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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50분. 쌀쌀한 가을 공기에 옷을 여민 채 서울로 가는 무궁화호에 타기 위해 대전역 행 버스에 몸을 올랐다. 휴대전화로 다시 한 번 장소와 시간을 확인. 11월 10일 오전 10시, 금천구청역 앞. 그렇게 나는 차별금지법 제정연대에서 주최하는 시민대행진에 참여하는 길을 나섰다.

참여하게 된 까닭은 알량한 죄책감때문이었다. 차별금지법에 관한 기사를 송고하고나니 따뜻한 방에서 글줄이나 써서 글값을 받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한 달 동안 500km에 달하는 여정을 오롯이 맨발로 걸으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외쳐온 분들께 죄송스러웠다. 국회로 향하는 마지막 날. 이날마저 참여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차별금지법에 대해 공적인 글을 쓸 자신이 없었다. 정당이나 단체에 소속되지도, 같이 갈 사람도 없었지만 그래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10일 오전 10시, 금천구청 역 앞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염원하는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10일 오전 10시, 금천구청 역 앞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염원하는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 박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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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가 다 되어 도착한 금천구청 역 앞에는 수많은 깃발들이 나부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때의 촛불시위 이후 처음 참석한 집회여서 꽤나 낯설기도 했다.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프라이드 깃발을 주최측으로부터 건네받고 국회로 향하는 세 시간의 행진에 첫 발을 뗐다. 새벽에 서울 지역에 첫 눈이 내렸다해서 걱정이었지만 다행히도 날씨가 좋았다.

휠체어에 탄 장애인 활동가 세 명이 선두에 섯다. 행진 인원을 이끄는 방송차량에는 각 지역에서 모인 단체의 활동가들이 차례차례 올라가 자신의 목소리, 더 나아가 해당 단체가 대변하는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외쳤다. 몇 명은 감정에 벅차 울먹거리기도 했다.

수백 명의 시민들이 한 목소리로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하라. 우리가 끝낸다, 국회의 침묵. 우리가 만든다, 평등의 약속"라는 구호를 부르짖었다. 스무 살 때 참석한 2016년 촛불시위에서 느꼈던 그때는 명명하기 힘들었던 그 감정, 이제는 연대감이라 부를 수 있는 그 감정을 다시 한 번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차별금지법 대표발의 의원 중 장혜영 정의당 의원만 참석...
국회는 행진 전날 21대 국회 마지막 날로 차별금지법 심사 연기해


한편 행진에는 21대 국회에서 처음으로 차별금지법을 대표발의한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참석해 세 시간 내내 시민들과 함께 국회를 향한 행진에 참여했다. 장 의원처럼 각각 비슷한 내용의 차별금지법을 대표발의한 권인숙·박주민·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들 네 명은 3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1대 국회에서 반드시 평등법,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며 "더 이상 논의를 미룰 수 없다"고 밝힌 바 있지만 그들 중 행진에 참여한 이는 장 의원 한 명뿐이었다.

사실 행진이 있었던 10일 당일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아래 법사위)가 차별금지법에 대해 본회의 부의 여부를 심사해야 했던 마지막 날이었다. 지난 6월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회 국민동원청원은 10만 명 이상의 동의를 받았다. 2019년 4월 16일 국회법 개정에 따라 국회는 국민동원청원 사이트에 청원서가 공개 등록된 후 30일 이내 10만 명 이상의 찬성을 받으면 해당 청원은 국회 법사위에 자동 회부되어 최대 150일 이내에 본회의 부의 여부를 심사해야 한다. 

하지만 행진이 있기 하루 전인 9일, 법사위는 고작해야 43초 만에 차별금지법의 심사 기한을 자그마치 2024년 5월 29일까지 연장했다.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위원회의 의결로 심사기간을 추가 연장할 수 있다는 국회법 125조 6항에 따른 것이다. 2024년 5월 29일은 21대 국회의 임기 마지막 날이다. 사실상 이번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사실에 분노한 시민들의 구호는 더욱 커지고 각자의 깃발들을 더욱 높이 세웠다.
 
