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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오른쪽)가 12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존 오소프 미 상원의원을 접견, 악수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오른쪽)가 12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존 오소프 미 상원의원을 접견, 악수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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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12일 존 오소프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과 면담하면서 '가쓰라-태프트 협약'을 언급하며 "일본에 한국이 합병된 이유는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협약을 통해 승인했기 때문"이라 발언했다. (관련 기사: 이재명 "미국 덕 선진국됐지만, 가쓰라-태프트 협약도")

가쓰라-태프트 '협약'? 미국에서는 이미 50년도 더 전에 거짓으로 밝혀져

하지만 가쓰라-태프트 '협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1959년 미국의 역사학자 에스더스(Raymond A. Esthus)가 "태프트-가쓰라 협정 - 사실인가 신화인가?"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소위 '가쓰라-태프트 협약'은 신화에 불과했음이 밝혀졌다. 

'가쓰라-태프트 협약'의 신화는 1924년 테일러 데넷이라는 역사학자가 미 국회도서관에서 발견한 1905년 7월 29일자 태프트가 루즈벨트에게 보낸 전보에서 비롯한다. 해당 전보의 첫줄은 다음과 같다.

"Agreed memorandum of conversation between Prime Minister of Japan and myself(나와 일본 수상 간의 합의된 대화 각서)" 그런데 데넷은 'agreed memorandum'을 'agreement' 즉, 협정으로 해석하고 "루스벨트 대통령과 일본과의 비밀협정(Secret Pact)"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

그렇다면 왜 데넷은 태프트의 전보를 비밀협정으로 간주했을까? 데넷은 1905년 7월 31일 루즈벨트가 태프트에게 보낸 회신전문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귀하와 가쓰라간의 대화는 모든 측면에서 정확하다. 그러므로 귀하의 모든 발언을 내가 확인한다고 가쓰라에게 말해주길 바란다"는 것이 회신전문의 요지였다.

이에 데넷은 미국외교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행정협정(Executive agreement)의 내용을 이 회의록에서 찾아 낼 수 있다고 주장하고 논문에 첨부한 태프트 전보의 사진 복사본에서 태프트의 이름과 전보의 발신, 수신인을 삭제하고 전보 내용에 함께 들어있던 중국 관리의 미국입국 관련 내용도 생략함으로써 이 전보가 마치 비밀협정문으로 보이도록 둔갑시키는 극적인 효과를 고조시켰다.

하지만 1959년 에스더스가 전술한 논문을 발표하며 상황은 역전된다. 에스더스는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해당 전보가 단순한 회담에 대한 보고서일 뿐, 태프트와 가쓰라가 서명한 협정이 아니며, 협정체결은 육군장관의 권한을 벗어난 국무장관의 업무범위이므로 만일 태프트가 협정에 서명했다면, 그는 월권을 한 것에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또 에스더스는 내용의 측면에서 가쓰라-태프트 회담은 전자의 간청에 의해 불가피하게 후자가 사견임을 전제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이를 회의록으로 정리한 것일뿐 미국이 필리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일본에게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나 구절은 어디에도 없었음을 논증하였다.

일본 언론의 가쓰라-태프트 협약 보도에 적극 항의한 미국, 이에 사과한 일본

이러한 사실은 '가쓰라-테프트 협약' 보도에 대한 미국의 항의를 봐도 알 수 있다. 1905년 10월 4일, 일본의 친정부 언론인 고쿠민신문(國民新聞)은 가쓰라-태프트 회담에서 필리핀과 한국의 거래가 이루어졌다고 보도했다. 당시 주일 미국대사 그리스콤의 보고에 따르면 보도 내용의 요지는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의도가 없음을 선언하고 미국은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 하는 문제에 대해 지지를 표명한 양해가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 언론의 보도를 보고받은 루즈벨트는 태프트의 발언의 진의가 왜곡된데 대해 주미일본공사 타카히라를 초치해 강력 항의했다. 그는 1905년 10월 5일 태프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간섭을 방지할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으며 우리의 영토보전과 관련한 지원에 대해 어떠한 보장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며 '가쓰라-태프트 협약'을 재차 부인했다.

