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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시인의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가 제8회 박재삼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박재삼문학상은 등단 10년 이상 된 시인을 대상으로 박재삼 시인의 서정에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전년도(2020년 1월~12월)에 발간된 모든 시집을 대상으로 심사를 합니다. 이에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를 리뷰합니다. [기자말]
식물에 물을 주고 꽃을 만드는, 시 짓는 사람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뭍에서 섬으로, 배를 갈아타고 다시 섬으로 들어가면 빈 방 하나 있으니 거기서 만나자고 한다. 다시 태어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 비어있는 방을 알고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 방 왼편에는 바다가, 뒤편에는 슬픔이 있으니 며칠 머물다 가라고 한다.

시인 이병률은 도시 안의 꽃들, 섬에서 피어난 식물의 이름을 불러주길 좋아한다. 언젠가, 식물들과 나무를 어떻게 그리 잘 아느냐고 물으니 '식물가게 주인'이라 했다. 가게 이름은 '그대가 준 꽃'. 시인은 자신을 '아름다운 것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라고 했다.
 
이병률 시인의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문학동네, 2020).
 이병률 시인의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문학동네, 2020).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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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나눠 줄 아름다움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을 예감했던 것인지 시인은 자신의 자리를 '슬픔' 속에 만들었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만나자고 제안하는 슬픔에게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준다.
 
"이 생에서는 실컷 슬픔을 상대하고 / 단 한 줄로 요약해보자 싶어 시인이 되었건만 / 상대는 커녕 밀려드는 것을 막지 못해 / 매번 당하고 마는 슬픔들은 무슨 재주로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 슬픔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 <슬픔이라는 구석> 부분

시인은 스스로가 슬픔이 많은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조금은 시 짓는 게 수월할까 싶었지만, 밀려드는 그 많은 슬픔들을 '단 한 줄로 요약'하는 일이 어찌 가능하겠느냐고 솔직하게 말한다. 대신 시인은 슬픔을 만나는 시간을 거부하지 않는다.

슬픔을 친구로 둔 시인은 가끔 생각한다.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아주고 있다고. 얼마 안 되는 하루가 아무 쓸모 없어보이거나 비겁한 하루를 보낸 날에는 그 공백을 '다른 누군가'가 대신 살아내주는 것 아닌가 자책한다.
 
"인생은 나 스스로 살아가는 사막과 / 누가 대신 살아주는 남극 / 그 둘의 배합으로 버무려진다 // 한사코 불속으로 들어가 불속에서 뭔가를 꺼내들고 걸어나오는 사람은 내 삶을 대신 살아주느라 불을 덮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 그러니 이토록 살고 있는 것은 /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아주고 있는 것 같아서다" - <내 삶을 누군가 대신 꺼내 쓰고 있다> 부분

사랑의 명령 대신 슬픔을 지고 사는 시인은 슬픔의 존재들에게 당당할 것을 요청한다 너도 나도 사라짐을 향해 걷고 있을 뿐이라고. 우리 슬픔은 원래 예정되고 약속된 것이라고. 
 
"아무리 이 삶이 틀렸다 하더라도 / 우리는 사라질 때 열쇠 하나를 숨기고 / 그 또한 의미가 될 거라는 순리를 기억할 것 / 그리고 내 열쇠는 누가 줍게 되는지 염두에 둘 것 // 압축되어 당당히 사라지자// 당신도 원래 바다였다" - <사라지자> 부분    

'생의 등판번호가 45라 하더라도, 생의 좌석번호가 11b'라 하더라도 결국 누구나 사라진다. 그러니 시인은 각자의 의미와 열쇠를 쥐고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당부한다. 그렇게 각자의 열쇠는 각자의 아름다움이 되고 이름이 된다. 그 뿐이다. 그래서 시인은 섣불리 사랑을 앞세우지 않는다. 그저 가끔 만나자고 한다.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리라 / 그러므로 나는 / 아무것으로도 이름 부르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 당신에게 해야겠다 // 당신 앞의 쓸 만한 꽃이 되어도 좋겠다 싶지만 / 그렇게도 않겠다 // 사랑을 앞세워 / 무엇도 이름하지 않으리라 // 무엇이더라도 필요치 않으니 / 당신은 그대로 가만있으라" - <자유의 언덕> 부분

태그:#이병률, #박재삼, #박재삼문학상,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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