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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단체와 시민들의 연대로 2005년 호주제도가 폐지됐습니다. 그러나 민법상 부성우선주의 조항이 남아 있는 탓에, 엄마 성을 쓰는 일은 여전히 낯설어 보입니다.

2000년 호주제 위헌소송이 제기된 지 21년이 지난 올해. 아이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기로 결정하고 민변과 함께 법원에 성본 변경을 청구해 9일 확정원을 받은 정민구·김지예 부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민변 여성인권위는 이날 기자회견과 함께 보도자료로 "법원의 허가결정은, 일반 가정에서도 엄마의 성과 본을 자녀에게 물려줌으로서 자녀가 입는 이익이 불이익보다 크며 궁극적으로 자녀의 복리에 부합한다고 인정했다는 데에서 의의가 크다"고 알렸습니다.

다음은 아버지 정민구씨가 쓴 편지입니다.[편집자말]
저희 부부는 아이에게 엄마성을 물려주기로 했습니다. 11월 9일자 보도된 '엄마 성 물려준 가족들... 현행법 한계는' KBS 뉴스 화면갈무리
 저희 부부는 아이에게 엄마성을 물려주기로 했습니다. 11월 9일자 보도된 "엄마 성 물려준 가족들... 현행법 한계는" KBS 뉴스 화면갈무리
ⓒ KBS뉴스 화면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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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정원이에게

사랑하는 정원아, 아빠야. '언젠가 정원이가 이 편지를 보겠지?'라는 마음으로 썼으니까 나중에 꼭 잘 읽어봐 줘.

오늘(11.9일)로 정원이가 태어난 지 벌써 180일째네. 그동안 무럭무럭 잘 자라줘서 정말 고마워. 병원에서 네 심장 소리를 듣고 너의 눈코입을 보며 너를 상상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너와 함께한 하루하루가 정말 힘들긴 했지만 난생처음 느껴보는 가슴 벅참을 선물해 주기도 했어. 그리고 정원이 아빠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을 갖게 해줘서 고마워. 널 키우면서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더라고.

저출생이 문제라면서... 아이 키우기는 너무 힘든 현실
 
성본변경 청구인 가족(오른쪽)이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열린 '엄마의 성·본 쓰기' 성본변경청구 허가 결정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앞서 서울가정법원은 지난달 아빠의 성으로 출생 신고된 자녀의 성을 엄마의 성으로 바꾸게 해달라며 청구인 부부가 낸 성본변경청구에 대해 "이유가 있음으로 허가한다"고 결정했다.
 성본변경 청구인 가족(오른쪽)이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열린 "엄마의 성·본 쓰기" 성본변경청구 허가 결정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앞서 서울가정법원은 지난달 아빠의 성으로 출생 신고된 자녀의 성을 엄마의 성으로 바꾸게 해달라며 청구인 부부가 낸 성본변경청구에 대해 "이유가 있음으로 허가한다"고 결정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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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생(저출산)이 국가적 문제라면서, 보건소에서 유축기 하나 빌리려면 왜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하지?
산후조리원은 왜 이렇게 비싸지?
이마트 수유실에는 왜 아빠가 들어갈 수 없지?
유아차가 다닐 수 없는 길이 왜 이렇게 많지?
노키즈존? 아이들 오지 말라는 건 차별 아닌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에게 왜 엄마 성을 물려줄 수가 없는 거지?
 

아빠와 엄마는 앞으로 정원이를 키우며 맞닥트리는 불합리한 상황에 맞서 나갈 생각이야. 엄마 성을 물려 주는 것도 그런 생각의 실천이고.

아빠도 사실 결심이 쉽지는 않았어
 

사실 네게 엄마 성을 물려 주기로 결심하기까지 쉽지 않았어. 할머니, 할아버지를 설득할 자신도 없었고 주변 지인들의 반응도 떨떠름했거든. 마치 우리에게 '유난 떤다'고 보는 느낌이었달까?

