황이 되면 삶을 선택하고 싶어요? 삶을 위해서 아빠에게 필수적인 조건이 뭐예요?" 이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터놓고 말하기 힘들어한다.

따라서 공교육에서 이 문제를 다뤄야 충분히 많은 대중이 이 문제를 미리 고민해볼 수 있게 된다. 초등학교에서도 초등학생 수준에 맞게 죽음과 질병, 사고에 대해 다루고, 중고등학교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볍게 다루자는 것이 아니다. 무겁고 진지하지만 편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숙제로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가치, 가족 구성원이 생각하는 삶의 가치'에 대해 써오게 한다면, 입이 떨어지지 않는 그 문제에 대해 적어도 한 번은 가족들끼리 이야기를 해보게 된다. 그리고 학교에서 이런 것을 배우지 않으면 대체 어디에서 배우겠는가? 그래야 갓 성인이 되어 가족의 치료나 수술에 대해 갑자기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내동댕이쳐졌을 때, 그나마 물어야 할 것을 물을 수 있다.

담당의사한테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묻는 건 정말 의미없다. 왜냐하면 의사들은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려만 주세요"라고 하는 것도 어떤 의미일지 다시 따져봐야 한다. 살려 달라고 하면 의사는 최선을 다해서 살린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삶이 어떤 것인지 따져 물어야 한다.

"우리 어머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만 삶을 유지하고 싶으시대요. 이 수술 후 깨어나시면 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나요? 아니면 발로 그릴 수 있나요?"

"우리 아내는 음식을 맛있게 먹지 못하는 상태로는 살고 싶지 않대요. 구강암 수술을 하고 나면 입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나요?"

"우리 짝궁은 친구들을 보고 친구들이 하는 대화를 듣고 웃을 수만 있다면 살고 싶대요. 전신을 못 움직이더라도 친구들과 이야기는 할 수 있게 될까요?"

"내 친구는 아픈 게 싫대요. 시술 후에 통증이 계속되는 상태로 살게 되나요?"


삶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공교육에서 다뤄야, 나중에 헤매는 일이 없게 된다. 특히 문화자본, 관계자본이 없는 계급의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뭘 모르고 있는지조차 몰라서 불이익을 받게 된다. (예를 들면 무슨 자격이 되는지 뭘 신청하고 뭘 제출해야 하는지 몰라서 나중에 의료보험 폭탄을 맞게 되기도 한다.)

지금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요양병원에 대한 평판을 묻고 어디에 뭘 신청해야 한다더라 어디가 등급이 잘 나온다더라 하는 카더라에 의존해서 우리 삶의 후반부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경계선상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체계를 지속해서는 안 된다. 죽음에 대한 특강만으로는 부족하다. 급한 대로 특강 형태로라도 널리 퍼져야겠지만, 죽음은 감정 말하기, 사회적 언어 사용법, 노동법, 기후위기 등의 주제와 함께 공교육에 통합되어 보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태그:#죽음, #공교육, #간병, #존엄사, #웰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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