루즈벨트의 단호한 입장표명에 대해 일본정부는 공식해명을 해야만 했다. 1905년 10월 10일, 회담의 당사자인 가쓰라는 주미공사 다카히라에게 다음과 같이 해명할 것을 훈령했다.

"고쿠민 신문은 친정부적이지만 일본정부의 기관지는 아니며 대통령이 언급한 기사는 정부가 지시하거나 정보를 제공한 것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일본 정부는 조선에서 직면한 문제에 대한 미국 정부의 호의적인 태도를 인식하고 이에 감사한다...(중략) 미국의 그러한 태도가 거래 혹은 양해의 결과였다고 하는 것은 미국을 거짓되게 하고 미국이 지지하는 가치를 손상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귀하는 대통령에게 일본정부는 가능한 최선을 다해 미국의 실제 입장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려 노력할 것임을 전하라."

자국 여론 환기를 위해 협정이 존재했다고 거짓보도한 일본 정부

이처럼 가쓰라는 고쿠민 신문의 보도가 잘못된 것이므로 이를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런데 고쿠민 신문이 친정부성향이었음을 감안하면 해당 내용은 일본 정부 측이 흘렸을 가능성이 높다. 왜 일본 정부는 미국의 신뢰도 하락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래야 했는가? 또 왜 회담으로부터 2달 넘게 시간이 흐른 10월 초에 이런 이야기를 언론에 흘렸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당대의 일본 내부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05년 10월 초 가쓰라 내각은 포츠머스 강화회의에서 배상금 한 푼 받지 못한 외교적 실패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그 위기는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된 1905년 9월 5일,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 3만의 군중이 참석한 강화조약반대국민대회가 개최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해당 집회는 결국 군대가 투입되면서 소요는 진정되었지만 강화를 반대하는 대중 집회는 전국각지에서 개최되었고 10월 4일 추밀원에서 강화조약이 승인될 무렵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일본정부가 가쓰라-태프트 회담를 필리핀과 한국을 거래한 '협정'으로 둔갑시킨 근본원인은 강화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반정부 여론과 이에 따른 내각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일본 국내상황에 있었다. 추밀원에서 강화조약을 승인한 1905년 10월 4일에 고쿠민 신문에서 태프트-가쓰라간의 비밀거래에 대한 언론보도가 나온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란 얘기다.

일본의 사료조작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한국사 교과서... 이제는 바뀌어야 할 때

그렇다면 왜 '가쓰라-태프트 협약'은 한국에서 교과서에 실릴 만큼 정설로 받아들여졌는가? 이는 1959년 일본외무성이 발향한 "일본외교문서"의 사료조작을  고스란히 수용한 결과다. 일본외무성은 태프트의 전보를 "THE TAFT-KATSURA AGREEMENT"라 이름 붙이고는 자의적으로 편집하여 마치 전보가 협정문처럼 보이도록 조작해 놓았다. 

이후 1960년대 들어서 이러한 일본 측의 사료조작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고 한국사 교과서들에 해당 내용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1950년대의 경우에는 1957년 간행된 최남선의 <고등학교 사생과 고등국사>나 1959년 간행된 이병도의 <노일세력의 각축>과 <한·일병합>에서는 '가쓰라-태프트 협정'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처럼 '가쓰라-태프트 협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재명 후보의 발언처럼 미국이 일본의 조선 합병을 승인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렇다고 이 후보에게만 뭐라고 할 처지가 못 된다. 애초에 수십 년간 우리 역사 교과서가 그런 식의 서술을 해왔기 때문이다.

한국 사학계는 일본 외교문서의 역사 왜곡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고 그 결과 아직도 일본의 논리를 한국사 교과서가 재생산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가쓰라-태프트 협약'에 대한 최근의 연구사실들에 따라 보다 사실에 가깝게 한국사 교과서 서술을 바꿀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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