근데 네 엄마와 오랜 시간 같이 얘기해 보고, 생각해 보니까 아빠가 망설였던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그건 바로 '내 걸 뺏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어. 정원이에게 아빠 성을 물려주는 게 당연한 건데,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나만 왜 성을 물려줄 수 없지? 뭐 이런 쪼잔한 마음 말이야.

따지고 보면 그래. 엄마가 열 달 동안 뱃속에 정원이 품고 목숨 걸고 출산해서 젖 물리느라 밤낮없이 고생하는 거 생각하면, 거기에 비해 아빠는 기여도가 미비한데 말이야. 그런데도 성은 아빠 성을 물려 주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게 미안해지더라구.
 
성본변경 청구인 가족이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열린 '엄마의 성·본 쓰기' 성본변경청구 허가 결정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에 아이를 안고 있다.
 성본변경 청구인 가족이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열린 "엄마의 성·본 쓰기" 성본변경청구 허가 결정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에 아이를 안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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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마음을 먹으니까, 성이 뭐 대수인가 싶었어. 정원이가 김정원이든, 정정원이든 우리 정원이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정원이잖아(근데 정정원은 좀 그러네, 청정원이라고 놀림 받을 거 같아).

정원아, 네 이름이 왜 정원인 줄 알아? 엄마가 식물 키우는 걸 좋아하거든. 작은 베란다 정원에 앉아 한낮의 따스한 햇볕 쬐기. 식물들에게 시원하게 물 뿌려 주기. 이런 걸 엄마는 무척 좋아해.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는 엄마 모습을 보면 아빠도 기분이 좋아져. 그래서 너도 너만의 정원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있는 힘껏 행복하길... 너만의 정원을 꼭 가지길

세상 살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때가 있거든. 그럴 때 너만의 정원에서 편하게 쉬고 놀면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네 이름을 정원이라고 지었어.

기억해둬. 우리는 모두 행복하게 살기 위해 태어났다는 걸. 행복하기 위해 힘껏 노력하는 것, 그걸 우린 인생이라고 불러.

근데 혹시 말이야, 나중에 누가 네 성이 아빠 성과 다르다고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편견쟁이는 멀리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네가 엄마 성 쓰는 걸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차별해 온 부성우선주의 원칙에 우리는 당당히 맞선 거야.

앞으로도 편견과 차별에는 당당히 맞서는 정원이가 됐으면 좋겠어. 아빠가 너무 많은 걸 바라나? 대신 '공부해라, 좋은 대학 가라, 돈 많이 버는 일 해라, 결혼해라, 아기 낳아라' 이런 잔소리는 하지 않을게. 정원이는 정원이답게, 너만의 삶을 살아. 이 정도면 너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거야.
 
성본변경 청구인 가족이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열린 '엄마의 성·본 쓰기' 성본변경청구 허가 결정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해 아이를 돌보고 있다.
 성본변경 청구인 가족이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열린 "엄마의 성·본 쓰기" 성본변경청구 허가 결정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해 아이를 돌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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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아. 우리 재미나게 살아보자.
너와 지금까지 함께 한 시간은 가슴 벅찼어. 앞으로도 너와 함께 할 순간들이 기대되는구나.

2021년 11월 9일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성본 변경 확정원을 손에 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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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아빠 성이 아닌 엄마 성을 물려주며 http://omn.kr/1mez2
혼인신고서 작성하다 깜짝... 우리 부부가 '비정상'인가요? http://omn.kr/1rumf
저희 부부, 부성우선주의에 '헌법소원 제기'합니다 http://omn.kr/1s91y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엄마 성을 물려줄 수 있는 권리 모임 회원과 '엄마의 성·본 쓰기' 성본변경 청구인 가족 등 참석자들이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법원의 성본변경청구 허가 결정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엄마 성을 물려줄 수 있는 권리 모임 회원과 "엄마의 성·본 쓰기" 성본변경 청구인 가족 등 참석자들이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법원의 성본변경청구 허가 결정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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