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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그는 1948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1970년 22살의 어느 늦은 가을날 온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여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고발하였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근로기준법서를 껴안고 그가 외친 주장은 이랬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할 정도의 낮은 천장, 통풍이 되지 않아 보풀이 풀풀 날리는 작업환경, 그로 인해 얻게 된 폐질환, 12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 봉제공장 공돌이 공순이 쳇바퀴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저임금. 그런 작업조건 속에서 파란 청춘은 누렇게 뜬 시레기처럼 시들었다. 

그런 상황들이 부당함을 명시한 근로기준법이 당시에도 있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내용을 어린 노동자들에게 교육하였고, 법을 준수해 줄 것을 당국에 여러 번 진정하였다. 돌아온 것은 회사로부터 해고와 당국으로부터 철저한 무시였다. 그는 결국 극단의 선택을 하였고, 그의 몸을 태운 불꽃 속에는 핏기없는 봉제공장 소녀공들의 못다 핀 꿈도 서려 있었으리라. 

나의 누이, 그녀는 1960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1976년에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수원에있는 한일합섬 노동자로 보내졌다. 소유하고 있던 논밭뙈기가 여섯 식구 입에 풀칠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고 대부분 소작을 붙여먹던 처지였던지라 부모님 입장에서는 어린 딸을 돈벌이로 내모는 것은 부득이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누이가 수원에서 '공순이' 생활하면서 가끔 보내오는 '캐시미론' 모포 이불은 신세계를 마주하는 것만큼이나 열두 살 소년을 들뜨게 만들었다. 솜이불이 따라 올 수 없는 가벼움과 착착 감기는 촉감이 너무 좋았다. 

누이의 매일의 수고로움이 소년의 가슴에 가서 닿을 리는 만무하였고, 가끔 보내오는 이불 어딘가에 팍팍한 일상이 묻어 있을 까닭도 없었다. 캐시미론 이불을 보내주는 누이가 마냥 좋았다. 남들이 감히 가질 수 없는 것을 누리게 해 준 누이가 자랑스러웠다. 

그런 누이가 수원 생활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고향집으로 들이닥쳤다.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울먹였다. 

"나 학교 잔 보내주씨요."

누이의 목소리는 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느그 동상들 셋이나 갈차야 쓴디 너까지 속을 썩이냐."

아버지는 한마디 내뱉고 초점 없는 눈길을 먼 하늘에 두고 담배만 뻑뻑대고 있었다. 

"아따, 으치케 쌀쌀 갈차 봅시다. 산 입에 거미줄이사 칠랍디여?"

어머니는 아버지 눈치를 슬슬 살피며 아버지를 달래고 있었다. 

누이는 그 이듬해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하기 까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얼마만큼의 갈등이 있었는지, 누이가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얼마만큼의 눈물을 더 쏟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시 학교에 다니면서 누이의 고달픈 영혼이 얼마나 평안해졌을까. 

한참 뒤에 내가 철이 들면서부터는 누이를 바라보면 마음이 시리다. 그리고 전태일의 고단했던 삶을 누이의 일상에 겹쳐서 보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전태일 열사 가신 날에 누이의 소녀공 시절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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