차별금지법 시민대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이 각자의 깃발들을 흔들고 있다.
 차별금지법 시민대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이 각자의 깃발들을 흔들고 있다.
ⓒ 박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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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 제정에 한목소리 낸 활동가, 국회의원, 종교계

세 시간의 행진 끝에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했다. 행진에 함께 한 시민들은 아스팔트 바닥에 자리를 잡고 차량에 올라가 연사에 나선 이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국회 앞에서 발언하는 이종걸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대표와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맨 오른쪽은 수화통역사분.
 국회 앞에서 발언하는 이종걸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대표와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맨 오른쪽은 수화통역사분.
ⓒ 차별금지법 제정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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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동안 72만 보 가량을 걸으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외쳤던 두 활동가, 이종걸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대표와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가 함께 차량에 올랐다. 

이 대표는 "어떻게 10만 시민들의 청원 요구를 심사 연장이라는 공문 하나로 답할 수 있나. 자신들이 세운 청원 제도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하나"면서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대놓고 차별과 혐오를 드러내는 일보다 '지금은 아니야'라며 공손하게 웃으며 칼을 꽂는 저 너머 국회의 권력자들의 오만방자함이다"라며 법사위의 무책임한 심사 연장에 대해 일갈했다.

미류 상임활동가는 "같이 걸었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했다. '차별금지법은 내 이름을 불러주는 법이다'라고. 이렇게 같이 살아가는 데도 보이지 않아 투명인간 취급 당하는 사람들, 차별당했다고 말해도 말해도 들어주지 않는 이 사회 속에서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이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법이 차별금지법이다. 그런데 14년의 시간을 줘도 이 법 하나 못 만드나"라며 14년이라는 세월 동안 차별금지법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침묵으로 일관한 국회를 비판했다. 
 
국회 앞에서 발언하는 장혜영 정의당 의원
 국회 앞에서 발언하는 장혜영 정의당 의원
ⓒ 박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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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영 정의당 의원도 목소리를 냈다. 장 의원은 "차별을 금지하자는데 사회적 합의를 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라며 "설령 100명 중 99명이 차별에 찬성해도 한 사람이라도 차별하면 안 된다고 외치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국가다. 그런데 우리에게 차별금지법 찬성하는 99명 만들어 오라고 한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다"라며 걸핏하면 사회적 합의를 운운하는 정치권의 행태를 비판했다.

종교계 인사 역시 차별금지법 제정에 발언을 보탰다. 박승렬 차별과 혐오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 공동대표는 "사회적 합의를 요구하기 전에 개신교 내의 차별금지법 찬반부터 합의해야 한다"며 "종교의 자유를 얘기하며 불교 등 타 종교의 목소리는 무시하며 보수 개신교의 입장만 듣는 것은 보수 개신교를 향한 특권"이라고 꼬집었다.

박 대표의 말대로 불교계는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등 23개 불교 단체들로 구성된 '차별금지법 제정 불교네트워크'를 창설하고 지난 5월 27일 국회에서 기자회견과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기도회를 열기도 할 정도로 차별금지법 제정에 우호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다. 

사회적 합의 운운은 정치인들의 적반하장 다름 아니다

그 외에도 많은 인사들이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을 촉구하며 한목소리를 냈다. 시민들도 인원들의 발언에 대해 환호와 박수로 응답했다. 하지만 이러한 차별금지법을 향한 시민들의 열망에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양당 대선 주자들은 사회적 합의를 얘기하며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거나 미적거리고 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지난 10월 28일 한국교회총연합(아래 교총)을 방문해 "지금 우리나라는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서 시기상조다", "이 문제는 국민적인 공감대와 합의가 있어야 한다"라며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은 반대"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8일 교총과의 만남에서 "충분한 논의를 통해서 국민적 합의에 이르러야 된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는 데에 이어 10일 관훈토론회에서도 "일반통행·강행처리 방식으로 갈등을 극화하는 방식보다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충분한 논의와 타협을 통해 사회적 합의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14년 동안 차별금지법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책임은 시민들이 아닌 바로 정치에 있었다. 국회와 행정부 등 정치인들이 차별금지법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놓고 이제 와서 시민들에게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만큼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어디 있는가.

이미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찬성 비율은 절반을 훌쩍 넘기고 있다. 이처럼 차별금지법 제정은 더 이상 사회적 합의를 핑계로 미룰 수 없다. 14년의 외침, 14년의 기다림이 15년이 될 수는 없다. 그날의 외침을 다시 한 번 외쳐본다.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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